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기자: [
홍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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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3-03-29 13:2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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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향은 손만 뻗으면 하늘에 닿을 것 같은 하늘 턱 밑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자연과 어우러진 산꼭대기에 올라앉은 우리 마을을 두고 사람들은 ‘닭덕대’라고 불렀다.
마을에서 소재지로 통하는 길은 사람이 다니는 길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파로왔고 좁은 바위턱을 기다 싶이 톱아다니던 아슬아슬한 산길로 학교를 다녀야 했다. 나무턱과 바위돌에 할퀴고 넘어져 생긴 상처들이 아물새 없을 정도로 골이 깊고 산이 높은데 그 우에 자리한 것이 룡정시 백금향 립신(현재 백금), 바로 우리 마을이였다.
겨울이 되면 바위턱으로 간신이 다니는 길이 눈에 덮혀 자칫 발을 잘못 옮겨 디디면 산밑으로 굴러떨어질 판이다. 아이들마다 신바닥이 미끄럽지 않게 ‘왕바신’(솜신)에 새끼줄을 동이고 다녔고 매번 눈이 오는 날이면 아버지들이 번갈아가며 비자루로 바위턱에 덮인 눈을 쓸어주었다.
작고 아담한 초가집 십여채가 아기자기 들어앉은 마을은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큰 메산으로 보이지만 눈이 모자라게 넓은 대지가 아득히 펼쳐져있다. 여름의 이른 아침이면 자욱한 안개 속에 잠긴 마을은 마치 비밀 요새같이 아름답다.
골짜기를 사이 두고 한쪽은 전부 진달래꽃밭이였다. 이른봄 진달래꽃이 만개하면 산 전체가 진달래꽃으로 뒤덮혀 연분홍색으로 물든다. 이맘때면 마을 소녀들이 꽃 요정이 되여 꽃과 함께 서로의 봄꿈에 취해 ‘꽃 시절’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이른봄 진달래꽃이 잠간 머물다 가고 난 뒤 맞은 편 에 심어놓은 듯 빼곡하게 들어선 살구나무들에서 앞다투어 꽃이 피는데 하얀 꽃물결로 장관을 이룬다. 천상의 락원이 따로 없다.
오곡이 무르익는 가을이면 온갖 철새들이 떼를 지어 찾아들었고 산에는 머루다래, 오미자다래와 각종 귀한 약재들로 넘쳐나고 돌배가 익어 풍기는 그윽한 향기가 코를 즐겁게 한다. 노루, 사슴도 걸음을 멈췄다 가는 풍요로운 계절, 집집이 고추다래, 옥수수다래, 빨간 수수다래며 시래기를 길게 매달아 놓는다. 저녁노을이 빨갛게 물들면 초가의 풍경은 아름다운 한폭의 그림과 같다.
콩과 옥수수, 조와 기장을 주요 곡물로 농사를 짓는 동네답게 감자와 떡호박이 특히 맛있었다. 과학이 많이 발달한 요즘엔 어릴 적 먹었던 아궁이 불에 구운 감자와 쇠가마에 찐 호박 맛은 어데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지금은 좁쌀이 입쌀보다 두배나 비싸지만 그 시절 밭농사만 하는 우리 마을은 콩과 옥수수쌀로 웃돈까지 얹으며 입쌀을 바꿔서 먹군 했다. 새노란 좁쌀에 입쌀 한줌씩 넣어 밥을 지으면 밥알을 셀 수 있을 정도로 입쌀은 ‘금쌀’이였다. 그때는 아궁이에 불을 지펴 쇠가마에 밥을 해서는 큰 꽃밥통에 밥을 담아 통째로 상에 놓고 여러 식구들이 함께 한밥통의 밥을 먹었다. 풀기 없는 좁쌀밥은 한끼만 지나도 모래알처럼 푸실푸실 흘러내려 밥통에서 입까지 넣는 사이에도 손바닥으로 받쳐주지 않으면 반은 흘러내린다.
‘닭덕대’마을 일각
옛날 풍속을 그대로 지켜가며 살던 당시 처녀가 혼사말이 오고가다 그만 두어도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 흠이 있는 ‘새기’가 되였고 녀자애들이 크게 소리내여 웃어도 흉이였다. 바느질에 부엌일은 물론 각종 례의 범절에 각별히 신경 써야 했고 행동거지 하나, 말 한마디 함부로 못하고 조신하게 살아야 했다.
