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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따라 강따라16]약수동에서 희생된 항일렬사부부가 왜 일신에 있을가?

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8-14 12:05:28 ] 클릭: [ ]

손태익 김순희렬사 부부의 묘소

일신(日新)이라고 하면 원 룡정시 세린하향 일신촌을 말한다. 지금은 향도, 촌도 합병되여 로투구진 문화촌이라고 불리운다. 이 일신촌 산자락에 몇기의 혁명렬사묘지가 자리잡고 있는데 거기에 김순희렬사의 묘소가 있다.

김순희라고 하면 우리들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항일영웅이다. 조직의 배치로 약수동에서 항일운동을 진행하다가 1932년 일제의 토벌로 인해 만삭이 된 몸으로 적들에게 비밀을 루설하지 않기 위해 혀까지 물어 끊고 장렬하게 최후를 마친 연변의 유명한 항일렬사이기때문이다.

김순희 렬사가 약수동에서 사망한 것은 력사적으로 똑똑히 기재되여있다. 그런데 김순희렬사는 약수동과 많이 떨어진 일신에 안장되여 있었다.

비록 일신촌에서 남산고개 하나만 넘으면 약수동에 이르긴 하지만 그 거리가 적어도 10리길은 될  것인데 약수동에서 희생된 렬사의 묘소가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 멀리 떨어진 일신의 산자락에 안장되여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8월13일 오전, 멀리 위해에서 연변으로 온, 조선족 력사학자이며 작가인 리광인선생이 김순희, 손태익 묘소 현지답사를 조직하였다.

연변대학 원 중공당사 교수인 최후택선생과 약수동 출신의 항일영웅인 박상활의 외손자 리창윤선생이 호응하여 나섰다.

김순희렬사의 후손이라고 알려진 심일수, 심영수, 최금옥 그리고 화룡시 당사선전원인 리성진 등도 이들 답사조와 어울리여 마침내 렬사묘지 궁금증의 베일을 풀 수 있게 되였다.

연길에서 떠날 때는 추적추적 비가 계속 내려 답사가 은근히 걱정스러웠는데 막상 일신에 도착하자 언제 그랬던가 싶이 비가 그쳤다.

화룡과 룡정에서 달려온 김순희렬사의 유가족들과 연길에서 달려온 일행이 일신에서 서로 만나 함께 묘소로 향했다.

김순희렬사의 묘지에는 하얗고 자그마한 화강암 비석이 세워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혁명렬사 김순희의 묘’라고 씌여져 있었고’ 좌측비면에 ’1981년 10월 1일 일신대대에서 세움’이라고 적혀져 있었다.

그러니까 김순희렬사가 사망한후 바로 이곳에 묻힌것이 아니고 지난세기 80년대 초에 이장해왔다는 말이 되겠다.

혁명렬사 김순희의 묘

혁명렬사 손태익의 묘

김순희렬사묘지옆에 역시 1981년 10월1일 이장한 것으로 기록된 한 기의 봉분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혁명렬사 손태익의 묘’라고 씌여 있었다.

묘비는 ‘아들 성찬이가 세움’이라고 한어로 적혀 있었다.

손태익렬사라고 하면 김순희렬사와는 부부사이이다. 약수동 적위대의 대장이였던 그 역시 김순희렬사가 적들의 토벌에서 희생된 후 며칠 안되여 제3차로 들이 닥친 적들의 대토벌중 소양구 골안에서 적들과 싸우다가 부상을 입었고 적들에게 포로되여 약수동까지 끌려와서 학살되였던 것이다.

결국 부부의 묘가 이곳에 함께 있는것이였다.

그렇다면 약수동에서 희생된 손태익 김순희 렬사부부의 묘소가 왜 일신에 있는 것일가?

“아들 손성찬이 모셔온것입니다”하고 말을 뗀 사람은 심일수씨와 심영수씨 형제였다. 룡정시에 살고 있는 심일수(66세)씨와 화룡시에서 살고있는 심영수씨(58세)는 손태익렬사의 딸 손금순의 아들들이였다.

