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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75] 형님은 제 인생항로의 등대였습니다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4-21 16:04:43 ] 클릭: [ ]

[수기 75] 형님은 제 인생항로의 등대였습니다

제가 조카 허매화의 부탁을 받고 형님(허동준)과 형수를 노래한 가사를 쓴 과정을 엮은 수기 〈주소없는 편지〉가 2021년 2월 20일 《길림신문》 수기 전문란에 66기로 발표되였습니다. 저는 또 조카의 분부대로 22일 아침 일찍 신문사에서 출근하기도전에 뛰여가 우편함에서 신문 3장을 꺼내들고 형님이 계시는 양로원으로 부리나케 뛰여 갔습니다.

 
수기 〈주소없는 편지〉를 읽고 계시는  필자의 형님 (허동준)

조카는 벌써 아버지의 이부자리를 정돈해 놓고 아버지를 세수시키고 옷을 갈아 입히고 면도까지 해드리고 있었습니다. 조카가 아버지 시중을 마치기 바쁘게 저는 휠체어에 앉아 있는 형님 곁에 다가가서 신문에 실린 수기를 또박또박 읽어 드렸습니다. 1954년 6.1국제아동절을 앞두고 형님께서 피를 팔아(수혈) 이 동생의 붉은 넥타이며 옷견지, 신발까지 사 갖고 와 몸소 입혀도 보고 신겨도 보였다는 대목을 읽어 드릴 때 저는 그만 울컥 눈물이 솟구쳤고 형님께서도 감격에 목이 메여 끝내는 흐느끼는 것이였습니다.

“이젠 나도 가야겠구나. 형수님한테 가서 이 사연을 얘기해야 하겠구나…” 형님께서는 마치 무엇인가 기다리기라도 한듯이 이젠 형수님(2년전 세상떴음) 곁으로 가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 옆에서 눈물범벅이 되여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조카는 “삼촌, 이 수기는 정말 천냥 주고도 살 수 없는 보배(无价之宝)입니다.”라고 하면서 저에게 신문 3장을 부탁한 까닭을 밝히는 것이였습니다. 한장은 이미 세상 뜬 어머니의 골회함에, 또 한장은 조만간에 돌아가실 아버지의 골회함에 넣고 또 다른 한장은 액자에 정교하게 모시고 두고 두고 기념하겠다고 하는 것이였습니다. 조카의 부탁을 받고 쓴 형님과 형수님을 노래한 가사를 담은 수기가 이 같이 짜릿한 울림을 자아내고 이토록 큰 의미를 담을 줄은 미처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이에 앞서 제가 40여년전 장모님의 환갑을 앞두고 처남 한국록의 부탁을 받고 장모님을 노래한 가사 〈오래오래 앉으세요〉를 쓰게 되고 또 안해 한명자의 부탁으로 “고생 끝에 락을 보신 우리의 어머니”라는 구절을 넣어 가사를 완성한 데다 그 노래가 크게 뜨면서 저는 사위 구실, 매형, 남편 노릇을 한 것 같아 처가집 식구들을 마주하기가 아주 떳떳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제집안 일에는 별로 해 놓은 일이 없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늘 허전했는데 조카의 부탁으로 ‘자식 못지 않게 돌봐준 형님, 형수님의 사랑’에 늦은 이때나마 〈주소 없는 편지〉라는 수기를 써서 신문지상에 올리고 보니 동생으로서, 시동생으로서의 노릇과 삼촌의 구실도 마저 한 것 같아 마음속에 맺혀있던 응어리가 확 풀리는듯 한결 마음이 홀가분했습니다.

그 뒤로 3일째 되는 날 정월 보름을 앞두고 형님 보러 양로원에 찾아갔더니 형님은 역시 그 신문을 펼쳐들고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이튿날 이른 아침 5시경에 조카한테서 아버지께서 금방 세상 뜨셨다는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저는 너무 서러워 왕왕 흐느껴 울었습니다.

형님의 영결식은 연길시 북산장의관에서 치렀습니다. 아직은 겨울철인데도 하늘은 유난히 쾌청했고 바람조차 잔잔했습니다. 추모객은 친척, 친우들 근 100명에 가까왔습니다. 안신제를 지내면서 저는 안해와 함께 술을 붓고 무릎을 꿇어 세번 절을 하며 마지막 인사를 올리고 나서 밤새껏 준비한 추도문을 형님의 령전에 올렸습니다.

그 제목이 〈형님은 제 인생항로의 등대였습니다〉입니다. 형님은 화룡현 서성중학교를 다니던 1940년대부터 뽈을 차면서 많은 전설을 남긴 분입니다. 뽈을 어찌나 힘차게 찼던지 꼴문대를 넘어뜨렸다는 지, 축구뽈이 발에 맞아 신발에 감겼다는지 조선족 초대 축구명장인 화룡현관중학교 체육교원 채선생(그 후 연변대학 초대 체육교원)과 맞부딛쳐서 억대우 같은 축구선배를 넘어 뜨렸다는 지, 조선 김일성종합대학 축구선수로 발탁되기도 하였다는 지 ...아주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1955년 형님 허동준의 이름은 길림성축구팀 팀원 명단에도 올랐었습니다.

