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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타고 산따라 강따라6] 봉황이 춤추며 날아 오르는 오봉촌

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10-08 15:20:13 ] 클릭: [ ]

연길시 소영진 오봉촌.

연길시가지에서 서쪽방향으로 30여키로메터쯤  떨어진 곳에 오봉촌(五凤村)이라는 마을이 있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동안 내처 금빛 찬란한 봉황새 여러 마리가 너울너울 머리속을 감돌았다.

“옛날 봉황새가 마을에 날아왔다고 하더만은…”오봉촌에 이르러 마을이름의 유래를 물었을 때 터전에서 콩가을을 하던 촌민 박청송(77세) 로인이 긴가민가하면서 말했다.

예로부터 봉황새는 부귀의 상징이다.

“옛날 오봉촌에 금광이 있어서 금을 많이 캐냈다고 하우다.” 박로인의 말이였다. 아니나 다를가 오봉촌은 옛날 금이 나던 고장이였다. 봉황새야 현실속에는 결코 존재할리 없는 상상속의 새인데 어쩌면 금이 나는 귀한 고장이라는 의미가 붙어서 그런 지명이 지어졌을지도 모른다.

오봉촌의 박청송로인.

오봉촌의 뒤산이름이 금광산인데 해방전에 “팔도금광”이라고 불렀으며 지금도 금광유적이 여기저기 많이 남아 있다고 박청송로인이 알려주었다.

“당시 금광 마을에는 3000명이나 되는 주민과 광부들이 살고 있었고 연길주변에서 꽤 큰 부락으로 불리웠다고 하던데유…” 박로인이 옛날 로인들로부터 들은 말이라면서 알려주었다.

사료에 따르면 1931년 “9.18”사변이후 동북의 대부분 지역이 일본침략군에 의해 강점되였다. 청나라때부터 이름난 석금생산지였던 오봉촌은 금광자원이 매우 풍부했다. 당시 집마당을 쓸다가도 금덩이를 주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오봉촌은 노다지판이였다.

멀리 보이는 산자락에는 아직도 허다한 페기금광 입구들이 잡초에 묻혀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과 함께 오봉촌은 침략자들이 보귀한 황금자원을 수탈해가는 인간지옥으로 전락되였다.

자료에 따르면 당시 오봉촌은 주민 1000여명에 각지에서 유인해온 광부 1800여명, 일본인 200여명이 살고 있었다. 숨쉴수만 있다면 모두 금광에 내몰려 일해야 했는데 렬악한 작업환경과 고된 로동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고 한다.

“당시 오봉촌에 끌려와서 일하다가 죽은 산동사람들이 많았다고 들었다”고 박청송로인이 옛날 웃세대 어른들부터 들은 이야기를 한다. 박청송로인의 백부님인 박인연도 그때 금광에서 일했는데 후에 삼도만토비숙청전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많은 외지 사람들이 쿠리로 끌려와서는 고된 로역에 지쳐 죽으면 그대로 금광 앞자락의 후미진 구뎅이에 대충 묻어버렸다고 한다. 그렇게 고향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통계하기조차 어렵다고 했다. 일제의 미친듯한 략탈의 희생자로 무주고혼이 된 백성들의 생활상이 얼마나 처참했을가 하며 박로인은 도리머리를 저었다.

마을에 남아있는 일본군이 세운 망루유적들.

황금수탈의 편리를 위해 일제침략자들은 오봉촌에 한 개 중대, 180명이나 되는 병력을 주둔시키고 순라와 감시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오봉촌의 지세가 높은 지역과 교통요도에는 망루를 세웠는데 광부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낱낱이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지금도 마을주변에서는 그때 일본군이 세운 망루들이 여러 개 남아있어 둘러볼 수 있었다. 망루에 들어서니 전 오봉촌이 한눈에 안겨왔다. 그러나 밖에서는 망루안의 상황을 느낄 수 없으리만치 설계가 교묘했다. 력사자료에 따르면 매일 금광의 일이 끝나면 광부들이 줄지어 서서 일일이 검사를 받았다. 일단 몸에서 금부스레기라도 발견되면 곧장 물감옥에 처넣었으며 사흘 후 끌어내서 총살해버렸다고 하니 그 잔인함과 무자비한 침략야성에 소름이 끼친다.

통계에 따르면 일본침략자들이 오봉촌에 “팔도금광”을 세워서부터 10년도 안되는 사이에 수탈해간 금완성품이 10톤도 넘어 된다.

오봉촌 입구의 발합라즈(鹁鸽砬子)바위.

오봉촌의 마을앞에는 발합라즈(鹁鸽砬子)라고 불리우는 큰 바위 하나가 있었다. 과거 바위에 비둘기가 많이 살아서 그렇게 불리웠다고 한다. 일본군은 지세가 높은 이 바위에 관찰초소를 세우고 전반 오봉촌을 시시각각 통제하고 감시했다고 한다. 지금도 바위우에는 일본군이 사용했던 중형대포 가설유적이 남아 있다. 당시 일본침략자들은 또 바위우에 일본전사자들과 가족들을 위한 야스쿠니 신사도 세워 놓았다. 그러나 해방을 맞아 1949년도에 새 중국이 탄생하면서 가차없이 허물어 버렸다. 지금은 그 자리에 항일렬사들의 피흘려 싸운 공덕을 기리는 혁명렬사기념비가 우뚝 세워져 있다.

