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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주인공》후속보도(9)리시봉편

편집/기자: [ 김룡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12-12 10:26:14 ] 클릭: [ ]

탈곡장축구선수 갑A무대를 주름 잡다―고홍파를 이기고 최우수공격수에 선정된 리시봉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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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시봉.

 

 

“그 땐 논밭이나 탈곡장이 우리 축구장이였지요.” 

 

걸걸한 성격에 묻는 말에 곧잘 우스개로 대답하는 리시봉(1973. 9. 27—)씨가 하는 말이다. 

 

연길시 장백향 동광촌에서 태여난 리시봉은 어려서부터 축구를 즐겼다. 수십명 되는 동갑내기들과 함께 돼지오줌깨에 공기를 넣어 맨발바람에 차던 그 시절, 온 하루 골목길에서 뛰여다니면 그렇게 밥맛이 좋았다고 한다. 

 

뽈차기를 좋아했던 연고로 남보다 걸싸고 역빨라 소학교에 입학하자 학급축구팀의 주력선수로 되였고 2학년 때부터는 학교축구팀에 입선되여 공격수로 활약하였다. 다른 선수들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키가 크고 발기술이 훌륭한 데다가 축구의식이 좋아 축구선생님은 그를 각별히 사랑했다. 

 

소학교 4학년 때 더욱 훌륭한 환경에서 뽈을 차고 싶어하는 리시봉의 마음을 헤아린 부모님들은 그를 당시 축구교육환경이 좋다고 소문난 건공소학교로 보냈고 건공소학교축구팀이 해산되자 다시 중앙소학교로 전학시켰다. 다른 선수들보다 한두살 어린 리시봉이였지만 열심히 훈련하고 경기에서 용맹하였기에 최창욱, 남영학 등 체육교사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주력선수로 연길시와 연변주의 각종 축구경기에 참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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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해동계훈련에서 선수들에게 전술을 배치하고 있는 리시봉. 

 

소학교를 졸업하던 1984년에 그는 엄격한 테스트를 통과하고 연길시체육학교에 입학하여 오전에는 연길시3중에서 수업하고 오후에는 시체육학교에서 축구훈련을 하면서 땀동이를 쏟았다. 1988년 9월, 전 주에서 30명을 모집하는 주체육학교에 입학한 그는 프로선수로 뛰고 싶은 꿈과 한결 가까워질 수 있었다. 

 

마침내 기회는 그에게 다가왔다. 1990년말, 당시 연변청년팀 감독이였던 리호은이 리시봉을 청년팀에 불러들인 것이다. 약 2년간의 훈련과 청년조경기를 거친 그는 축구실력으로 연변팀 감독진의 인정을 받아 1991년말에 연변팀에 합류하여 동계훈련을 떠났고 1992년부터 갑B경기에 출전하여 갈고 닦은 기량을 마음껏 선보임으로써 축구팬들의 사랑을 받게 되였다. 

 

1993년은 전국운동회가 있은 해였는데 리시봉의 축구생애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한해이기도 하였다. 길림성을 대표하여 전국운동회에 참가한 연변팀에서는 7월 15일부터 22일까지 천진경기구에서 소조경기를 치렀다. 당시 중국축구무대에서 첫 돌풍을 몰고 온 리호은 감독의 ‘전면공격, 전면수비’의 전술로 훈련된 연변팀은 첫 경기에서 절강팀을 6:0으로 제압하고 그 기세를 몰아 서장팀을 7:0으로, 호북팀을 3:2로, 해방군팀을 4:0으로 차례로 격파하면서 축구계에 신선한 돌풍을 몰아왔다. 소조경기에서 리시봉은 여덟꼴을 성사시키면서 연변팀의 결승진출에 큰 공로를 세웠다. 

 

그 해 9월 3일, 북경에서 진행된 결승단계 첫 경기에서 리시봉은 경기 1분 만에 첫꼴을 작렬시키면서 해방군팀을 1:0으로 제압하였고 9월 5일에 진행된 두번째 경기에서도 7분 만에 선제꼴을 넣어 연변팀이 4:1로 하남팀을 꺾는 데 기반을 다져주었다. 결승단계 2단계 경기에 진출한 연변팀에서는 0:2로 북경에 패하면서 4위권에는 진출하지 못했지만 사천팀과의 순위다툼경기에서 5:3으로 승리를 거둠으로써 상해팀과 5위를 다투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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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딸리아 해외훈련. 