80년대초에 세린하공사 일신대대에서 민병련장직을 맡고 있었던 심일수씨는 손태익렬사의 아들 손성찬씨와는 외숙질간이였다.

이장 당시 일신에 이장되여 올 묘지의 굴심을 팠고 또 직접 약수동에서 면례(迁葬)해온 유골들을 일신에 안장하는 전과정을 지켜본 장본인이였다.

어언 40년전 일이지만 그때 일을 어제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손태익 김순희렬사의 묘지를 돌아보고있는 답사팀 일행

심일수씨는 외삼촌인 손성찬이 당시 세린하 일신의 손가지팡 뒤골안의 대회동이라는 곳에서 살고 있었고 약수동에 묻혀있던 부모님의 유해를 자식된 도리로 가까이에 모시고 싶어서 이곳 일신에 이장해 왔다는 것이였다.

이장 당시에 비석을 세울때 손태익의 비문은 아들이 세운 것으로 하고 김순희렬사의 비석은 일신대대에서 세우게 한것은 그만큼 유명한 항일영웅인 김순희렬사에 대한 조직적인 배려와 숭경의 뜻이 들어 있었다는 해석이다.

1958년도에 중학교 조선어문 교과서에 김순희렬사에 대한 사적이 올랐는데 어문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김순희렬사의 과문을 숭경의 마음으로 랑독을 해야 한다고 학생들에게 루루히 강조할만큼 김순희렬사는 연변에서 유명한 혁명렬사였다고 최후택교수가 50년대말의 학생시절을 추억하기도 했다.

여기서 잠간, 김순희렬사는 지금껏 연변의 유명한 혁명렬사로 각광받고 있는데 비해 김순희렬사의 남편인 손태익은 잘 알려지지 않은 혁명렬사이다. 어디에서도 손태익렬사에 대한 완전한 자료를 찾을 수 없기때문이다.

지난 80년대초, 손태익렬사의 아들 손성찬을 취재했던 리광인선생은 손태익렬사 역시 김순희 못지 않게 약수동항일유격근거지의 주요한 책임자의 한분이며 천추에 길이 빛날 중요한 항일렬사라고 소개했다.

리광인선생이 렬사유가족을 취재하고있다

리광인선생의 연구에 따르면 룡정 대성중학교 출신인 김순희 렬사가 조직의 배치로 1932년 봄에 룡정에서 약수동에 와서 상처를 하고 아들과 딸 두자식을 둔 손태익과 부부로 되였다고 한다.

손태익의 아들이 바로 손성찬이고 딸 이름이 손금순이였던것이다. 리광인선생은 조직에서 손태익과 김순희를 부부로 맺어줄만큼 손태익이 당시 약수동항일유격근거지의 중요한 무장투쟁 인물이였음을 강조했다.

손태익은 일본군이 제1차 토벌을 진행하던 1932년 10월22일(음력)까지만 해도 약수동적위대의 부대장이였다. 제1차 토벌 당시 약수동적위대 대장이였던 황룡정이 장인강에 가서 회의를 하고 돌아오다가 서쪽 대황구 령마루에서 일제토벌대와 맞띄워 무참히 살해되면서 손태익이 대장직을 맡게 되였고 계속 투쟁을 이어가게 되였다는 것이다.

1932년11월4일 (음력) 김순희렬사가 장렬히 희생되였던 일제의 제2차 토벌 당시 손태익은 적위대를 이끌고 피신했지만 며칠후 적들의 재차로 되는 제3차 토벌에서 적들과 약수동부근의 소양구골안에서 조우해 싸우다가 부상당했으며 약수동마을에 끌려와 장렬히 희생되였던 것이다. 손태익렬사의 비문에는 손태익 렬사가 1932년 11월17일에 희생되였다고 잘못 적혀 있었다.

