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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타고 산따라 강따라5] 백양나무 키높던 모교는 어데로 갔나?

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8-13 14:56:43 ] 클릭: [ ]

자전거를 타고 고향으로 가기로 한 전날밤에 꿈을 꾸었다.

자전거를 탄채 낯익은듯 하면서도 낯선 길을 달리고 있었는데 도무지 종착지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길에서 헤매다 목적지에 채 못 닿은채 꿈은 깨졌고 고향은 꿈속에서도 이방인처럼 저만큼 멀리 떨어져있는 것 같았다.

사실 내가 태여나서 자란 고향인 화룡시 서성진은 연길에서 그리 먼 곳이 아니다. 과거 고향사람들은 “연길까지 백리길”이라고 말했다. 바이두(百度)지도에서 거리를 검색해보니 아니나 다를가, 정확히 51키로메터였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에야 백리길이라면 꽤 먼 길일수도 있겠지만 요즘 세월에는 차로 불과 한시간도 채 안걸리는 거리이다. 자전거를 타고 하루 최소100키로메터이상씩 달리는 장도자전거팀에게는 이 같은 거리가 더욱 “식은죽 먹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꿈속 고향은 왜 그토록 멀어져 있었고 가도가도 나타나지 않는 안타까움이였을가?

돌이켜보면 초중을 졸업한 그해 여름방학이였던 것 같다. 1987년도였을것이다. 바깥세상에 대한 동경과 한 장소와 시간을 떠나보면 방불히 더 좋은 시간과 장소들이 나타날 것 같은 막연한 기대로 차있었던 17살때였다. 그때 나는 문뜩 자전거를 타고 연길로 갈수있지 않을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자전거라야 낡아빠진 28형 자전거이고 길도 그때는 아스팔트가 아닌 비포장 흙길일때였다.

모두들 말렸다. 못간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갈때까지는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우물안의 개구리”처럼 살아온 제한된 고향마을 이외의 세상을 만나보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도 무모한 도전이였던것 같다. 빈몸으로 달랑 자전거 하나만 타고 무작정 길을 떠났다. 아마 지금의 동성진 흥성촌 부근까지 갔던 것 같다. 아침에 길을 떠났는데 점심무렵이 되여 자전거 바퀴가 터져버리는 바람에 부득불 멈추지 않으면 안되였다. 자전거를 고치고 보니 점심때도 많이 지났는데 배도 고프고 덥기도 하고 비암산방향으로 뻗어나간 뽀얀 먼지길이 그렇듯 멀고도 험해보였다. 문뜩 내가 가고있는 준비되지 않은 연길행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게 되였다. 길가 나무그늘에 밑에 앉아서 한참을 고민했다. 마을로인 한분이 연길까지 갈라면 해동갑해 가기는 어렵다고 손사래를 쳤고 나는 결국 패잔병처럼 땅거미와 동무하여 다시 마을로 돌아왔던 기억이다.

그것이 다였다. 자전거로 이루지 못한 꿈이 지금껏 남아있어 그런 안타까운 꿈이 나타나는것인지 모르겠다.

실제로 자전거로 서성까지 가는데는 두시간이 좀 더 걸리였다. 아침 8시에 떠났는데 10시가 조금 넘어 도착한것이다. 과거 서성에서 연길까지 도전했던 길을 오늘은 연길에서 서성까지 가볍게 달리면서 그때의 무모한 도전이라는 마음의 그늘을 깡그리 가셔버리는듯한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이제 내 꿈에는 고향까지 가는 길이 언제나 활짝 열려있고 분명히 통해있으리라…

현재의 서성중학교 교사... 지금은 소학교와 중학교가 합병되여 있다

연길방향에서 서성으로 가면서 제일 먼저 만나는 곳은 서성중학교 건물이다. 지금은 소학교와 중학교 모두 합병되여 있었고 학생수도 얼마 안되는 것 같았다.

서성중학교는 3층 구조로 된 멋진 층집건물로 건립 당시였던 80년대 초반에는 연변농촌지역에서 최고로 좋은 학교건물이라고 소문났다.

이 같은 멋진 건물을 짓기 위해 당시의 서성중학교 재교생들이 집짓기에 많이 동원됐고 의무로동을 많이 했다고 형님이 입버릇처럼 이야기하군 했다.

집기초를 파기에서부터 벽돌과 세멘트 등 건축자재를 나르고 옮기고… 거의 수공에 가까운 로력으로 지어진 학교였는데 정작 그 혜택은 후배생들인 우리가 누리게 되였다.

84년도에 초중에 입학해보니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뼁끼냄새가 나는 널직하고 환한 교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성중학교 신교사 락성식의 한장면

서성중학교는 해방후 바로 세워졌는데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도 자식공부시킨다”는 우리 민족의 자녀교육중시사상의 동원하에 당지 주민들이 너도나도 앞다투어 돈과 물자 그리고 로력을 지원해 건설했다고 한다. 당시 서성중학교는 서성뿐만아니라 주변의 팔가자, 와룡, 복동, 토산자, 룡문 등 여러 향진의 학생들까지 다니는 학교로 유명했다.

