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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130 ] 오빠의 ‘결의형제’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3-03-16 19:08:56 ] 클릭: [ ]

아직 뜰 앞의 나무가지에 파란 잎새가 피여나지 않은 이른 봄날의 쌀쌀한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들어서니 어제까지 멀쩡하던 샤워기 호스에서 뜨거운 물이 하얀 김을 뿜으며 쏟아져 나온다. 당황한 나는 더럭 겁부터 났다. 애들은 모두 외국에 나가 있고 남편 없이 혼자 사는 나는 이럴 때가 제일 난감하다. 나로서는 어떻게 해야 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얼마전 고향마을에서 살던 친구가 우리 집 근처로 이사 와서 많은 의지가 된 것이다. 이날도 나는 주저없이 핸드폰을 들었다. 전화를 받은 그 친구는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앞세우고 한걸음에 달려왔다.

“아재, 어딤가?”

문을 떼고 들어서자마자 두 팔를 걷고 수리에 나선 친구의 남편을 보자 나의 가슴에는 뜨거운 것이 뭉클 솟아올랐다. 나에게는 곁에서 나를 “아재”라고 부를 만한 혈육이 없다. 친구 남편이 허물없이 나를 “아재”라고 부르는 그 한마디에 전에 고향마을에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누구나 한결같이 “박서기”라 부르던 그 분의 모습이 떠올랐다.

‘박서기’는 내 친구의 아버지이다. 그리고 그 분은 나의 큰오빠의 ‘결의형제’이다.

1982년 오빠 ‘박서기’(앞줄 왼쪽 두번째)와 함께 기념사진을 남긴 필자(뒤줄 오른쪽 첫번째)가족 

청포도는 향기보다 맛으로 느낄 수 있어 눈으로는 잘 익었는지 안 익었지 분간하기 어렵지만 푸른 광채로 하여 그 맛이 더 달콤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고향마을의 ‘박서기’가 바로 그런 분이다. 박서기는 늘씬한 몸매에 특별히 긴 목선, 서글서글한 성격에 항상 로동복 차림을 하고 있었고 허리에는 낫이 아니면 다른 도구를 지니고 다녔다. 허걸찬 모습에 부드러운 눈빛, 은은한 미소에서 그의 넉넉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난 세기 60년대 중반 우리 마을은 칠팔십 세대가 모여사는 아담한 조선족 동네였다. 이른 봄이면 산마다 천지꽃이 만발하고 두만강으로 흘러드는 지류가 유유히 마을을 꿰질러 지나갔으며 가을이면 아득히 펼쳐진 논벌에 황금의 벼파도가 출렁이며 오곡 향기가 차넘치였다.

우리 마을은 남북으로 길을 사이 두고 1대와 2대로 나뉘였다. 내가 세상을 알면서 마을에서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그 분을 “박서기”라 불렀다. 처음에는 그 분을 “박대장”이라 불렀던 것같은데 언제부터인지는 딱히 모르지만 그 후에는 사람마다 그렇게 부르는 것을 알았다.

우리 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배가 비여 볼 새 없이 자식 11명을 낳으셨다. 그리고 마음으로 낳은 자식 두명도 손수 키웠다. 그 중에서 전염병으로 잃고 전쟁에서 잃고 하다나니 나중엔 4명만 남았다. 엄마의 첫 아들인 큰오빠와 막내인 내 나이 차이는 20살도 넘는다.

큰오빠는 대련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거기에서 일하다 무슨 일인지 60년대초에 고향마을에 돌아왔다. 나의 오빠는 키가 일메터 팔십에 달했는데 박서기와 키도 비슷했고 성격도 비슷하였다. 당시 20대였던 청춘 두 남아는 젊음의 고뇌와 삶의 숙제를 안고 ‘결의형제’를 맺었단다. 그러나 나는 어린 나이여서 ‘결의형제’라는 뜻도 모르고 남들이 주변에서 부르는 대로 그냥 그 분을 “박서기”라고 따라 불렀다.

그 후 큰오빠는 결혼을 하고 애까지 낳더니 가족을 거느리고 외국에 가서 자리 잡았다. 년로한 부모님과 어린 동생들을 남겨놓고 떠나야 만하는 리유는 지금도 모르겠지만 리기적이고 불효자인 것은 맞는 것 같다. 부모님은 살면서 그런 오빠를 많이 원망하였다. 년로한 엄마는 아들이 신변에 없는 실망감으로 시름시름 앓았고 아버지는 가끔 술 한 잔을 빌어 집에 남은 언니와 나를 손가락질 하며 “너희들은 쓸 데 없어.”라고 하며 신변에 아들이 없는 서글픔을 토로하였다. 그런데 그 시간이면 박서기가 우리 집에 찾아오셔서 아버지와 술을 한두 잔 나누셨다. 박서기가 돌아가시면 흥분한 아버지는 우리를 보고 이제부터 박서기를 “큰오빠”라고 부르라 하였다. 그때도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잘 몰랐다.

엄마는 박서기가 보고 싶을 때면 시골집에서 하기 번거로운 초두부 아니면 두부를 만들어 그분을 불러와 대접시켰다. 절구로 퐁퐁 찧은 고추가루와 파란 풋고추, 파, 그리고 마지막에 고추씨가루와 닦은 콩기름을 조금 넣고 양념고추간장을 만든다. 박서기는 매운 양념고추간장에 큼찍한 두부 한모를 뚝딱 제낀다. 코등에 송골송골 땀이 돋으며 한 숟가락씩 푹푹 떠먹는 박서기의 모습을 엄마는 친아들을 바라보듯 흐뭇하게 바라본다.

