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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 통신원으로 가슴벅차던 그 시절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2-05-25 12:30:45 ] 클릭: [ ]

80고개에 들어서서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곰곰히 생각해보니 화려하고 가슴이 부풀며 랑만적으로 보낸 시절이 아마도 지난 세기 60년대 농촌에서 농업 생산로동에 참가하면서 《연변일보》 통신원으로 있을 때인 것 같다.

나는 소학교 3학년 때부터 맏형님이 사다주는 《조선아동》문학잡지를 열독하면서 글쓰기를 좋아했다.

 
《연변일보》농촌부 편집이였던 남민옥 선생과 함께 기념 사진, 필자(오른쪽) 김삼철

1956년 여름의 어느 날, 초중을 졸업하고 농촌에 되돌아간 내가 조밭 김을 매는데 난데없이 중평툰에 있는 김희남선생이 손에는 바이올린 통을 쥐고 어깨에는 휴대용 접이식 간이 흑판을 메고 밭머리에 서있었다.

내가 막 달려가서 물어보니 김선생은 “휴식 시간을 리용하여 혁명가곡을 배워주려 한다”고 했다. 당시 김희남선생은 촌 공청단 조직을 찾아 청년들에게 노래를 배워주어 환영 받았다.

그날 김희남선생은 밭머리에서 간이 흑판을 세워놓고 〈농민의 노래〉를 배워주었다. 당시 우리 마을은 초급사를 갓 세우고 집체로 일할 때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일했다. 김희남선생은 바이올린을 켜며 노래를 배워주었고 사원들은 모두 좋아하며 열정적으로 배웠다. 천청송 작사 류광준 작곡으로 된 이 노래를 30분 휴식 시간에 기본 상 다 배웠다. 흑판에 가사를 써놓았기 에 쉽게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 나는 이 사실을 가지고 〈밭머리에서 혁명가곡을 배워주는 김희남선생님〉이란 제목으로 기사를 써서 이튿날 신문 배달원한테 보냈다. 처음에는 몰라서 우표를 사서 붙였는데 기실 봉투 귀퉁이를 베여내고 원고라는 글자를 쓰면 우표를 붙이지 않아도 원고가 신문사에 배달되였다. 처음 쓴 원고가 발표될지 말지 근심하던중 며칠 안 지나 내가 쓴 첫 기사가 《연변일보》에 실렸다.

김희남선생은 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고 곧바로 나를 찾아와 고맙다고 인사했고 더욱 열정스레 밭머리에서 노래를 배워주었다.

1958년봄 나는 촌당지부의 추천을 받고 연변 수리 훈련반에 가서 1년간 학습했다. 그 후에도 상급 학교에 가 공부하는 바람에 몇년간은 농촌을 떠나있었다. 1962년 내가 다시 농촌으로 돌아갔을 때 우리 집은 이미 룡정 시교의 광신대대로 이사했다.

광신대대에 있으면서 나는 다시 원고 쓰기에 나섰고 저녁이면 마을을 돌아다니며 재료를 수집했다. 우리 집은 룡정—연길 국도 바로 곁에 있었기에 교통이 매우 편리했다. 한시간에 한번씩 연길—룡정 뻐스가 통했는데 당시 연변에서 사통팔달 교통이 제일 잘 통한 농촌 마을이였을 것이다.

나는 낮에는 사원들과 같이 농업 생산로동에 참가하고 하루 일이 끝나면 호미자루를 쥐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생산대 대장들과 공청단 소조장들을 찾아 보도 재료를 수집하고 취재 대상을 물색했는데 한밤중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난 뒤 밤을 새며 원고를 써서는 이튿날 바로 신문 배달원한테 보냈다.

