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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따라 강따라15]연길교에 깃든 백년의 이야기

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11-06 14:34:11 ] 클릭: [ ]

연길대교 교두에 세워진 백년 옛다리 안내문.

길에서 력사가 가장 오래된 다리는 아마도 연길교가 아닐가 싶다.

매일마다 허다한 시민들과 물밀듯 오가는 차량들이 다리를 건너 다니지만 이 다리의 력사를 알고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연길사람들이 습관적으로 하남다리라고 부르는 연길교는 부르하통하가 남북으로 갈라놓은 연길시의 남과 북을 한데 이어주고 있다.

현재는 연길대교라고 불리우지만 가장 처음 세워질 때는 연평교로 불리웠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110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 1909년의 일이다. 목조건물의 나무다리였는데 다리위치도 지금의 연길대교자리가 아닌 동쪽으로 약 200메터 가량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고 한다.

30년대 연길지도에 그려진 연평교와 신교의 위치.

1909년 이전 연평교가 세워지기 전에는 부르하통하 강 량안에 바줄을 걸고 줄을 잡은채 배를 타고 오르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김씨성을 가진 로인이 배로 장사군들의 물건들을 실어 건네주었다는데 로인이 마음이 착해서 명절이면 시내의 적잖은 사람들이 그에게 담배며 술, 색다른 음식 같은 것들을 보내주군 했다고 한다. 장마철이면 물이 불어 배가 자주 밀려가는 바람에 홍수가 지나간 후 강하류까지 떠밀려간 배를 찾아 다시 끌고 와야 했다고 한다.

연길의 초기 거주분포를 보면 국자가와 흥륭가(해방로)를 중심으로 아래개방지와 웃개방지로 나뉘여 인가가 옹기종기 모여살기 시작했는데 부르하통하 이북지역이 주요한 삶의 터전이였다.

그 당시에는 아무튼 부르하통하에 막혀 강 이남을 마음대로 오갈 수 없었던 연길사람들에게 있어서 새로 세워진 연평교는 허술한 나무다리였을망정 반가운 존재였던것 같다.

 

목조건물로 된 연평교(연길교).

작은 강이 아닌 부르하통하의 장마철 험악한 홍수로부터 풍전등화처럼 가냘픈 목조건물인 연평교를 돌봐야 하고 구해내는 일도 수월치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장마철에는 전문 다리에 올라서서 긴 막대기로 물에 떠내려오는 나무통이나 부유물들을 손보고 걷어내는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다리기둥에 거대한 부유물들이 박히기라도 하면 나무다리가 그 충격에 무너질가봐 미리 손봐주는 것이였다.

력사기록을 보면 목조구조로 된 연평교이지만 1909년도에 세워져서 1934년에 콘크리트 철근구조의 연길교를 건설할 때까지 사용되였던 것을 보아 연길사람들의 다리에 대한 대단한 애착과 보호가 그만큼 연평교에 반영되지 않았을가 싶다.

1936년에 착공된 연길교의 모습.

연평교가 연길교라고 이름을 고쳐서 불리운 것은 1936년의 일이다. 일제가 괴뢰만주국을 세운 후 침략과 수탈의 편리로 연길현공서를 사촉해 부르하통하에 든든한 콘크리트 철근다리를 놓았는데 1934년에 착공을 시작해서 1936년 6월 24일에 착공식을 가지였다고 력사는 기재하고 있다.

착공식을 하는 날 연길시 북산소학교의 왕씨 교원가정 3대가 제일 먼저 다리를 밟았다고 한다. 다리를 개통하면서 연길시내에 살고 있는 조손 3대 부부가 모두 무고한 가정을 뽑아 제일 먼저 걷게 하면 길하다고 해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 당시 왕씨의 부모님과 아들 부부, 그리고 또 아직 돐이 안지난 손주까지 안고 건넜다고 하니 조손 4대가 함께 다리를 건넌 셈이다.

일본사람들이 후에 연길교를 당지 부자에게 팔았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연길시내에 조광자라고 하는 큰 부자가 있었는데 잘 듣지 못해 항간에서는 그를 “조귀머거리”라고 불렀다. 그는 16살 때 료녕에서 연길 국자가에 와서 비단장사며 기름방 등을 꾸려 장사하면서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눈덩이 굴리듯이 큰 부자가 되였는데 일본인들이 그를 가만놔둘리 없었다는 것이다.

연길교를 건설할 때에도 그는 5만원을 지원했다고 하는데 일본침략자들은 그가 연길시내에 지은 3층집 건물이 일본의 동비행장 등 군사시설을 감시할수 있다는 핑게로 생트집을 잡아 조귀머거리에게서 연길교를 사게하는 어거지까지 쓰면서 30만원을 협잡해냈다고 한다.