《중국조선족학교지》에 따르면 서성중학교는 1946년도에 설립되였으며 초기 교명은 화룡현 서성중학교였는데 1952년도에 공립으로 승격하고 교명을 화룡현제3초급중학교로 개칭했다. 1969년초에 서성농중과 합병하여 민족련합학교로 되였으며 새로 고중반을 증설하고 교명을 화룡현 서성중학교로 개칭했다. 서성중학교는 학생이 많을때는 최고 1000명이 넘어 되였으며 교원도 80여명에 달했다. 그러던것이 1990년7월에 고중반을, 1994년에 한족학급을 각각 페지하였다…

서성중학교를 마주하니 노래 한수가 머리속에 떠올랐다. 바로 연변의 유명시인이였던 김성휘선생이 작사한 “그리워라 정든 모교여” 라는 노래이다. 가사중에 “백양나무 키높은 언덕우에 두겹 창문 아담한 모교라네…” 라는 노래말 부분은 서성중학교를 두고 읊은것이라는 설이 있다. 초중시절 음악시간에 선생님이 강조하여 들려주던 말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1985년도 교사절에 서성중학교 교직원들이 남긴 사진

80년대초 창작실천을 내려왔던 김성휘선생이 서성중학교 교정을 돌아보면서 이 가사를 창작했다고 한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80년대 초반까지 사용되던 서성중학교의 낡은 교사는 바로 학상동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작은 개울을 옆에 끼고 언덕우에 자리잡은 아담한 교사였고 창문도 분명 그때는 흔치 않던 방한용 두겹창문이였다.

언덕우에는 건교초기에 심어놓았다는 수십년 세월을 커온 아름드리 백양나무들이 하늘을 떠인채 높이 솟아 있었다. 봄이면 라이라크향기가 그윽한 교정에서는 랑랑한 글소리가 흘러 넘쳤다. 김성휘선생이 이 노래를 시인의 모교인 룡정고중을 모티브로 지었다고 하는 설도 있지만 노래속에 나오는 모교의 형상은 누가 뭐래도 서성중학교를 너무 닮았다.

연변지역의 어느 학교인들 인재가 양성되지 않았으랴만은 서성중학교에서는 특히 많은 인재들이 양성되였던 것 같다.

초중을 다닐 때였던 1986년 마침 서성중학교 건교 40돐을 맞아 자랑찬 서성중학교 졸업생들을 찾고 료해하는 기념활동이 있었다. 그때 많은 서중졸업생 인재들을 찾게 되였고 재교생들이 선배님들과 편지 주고받기 활동도 펼쳤다. 서성중학교 건교일인 4월10일을 전후해 모교를 떠난 졸업생들로부터 편지가 눈송이처럼 날아들었다. 모교에서 이토록 많은 훌륭한 인물들이 대거 배출되였다는 자호감에 가슴벅찼던 추억이다.

학교에 와서 직접 뽑아 갔다는 “쌍둥이비행사”의 이야기며 연변텔레비죤방송국의 아나운서였던 설상순, 연변의 꾀꼴새라고 불리웠던 가수 황인순 등이 모두 서성중학교에서 나온 인재들이였다. 연변일보사와 길림신문사의 전임 부주필을 지냈던 윤효식, 연변주정부 주장을 지냈던 정룡철 등도 서성중학교 졸업생들이라고 한다.

"붉은해 변강 비추네""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등 노래를 불러 전국적으로 크게 히트시킨 황인순가수 

여기서 일일이 자랑찬 서중졸업생 인재들을 라렬하기는 어렵다. 《중국조선족학교지》에 따르면 서성중학교는 건교이래 졸업생 5000여명을 양성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성중학교는 작은 농촌 향진의 평범한 기층 중학교였지만 유구한 력사와 교육문화가 있는 “인재양성의 요람”으로 사명을 다해 달려왔던것은 틀림이 없다.

지금은 서성중학교의 키높은 백양나무도, 두겹창문 아담한 모교도 모두 세월속에 사라지고 없다. 옛교사는 언녕 무슨 목재가공소가 되여 형체도 알아보기 어렵게 변모되여 있었고 학교의 입구였음을 보여주는 콩크리트 대문기둥이 마지막 남은 자존심처럼 흙먼지를 가득 뒤집어쓴채 외롭게 서있다.

서성중학교 낡은 교사앞에 남아있는 교문기둥(뒤쪽으로 두겹창문 양철지붕 옛교사가 보인다)

새 교사도 정적이 흐른다. 굳게 닫긴 철대문안으로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고 무거운 고요만이 흐른다. 하늘가에는 조용히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내 마음 언제나 날아가는 곳”에 허위허위 달려 왔는데 정작 찾고 싶은 풍경과 얼굴, 그리고 사연들은 사라졌고 만날수 없다. 내가 찾으려고 하는, 응당 그자리에 있어야 할 추억과 기억들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나타나주지 않는다는 안타까운 느낌이 들었다.

무엇을 찾는 것인가?

자전거 핸들을 돌려 고향을 떠나면서 문뜩 어제밤 꿈이 떠올랐다. 어쩌면 가도가도 다가서지 못할 안타까움을 주었던 꿈속 고향의 무가내한 현실적 갈등과 원인을 고향에 와보고 나서야 비로소 알것 같기도 했다.

/길림신문 안상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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