어떤 때는 원고를 다 쓰고 나면 동녁 하늘이 밝아올 때도 있었다. 그래도 피곤한 줄을 몰랐고 원고를 쓰고 난 후의 성취감에 마음이 뿌듯했다. 1963년부터 나는 광신대대 공청단지부 서기로 있었는데 각 생산대 공청단 소조장들을 모두 신문사 통신원으로 양성했다. 왜냐하면 이들이 소식통이기 때문이다. 시기성이 강하고 시간성이 있는 원고는 내가 직접 쓴 후 뻐스를 타고 《연변일보》 농촌부를 찾아갔다. 당시 아홉개 생산대를 관리하는 대대판공실에만 벽에 걸어놓고 손으로 다이얄을 돌리는 전화기 한대만 있을 때라 교통수단이란 불쌍한 두 다리뿐이였다. 

처음 원고를 쓸 때에는 원고료가 있는 줄도 모르고 글을 썼다. 파란색 글자가 박힌 돈봉투가 신문 배달원을 통해 전달되였는데 원고료가 적어서 2원이였다. 당시 2원이란 큰 돈이였다. 식당에서 정식을 먹는데 15전 가량이였고 랭면 한그릇에 20전, 리발 20전, 영화 관람권 20전, 술 한근에 60, 70전 했다. 20대인 나에게는 이 2원이 큰 재력이였다.

나는 원고료를 받아서는 몽땅 명작과 같은 서적을 사는데 썼다.그때 두꺼운 소설책 한권이 1원 가량 밖에 하지 않았다. 5년간 받은 원고료로 1,000여권의 서적을 샀으니 말이다. 웃방 벽 한면을 몽땅 채워넣었다.

부지런히 원고를 써서 보냈더니 나를 찾아오는 《연변일보》 기자들도 적지 않게 있었다. 그중에는 당시 룡정시 주재기자로 있은 김승길선생이 있었고 홍춘식, 남민옥 선생도 있었다.

그때 신문사에서는 농촌 통신원 대오 건설에 각별한 중시를 돌렸다. 글쓰기 특강도 조직하였는데 통신원들은 특강을 듣고 나서 “눈앞이 밝아온다”며 좋아했고 글쓰기 수준이 높아졌다. 1962년부터 《연변일보》 정식 통신원이 된 나는 신문사에서 보내는 《통신원》이란 내부 간물을 통해 업무 수준이 크게 향상되였다.

1964년 연변일보사와 연변방송국에서 공동으로 개최한 통신원대표대회가 있었다. 그 대회에서 통신원들을 표창했는데 그중에 나도 있었다.

당시 《연변일보》 의 인기 특별란은 ‘우리 마을 젊은이들’이였다. 이 특별란은 농촌의 우수한 청년들을 표창하는 란이였는데 우리 광신대대에서만 〈소 사육관리를 잘하는 청년〉, 〈소한테 찰떡을 쳐먹인 젊은이들〉, 〈부모를 잘 모시는 청년》, 〈착실한 며느리〉, 〈생산대의 살림군〉, 〈뢰봉식 청년〉 등 내용의 기사가 수십개나 실려 많은 청년들의 적극성을 불러일으켰다.

문화대혁명전까지 내가 쓴 기사 100여편이 《연변일보》에 발표되였는데 농민들에게 당중앙의 농촌 정책을 알리고 농민들이 상급의 지시를 관철, 집행하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최근에 나는 연변가사협회의 일원으로 음악시창학습반에서 우연하게 연변일보사에서 기자로 사업하다 퇴직한 김귀자 선생을 만나게 되면서 60년대 《연변일보》 농촌부에서 사업하셨던 남민옥 선생을 만났다. 86세의 남민옥 선생의 건강 상태가 아주 좋았다. 나의 이름을 말하자 남선생은 “광신대대 공청단 서기”라고 말하시며 매우 반가와했다. 남선생은 기억력도 출중했다. 당시 광신대대에 가 취재하던 일이며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청춘을 뽐내며 열정을 쏟던 그때 그 시절이 아마 나의 인생에서 가장 뜻 깊고 가장 가슴이 벅차고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라 하겠다.

그리고 《연변일보》 통신원으로 있으면서 닦은 기량을 토대로 그 후 여러 쟝르의 문학작품이 신문잡지에 발표되였는데 긍지를 느꼈다.

지금도 나는 글 쓰기로 석양의 길을 장식하고 있다.

/ 김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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