외할아버지 집에서 밥을 먹을 때에도 외할아버지, 아버지, 외삼촌, 오빠들은 상석에 놓인 밥상에 앉아 식사를 하고 외할머니, 엄마, 외숙모, 언니와 나는 아래목 맨 구들에 밥을 차려놓고 먹었다. 밥상에 놓여진 색다른 반찬을 탐내 내가 밥상에 비비고 앉으려고 하면 외할머니가 “가시내가 버릇없이 어딜 낄려구”하시며 꾸지람을 했다.
“밥은 열곳에서 먹어도 잠은 한곳에서 자야 된다.”나와 언니에게 늘 하시던 우리 엄마의 어록이다.
대보름날 아침에도 어른들은 집에 찾아온 첫 손님이 젊고 키가 큰 남자이면 기뻐했고 이날만은 키 작은 녀자가 함부로 남의 집에 첫 손님으로 갔다가는 어른들에게 욕사발을 먹는 날이였다. 보름 이튿날은 ‘까막닭이 날’ 인데 이날 먼길을 떠나면 한해 동안 객지에서 헤매인다는 설에 따라 온 동네가 하루 동안 마실도 다니지 않고 집에만 있는다.
우리 동네는 아버지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비만 내리면 신발에 달라붙는 진흙 때문에 발을 옮겨딛기도 힘들다. 네모나게 자른 비닐로 비를 가리긴 했지만 그 시절에는 비닐도 흔하지 않아서 거의 맨 머리로 비를 맞고 다녔다. 비오는 날이면 어른들이 모처럼 쉴 수 있는 날이였다. 진흙으로 된 지역 때문에 비가 내리면 소도 걷기 힘들어 했고 쟁기에 흙이 달라붙어 일을 할 수가 없다.
이런 날이면 동네 남정네들이 모여 돼지를 잡거나 소를 잡아 추렴을 했다. 온 동네가 한곳에 모여앉아 고기도 삶아놓고 순대도 해놓고 ‘되놀이’를 했다. ‘3.8’부녀절, 단오, ‘5.4’청년절 같은 날에도 한집에서 쌀 한되씩 거둬 방아를 찧어 입쌀만두나 시루떡을 해놓고 온 동네가 모여 잔치를 벌인다. 뒤풀이로 오락판이 벌어지고 뒤집 아지매의 구성진 타령에 앞집 ‘마다바이’ 꼬부랑춤으로 하하 호호 떠들썩한 웃음판에 밤이 새는 줄 모르며 온 마을이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매일 동이 트면 아버지는 아궁이 앞에 내려앉아 불을 지피셨고 가마 목에 쪼그리고 앉은 엄마는 까만 쇠솥에 납작하게 썬 감자를 밑에 깔고 이남박에 쌀을 일어 안치곤 했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아버지가 아궁이에서 잘 타서 연기가 안 나는 불 한삽 골라 화로에 떠놓는다. 그러면 엄마는 화로불에 장사기를 올려놓고 된장찌개거나 오누이장을 지진다. 그렇게 분주하게 아침 준비를 하면서 두분 내외는 무슨 얘기가 그렇게 많으신지 끊임없이 도란도란 주고 받는다. 일년 삼백육십오일 거의 비슷한 내용이였고 나는 매일 잠결에 쇠가마 두껑이 여닫기는 소리, 보글보글 장 끓는 소리, 엄마와 아버지가 나누는 말소리를 들으며 성장했다.
덧없는 세월 속에 행복했던 소시적 기억을 더듬어 가끔씩 기억을 털어 꺼내보는 옛 추억을 조용히 더듬어 보면서 꿈을 꾸는 아이마냥 환상에 빠져본다. 지금 사는 세상 밖에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하고 있다면 그 세상에 산 동네, 정든 초가와 젊고 고운 엄마랑 젊고 멋진 아빠, 꽃밭을 누비던 나와 인품 좋은 봉건통의 어르신들과 소꿉친구들이 함께 뒹굴며 놀던 ‘닭덕대’ 마을에서 사는 꿈을 꾼다.
별이 쏟아져 내리던 사람 좋고 인심 좋고 살기도 좋은 우리 마을, 진달래꽃을 귀밑머리에 꽂아주며 버들피리 함께 불던 동무야, 저녁 노을빛 속을 엄마아빠 태우고 “이랴, 이랴” 달리던 달구지, 정겨웁게 옥수수 개초리에 앉은 잠자리를 쫓아다니던 동년 시절을 기억해주는 ‘닭덕대’ 마을… 정든 내 고향아!
/안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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