 
축구선수였던 형님

저와 형님은 10년 차이라 저는 형님이 뽈 차는 모습은 본 기억이 없지만 형님이 다닌 서성중학교와 룡정고중, 연변대학의 동창생들이 하는 얘기를 많이 들으면서 ‘나도 형님처럼 뭇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샤람이 되겠다’는 다짐을 가지게 되였습니다.

형님은 또 효심이 깊은 효자였습니다. 형님은 그 화려한 축구인생도 접고 우리 가족을 위해 고향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형님은 늘 지병으로 앓고 있는 어머니의 편두통을 치료해 드리기 위해 어머니를 업고 다니면서 명의란 명의는 다 찾아 다녔습니다. 지어는 직장에서 그 때 돈 800원을 꿔 가지고 와서 어머니를 업고 장춘 병원까지 갔더 랬습니다. 형님의 효심에 감동된 한 허씨 성을 가진 명의는 형님을 양아들로 삼기까지 하였습니다.

어찌 그뿐이겠습니까, 이 동생에 대한 형님의 사랑은 정말 한입으로 다 말하기 어렵습니다. 오라지 않아 학교에 입학하게 될 동생이 정맥염에 걸려 무릎에서 고름을 짜면 발목구멍에서까지 고름이 줄줄 흘러 내리게 되자 형님은 온갖 수소문 끝에 20여리 상거한 장항촌 수림 속을 헤치며 유근피를 한아름 캐여 왔습니다. 그것을 슬쩍 삶은 물을 다리에 바르니 고름이 멎고 다리에서 새살이 돋아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도 형님만 아니였다면 아래 우 형제들처럼 언녕 저세상으로 갔을지도 모르고 또 평생 불구자로 고생했을지도 모릅니다. 저의 부모님들은 자식 열셋을 낳았지만 다 죽고 우리 넷만 남았던 것입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이 동생이 서성중학교를 다닐 때였습니다. 어쩌다 형님이 집에 돌아왔는데 동생은 밤새껏 악몽을 꾸며 헵뜨는 소리를 해댔습니다. 형님은 동생이 깨여나기를 기다려 영문을 묻기 시작하였습니다. 소학시절부터 공부를 잘하고 시랑송도 잘하고 탁구도 소문나게 잘 치면서 사생들의 총애를 받아오노라니 일부 동창생들의 멸시를 사게 되였고 왕따를 당하게 되였습니다.

강의 시간이 끝나 휴식하러 밖에 나갔다오면 책상 우에 놓은 공책과 교과서가 잉크 범벅이 되기도 하고 소선대 대대장으로, 단지부 선전위원으로 활약하면서 학교 벽보를 꾸리고 저녁 늦게 6, 7리 되는 집으로 돌아갈 때면 길옆에 몸을 숨겼던 두 아이들이 주먹 만한 돌멩이를 뿌려 저의 귀전을 스쳐지나군 하였는데 그 때마다 간담이 서늘하였습니다. 이렇게 낮에 큰 위협을 받았던 일로 하여 장밤을 악몽 속에 헤매는 동생을 지켜보던 형님은 자초지종을 듣고나서 너무나 분하여 아침 일찍 동생을 데리고 자기의 모교이기도 한 서성중학교를 찾아가 교장선생님에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리하여 체조시간에 교장선생님은 그 두 학생에게 엄중 경고처분을 준다고 선포하였고 다시 그런 일이 발생하면 퇴학을 준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 뒤로는 다시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형님과 함께 있는 신문을 읽고 있는 필자(뒤) 

이 같이 저를 늘 자식처럼 돌봐주시던 형님인데 평생 마음속 기둥으로 저를 옆에서 지켜주시던 형님인데 형님은 이 동생을 이 세상에 남겨두고 불같은 성질과 같이 급작스레 저세상으로 가신 겁니다. 형님의 축구 인생도 전설이였고 가족 사랑도 전설이였으며 마지막 하직도 다 전설이 되였습니다.

제가 형님의 지극한 효성을 본받아 쓴 효도가요 〈오래오래 앉으세요〉는 중국 20세기 경전작품집 《중화 세기민족의 노래》에 입선되였고 ‘중국10대 고전명곡’으로 뽑혔으며 아시아 여러 나라와 유럽에까지도 널리 전해 졌습니다. 그리하여 이 동생은 또 ‘중국조선족 작사대가’라는 칭호를 받아안게 되였습니다.

형님께서 뒤받침 해주시고 기대해주셨던 이 동생의 인생이 성공적인 인생이라고 한다면 여기에는 형님의 지극한 사랑과 헌신이 녹아 있습니다. 형님은 정녕 이 동생의 예술 항로를 비쳐준 등대였습니다. 가족을 위한 형님의 그 헌신정신을 저를 비롯한 우리 허씨 가족은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형님, 청명날 이 아침 이 동생은 다시 한번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려 형님과 형수님 두분의 명복을 빌고 빕니다! /허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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