 

연길교 교면, 멀리 모아산봉우리가 보인다.

후에 어떤 사람들은 일본군이 연길에서 철수하면서 연길교를 폭파하지 않은 것은 조귀머거리에게 일본군이 연길교를 팔아버렸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는 전혀 리치가 맞지 않는 말이다. 단가마에 든 개미격으로 쫓기우는데 급급한 일본군이 연길교가 개인자산이라고 봐줄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1945년 8월, 일본군은 훈춘을 통해 물밀듯 밀려오는 쏘련홍군의 기세에 줄행랑을 놓으면서 쏘련 지면군의 추격을 차단하려고 도문시 량수진에 있는 온성대교도 8월 12일 새벽에 가차없이 폭파해 버린다. 연길교도 그때 폭파위험이 있었다고 력사는 기재하고 있다.

모아산방향으로 도주한 일본군 및 가족은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만주군 24퇀 퇀장이였던 고련항(高连航)에게 명령하여 다리를 폭파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기병퇀 19퇀을 교체해 연길에 온지 얼마 안된 고련항퇀은 애국심은 있어서 결국 연길다리를 폭파하라는 일본군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고 일본군이 창황하게 연길에서 도망친 후 자기 부대를 인솔해 화룡방면으로 흩어졌다고 한다.

후에 그 역시 포로로 쏘련홍군에 잡혔다가 원동지역에 끌려가며 50년대 후기에야 돌아왔다고 한다. 고련항이 연길다리를 폭파하지 않은 일은 그가 숙반운동 때 교대하면서 력사 속에 묻힐번한 일본군의 연길교 폭파사건 음모도 세상에 알려지게 되였다는 것이다.

1980년대의 연길교 모습.

조손 3대, 아니 4대가 연길교에서 길한 기운을 밟아주었기 때문인지, 연길교는 1936년에 개통돼서 별탈없이 사용되여왔고 1957년도에 홍수로 다리기둥이 기울어졌던 것을 1986년에 이르러 원 다리의 기초우에 확건작업을 하게 된다. 우리가 늘 말하는 하남다리는 과거 연길시 부르하통하 북안에 사는 사람들이 강건너 하남에 볼일이 있어 갈 때 부르면서 점차 입버릇이 된 명칭이라고 한다.

연길에 놓인 다리들 중 력사가 오랜 다리로 또 1936년에 건설된 공원다리가 있고 1936년전에는 외나무 다리였다가 1937년도에 나무다리로 모습을 바꾸었다는 유일교(唯一桥)가 있다. 유일교는 1973년에 돌로 된 아치형다리로 모습을 바꾸면서 다리 주변에 공장들이 많다고 해서 건공교(建工桥)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연길교 서쪽에 서있는 연서교는 1976년 국경절날에 준공되였는데 원래는 연신교로 불리우다가 후에 연서교로 불리우기 시작했다. 연길교의 교통부담을 덜어주기 위하여 기동차량은 연서교로 통과하고 소형차량과 공공뻐스들은 연길교로 통과하게끔 했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연길교 동쪽에 건설된 연동교는 1984년 9월 28일에 준공되였는데 연길시 자체로 설계하고 시공한 다리라고 한다. 그후로도 연길시에는 날따라 발전하는 도시발전 수요에 발맞추어 국자교, 연홍교, 천지교, 건강교 등 크고작은 다리들이 많이 건설되였다.

연길대교의 현재 모습.

10년전인가, 연길대교가 개통되던 날, 연길토박이였던 지인이 연길교의 력사를 파헤치고 보면 바로 연길의 력사일 것이라고 감개무량해서 하던 말이 생각난다. 따지고 보면 확실히 연길교에 깃든 100년 세월속의 갖가지 이야기가 바로 연길과 연길사람들이 걸어온 파란만장한 세월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어제일 같은데 그 분도 이젠 저세상 사람이 되였다. 그때 좀 더 물어보았더면 하는 아쉬움도 남지만 흘러간 시간은 다시 돌릴 수 없는 안타까움이다.

연길대교 입구에 세워진 소개에 따르면 연길대교의 길이는 210메터, 너비 51메터, 왕복 6차선도로이며 총투자가 1억 1000만원인데 2010년 1월 12일에 착공하여 2010년 12월 1일에 완공되였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교두에 세워진 백년옛다리 안내문에는 "연길대교의 모양이 두루미가 날개를 펼친듯하고 조선족민족문화특색을 선보여 연길대교라고 이름을 개명하였으며 현재는 이미 연길시의 아름다운 경관으로 부상했다."고 적고 있었다.

/길림신문 안상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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