오봉촌은 지리적으로 북으로 산마루 하나만 넘으면 부암혁명근거지이고 서쪽으로는 안도현혁명근거지요, 서북방향으로는 왕청 혁명근거지와 린접해있다.오봉촌은 지리적으로 이러한 혁명근거지들에 이르는 중요한 관문이였다.

사료에 따르면 동만항일근거지인 연변지구에서는 당시 오봉촌이 위치한 팔도항일근거지가 왕청항일근거지와 부암항일근거지, 삼도만항일근거지에 이어 초기항일근거지로 되였다. 오봉촌에 위치한 삼형제바위는 3개 항일근거지의 교통요도에 위치해 있었다. 일본침략자들은 3개 항일근거지사이의 교통과 물자보급을 차단할 목적으로 1932년부터 삼형제바위에 초소를 설치하였다. 당시 김일성장군이 오봉촌 부근에서 항일지사들을 묶어세워 항일대오를 조직하면서 일본군의 봉쇄를 타격하였는데 수많은 소탕작전을 물리쳤다고 력사는 기록하고 있다. 항일지사들은 3개 항일근거지 사이에서 유격전을 펼치면서 일본군을 골탕먹였다고 한다. 일본군이 설치했던 삼형제바위 초소는 1945년 쏘련홍군이 동북을 해방하면서 력사속으로 사라졌다.

오봉촌에 세워져있는 로동촌참안에 대한 소개.

오봉촌의 팔도림장에는 일제때의 병원유적이 있다. 력사기재에 따르면 이 병원의 의무일군은 일본사람들이였는데 일본헌병과 일본주민, 위안부, 중국의 한간, 및 광부 등 일본사람들의 리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만을 위해 병을 봐주었다. 병원에는 지하실과 지하통로가 있었는데 구역 헌병총부와 망루로 통했다. 병원지하실은 약 8평방메터쯤 되였는데 모기와 벌레천지였으며 악취가 심했다. 그 물감옥에 사람을 가두어 넣는데 앉을 수도 없고 잠잘 수도 없는 물감옥구조 때문에 며칠 지탱못하고 대개 익사하게 되였다고 한다.

오봉촌 금광산 산허리 위치에는 오봉촌을 모두 굽어볼 수 있는 일본헌병대 유적도 있는데 해방후 폭파해버렸으며 지금은 부분적인 집기초와 층계만이 보존되여 있었다.

오봉촌처럼 항일유적지가 많고 또 지금껏 비교적 완정하게 남아있는곳도 드물 것이다. 현재 오봉촌은 항일혁명유적지들을 적극 발굴하여 홍색관광의 애국주의교양 교육현장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향촌마을로 거듭나고 있는 오봉촌.

《룡정현지명지》에 따면서 오봉촌은 해방후부터 부르기 시작한 이름이다. 해방후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구역인 오류구(五柳区)와 중국사람들이 거주하던 구역인무봉구(舞凤区)를 합치면서 두 구역 이름자들에서 오(五)자와 봉(凤)자를 따서 오봉촌이라고 이름지은 것이다. 무봉이라고 하면 춤추는 봉황이라는 뜻이 되겠다. 어찌됐던 박청송로인의 말대로 산수와 풍광마저 좋은 마을에 봉황이 날아와 춤추었을법도 한 지명이다. 그러나 해방후에는 봉황이 5개나 되는 오봉이라는 상서로운 지명으로 탈바꿈 한격이니 마을이름의 유래나 력사도 무척 흥미있고 경사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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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촌은 마을 구석구석까지 세멘트포장길이 펼쳐져 있다.

마을도 이젠 그 이름값을 하는 것 같았다.

연길시민들의 수원지인 오도저수지를 끼고 있는 독특한 지리적우세와 뭇산속 무릉도원처럼 자리잡은 아름다운 자연풍경 때문에 오봉촌은 바야흐로 연길시주변지역의 이름있는 레저관광휴가장소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였다.

현재 오봉촌은 음식, 레저 등 민속관광과 록색벼재배, 록색양봉 등 농업산업, 출국로무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농민들의 수입이 부단히 오르고 있었다.

현재 오봉촌을 찾아오는 관광객수가 년간 연인수로 10여만명에 달하며 관광경제 수입은 1000여만원에 달한다고 한다. 국경절기간에도 많은 외지인들이 마을을 찾아 둘러보면서 자그마한 향촌마을은 제법 흥성거렸다. 전 촌 출국로무인원이 120여명에 달하고 년간 1000만원의 수입을 창출하고 있으며 촌의 인구당 수입도 1만 3000원여원에 달한다.

당금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은 "봉황새"의 날개짓.

특히 최근년간, 오봉촌은 농촌환경 건설로부터 착수하여 생태환경 건설 수준을 부단히 높이고 있다. 레저록색광장, 철제울타리, 특색담장, 태양에너지 가로등, 세멘트포장도로가 마을을 한결 아름답게 단장했고 도처에 꽃향기가 그윽한 매력적인 생태레저관광 새농촌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오봉촌의 향후 10년전망 계획에는 “오봉촌을 도시사람들이 오고 싶어하는 새 농촌으로 건설한다”는 야심찬 구호가 적혀 있었다.

마을을 떠나면서 문득 커다란 “봉황새”를 만났다. 오봉촌 마을레저광장에 세워진 커다란 철제 봉황새조형물이였다. 붉은 기운을 품은채 춤추듯 땅을 차고 하늘높이 치솟아 오르는 봉황새, 그의 힘찬 도약과 비상의 날개짓에서 오봉촌의 멋진 미래가 방불히 보이는듯 싶었다.

/길림신문 안상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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