 

상해팀과의 전반전경기에서 연변팀에서는 18분(당전순)과 22분(리효)에 각각 한꼴씩 내주며 0:2로 뒤진 채 그라운드를 나왔다. 후반에 들어 연변팀에서는 우세한 체력과 속도로 전면반격을 들이댔다. 체력이 떨어진 상해팀에서 급격히 공격이 무뎌지며 전면방어에 들어가자 연변팀이 경기주도권을 앗아왔다. 57분경 리룡호선수가 한꼴을 만회하고 77분에 리시봉이 동점꼴을, 79분에 김영수가 역전꼴을, 89분에 리시봉이 결승꼴을 박아넣으면서 연변팀에서는 4:2로 역전승을 거두며 전국운동회 5위를 확정지었다. 

 

전국운동회 남자축구 최우수공격수를 선정할 때 리시봉과 북경팀의 고홍파선수가 결승단계에서 각각 네꼴씩 넣으면서 동점이 되자 대회측에서는 소조경기까지 합산하는 절충방안을 내왔는데 결국 리시봉선수가 열두꼴로 ‘최우수공격수’로 되였다. 

 

1994년부터 1996년까지 연변팀의 길림삼성, 길림현대 시절 리시봉은 8번 유니폼을 입고 리호은 감독과 정종섭 감독의 지도를 받으면서 갑A무대를 누볐다. 그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에 대해 그는 당시 강팀인 료녕굉운을 3:2로 꺾은 경기를 꼽는다. 

 

“그 시절 승리하면 2점, 빅으면 1점 할 때였어요. 8월 7일, 홈장에서 료녕팀을 만났지요. 14라운드 경기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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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딸리아 해외훈련. 

 

리시봉은 그 때를 회억하면서 굉운팀의 려병에게 5분 만에 선제꼴을 내주고 뒤지던 중 39분 만에 동점꼴을 넣고 다시 57분 만에 려병에게 추가꼴을 내주고 뒤지다가 김영수선수가 69분 만에 동점꼴을, 본인이 80분 만에 결승꼴을 넣으면서 값진 승리를 따냈다고 말했다. 전 13륜경기에서 연변팀은 9점을 기록하여 강급후보로 꼽힐 때였다. 

 

그 해 리시봉은 심양동약, 광주태양신과의 경기에서 한꼴씩 추가하면서 총 네꼴을 기록하며 연변팀의 갑A보존에 한몫을 했다. 그 해 연변팀에서는 6승 7무 9패로 19점을 기록, 최종 10위를 차지하였지만 11위인 심양동약에 비해 8점이나 높아 일찌감치 강급위기에서 벗어났다. 그 해 그는 국가청년팀에 뽑히기도 하였다. 

 

잦은 부상으로 1995년과 1996년 시즌에서 얼마 뛰지 못한 리시봉은 장춘아태에서, 1998년에는 방근섭, 졸라와 함께 천진태달(갑B)에 가서 뽈을 찼는데 그들 세명은 천진태달팀을 갑A에 진출시킨 공신으로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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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딸리아 아틀란타 청소년선수들과 기념사진을. 

 

그 후 청도에 있는 을급팀에 이적하였으나 팀이 해산되는 바람에 뽈도 못 차보고 고향에 돌아와야 했다. 신체상황으로 그는 1999년에 장백산축구구락부에서 박만복 감독의 지도하에 감독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2002년 산동로능축구학교 U17팀 감독을 맡고 감독생애를 시작하였다. 

 

2003년에 연길시체육학교로 돌아온 리시봉은 91—93년급 학생들의 축구지도를 맡았다. 그 때는 마침 연변팀의 성적이 좋지 않을 때라 많은 학부모들이 자식을 축구학교에 보내려고 하지 않았다. 리시봉은 공원소학교에 내려가서 학교축구팀을 맡고 3년간 열심히 지도하였다. 그 때 가르친 김성이란 선수는 현재 뽀르뚜갈 모 구락부에서 새별로 떠오르고 있다고 한다. 

 

그가 가르친 학생들 가운데서 김현과 원민성이 슈퍼리그를 뛰고 있는데 각자 모두 자기의 위치에서 맡은 바 임무를 훌륭히 완수하고 있다.

/길림신문 김룡 김태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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