내가 고중 1학년 때 쯤으로 기억된다. 한번은 엄마가 많이 아프셨다. 촌 위생소에서 치료하였지만 미열이 떨어지지 않고 도무지 식사를 못하였다. 박서기는 향 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향병원에서도 진단이 나지 않자 박서기는 또 다시 엄마를 업고 현성 병원으로 갔다. 현성 병원에서 페염으로 진단이 나고 박서기의 정성어린 간호로 제때에 치료받아 어머니는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때 언니는 장춘재정무역학교에서 공부하고 나는 집을 떠나 외지에서 고중 공부를 할 때였으니 박서기가 아니였다면 큰일이 났을 것이다.

1975년, 시골 마을 앞뒤 산의 골골마다 고운 단풍이 들고 노란 벼이삭이 고개 숙이는 황금가을이 무르익던 날, 박서기의 주장 대로 아버지가 뜨르르한 환갑상을 받게 되였다. 그 당시 시골 마을에서 비록 집에 아들들이 있어도 부모님의 환갑을 제대로 치르지 못하는 집들이 푸술했다. 아버지는 어깨가 으쓱하여 마을의 집집을 돌아다니며 환갑을 어느 날에 쇤다고 손수 알렸다.

그날 아버지는 비록 친아들의 술잔은 받지 못하였지만 그 이상으로 박서기의 축복과 동네분들의 축복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9월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밤중에 쓰러져 손 쓸 새도 없이 하늘나라로 가셨다. 박서기는 손수 아버지에게 수의를 입혀드리고 삼일 동안 곁을 지켰고 좋은 널집에 모셔서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마을 동쪽 산언덕에 고이 묻으며 첫 삽의 흙도 그 분이 올렸다.

시골 농촌마을에서 살자면 남자들의 손이 많이 필요하다. 특히 겨울을 맞아 땔나무가 큰 걱정이다. 나무를 패는 것은 두루 우리 세 녀자가 어떻게 든 할 수 있었다. 하루는 밖에 나갔다 들어오니 엄마가 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누워있었다. 언니가 저녁을 해서 밥상을 차렸다. 밥을 먹으면서 언니가 “엄마, 걱정하지 마오. 래일 출근해서 내가 해결해 보겠소.”라고 말한다. 알고 보니 마당에 쌓아놓았던 땔나무더미가 바닥이 가들가들 한 것이다. 그런데 이튿날 늦은 점심 때에 자잘한 나무 한 수레를 박아싣고 박서기가 우리 집 마당에 턱 나타났다. 아마 평시에도 우리를 걱정하였지만 특히 우리 집 나무 무지를 늘 살폈던 것 같다.

언니가 1978년도에 결혼하고 내가 1981년도에 결혼식을 올렸다. 우리 자매의 결혼식에 박서기는 아버지 역할, ‘오빠’ 역할을 모두 하였다. 우리들의 결혼식 날에는 첫날 새각시 집 생빈으로 가셔서 사돈님들에게 절을 올리며 동생을 잘 부탁한다고 신신당부하고 돌아와 엄마에게 회보하면서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엄마는 1985년도에 심장병으로 산소 호흡기로 일주일을 버티다가 70세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했다. 그때도 박서기는 손수 엄마에게 수의를 입혀드리고 아버지 산소 옆에 모시고 마을 사람들에게 장례식 음복까지 대접시키며 후사처리를 도맡아하셨다. 그 후 몇십년 동안 박서기는 우리 부모님 산소에 일년에 두번씩 꼭 다녔다. 친자식도 지키지 못하는 부모님 산소를 박서기는 지켰다.

박서기는 당신이 돌아가기 전해에도 우리 부모님 산소에 가셨다. 몇마리 산새가 나지막히 울고 있는 우리 부모님의 무덤가에 온 여름동안 자란 풀더미를 벌초하고 흙을 떠올리면서 박서기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가? 칠십이 넘은 나이에 평생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한 당신의 친아버지를 떠올리지 않았을가?

2013년 박서기는 77세로 때 아닌 사고로 안해와 하루 한시에 돌아가셨다. 자식들이 부모님 유품을 정리하면서 서랍 깊숙한 곳에서 ‘결의형제’ 라고 쓴 종이 한장을 발견하였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누르스름한 종이에 ‘결의형제’ 라는 네 글자가 반듯하게 적혔고 아래 쪽에는 각기 두 분이 서명하고 그 옆에는 각각 퇴색한 뻘건 손지장 흔적도 보였다.

이 종이 한 장이 무엇이라고 박서기는 장장 반세기도 넘는 세월을 ‘결의형제’라는 신조를 지켜왔을가. 아니 두둑한 인간성으로 친 혈육보다 더 진한 삶의 신조를 지켜온 그다. 친부모도 돌보지 못하는 세월에 ‘결의형제’라는 네 글자의 무게를 누가 감히 가늠해 볼 수 있을가?

박서기의 일생으로 지켜온 ‘결의형제’라는 한 장의 증표가 있어 오늘까지 대대로 내려오면서 박서기의 자식들이 우리 자매를 ‘아재’라고 다정하고 친절하게 부른다. 친 혈육이라면 이보다 더 찐한 혈육이 또 있으랴. 이 시각 나는 가슴속으로 다시 외워본다.

“오빠, 사랑합니다.”

/리정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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