약수동항일유적지 일각

항일의 불길이 세차게 타올랐던 그제날, 약수동은 100세대도 안되는 마을에서 60여명의 항일렬사가 나올만큼 유서깊은 연변항일의 선봉장이였고 또한 중심지였다.

약수동에서 태여나고 자란 박상활렬사의 외손자인 리창윤(76세)선생은 과거 약수동은 상촌, 중촌, 하촌으로 나누어 근 100여세대가 사는 큰 마을이였으나 적들의 세차례나 되는 포위토벌로 마을이 페허가 되고 사람들이 살길을 찾아 뿔뿔히 흩어져버렸다고 말했다.

적들의 포위토벌이 얼마나 가심했고 잔인했는지에 대한 해석이다.

적들은 약수동 항일군중들이 눈에 든 가시처럼 보았다. 약수동의 리창윤선생은 당시 약수동의 항일군중들이 이처럼 각오가 높고 또 항일의 불길이 세찼던 것은 일제의 탄압을 맞받아 투쟁하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 없는 항일의 필수적인 대항이 혁명군중들의 마음속깊이 자리잡았기때문이였다고 말했다.

1932년 12월 초에 손태익과 김순희렬사부부가 모두 희생되자 당시 9살나던 아들 손성찬과 7살나던 딸 손금순은 의지가지할데 없는 고아로 되였다. 하지만 지인들의 사심없는 도움과 보살핌으로 렬사의 후손들은 드디어 해방을 맞이했고 해방된 조국에서 모두 행복한 생활을 누리였다.

아들 손성찬은 군대에 입대하고 당원에도 가입했으며 제대후에는 세린하의 대회동에 살면서 대대의 치보주임, 일신학교의 빈하중농선전대로 활약하면서 후대들에게 애국주의 혁명전통교양을 폭넓게 진행했다고 한다. 후에 룡정시 동성용진 해란촌에 있는 딸집에서 만년을 보내다가 8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딸 손금순도 당과 조직의 배려로 로후에 룡정영예원에서 렬사유가족으로 만년을 걱정없이 보내다가 2011년도에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세월이 흐르면서 렬사의 자식들도 모두 세상을 떠나고 후손들마저 멀리 떨어져 지내면서 손태익, 김순희렬사의 묘소는 날이 갈수록 임자없는 묘지로 되여가고 있었다. 옆에서 자주 렬사부부의 묘소를 돌보고 가꿀수 없게 된것, 그것이 바로 현재 렬사유가족들의 마음속 아픔과 유감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우리 손자벌 세대들이나마 렬사들의 묘소를 가끔씩은 찾아볼 수 있지만 우리 세대마저 없다면 앞으로 항일영웅 손태익, 김순희렬사의 유해가 묻힌 일신의 묘소가 세월의 기억속에 망각되고 묻혀져 버리는 것은 시간적인 문제일것 같다”고 심일수 심영수 등 유가족들은 안타까워했다.

사실 손태익, 김순희렬사의 묘소가 약수동이 아닌 일신촌에 현재 존재해 있다는 사실을 알고있는 사람들도 매우 적다.

답사활동에 참가한 사람들

화룡시 당사선전강연원인 리성진선생은 손태익, 김순희렬사는 약수동, 나아가 화룡과 연변의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혁명렬사들이기때문에 유서깊은 약수동에 이들의 유해를 다시 모셔와 그들의 빛나는 혁명사적을 세세대대로 알리고 널리 선전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손태익, 김순희렬사가 희생된지도 어언 근 90년세월이 흘러가고 있다.

항일의 렬사들을 노래한 <그대들은 생각해 보았는가>의 노래말처럼 ‘아직도 어느 한 심산속에 이름없이 누워있는 렬사들을...’ 우리는 망각하고 또 소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편벽하고 이름없는 깊은 산골짜기에 묻혀있는 렬사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반드시 찾아내야 하고 또 천추만대 길이길이 빛내가야 할 것이다.

/안상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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