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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조선어 어학계의 별 리득춘교수님을 그리며

안상근 길림신문 2018-01-08 14:23:22

연변대학 원로교수이며 조선어 어학계 저명한 학자인 리득춘교수

5년전인 2013년 1월 16일, 연변대학의 원로교수이시며 우리 조선어 어학계의 거두이시고 중국민족어 학계의 저명한 학자이신 리득춘교수님이 후학들에 대한 자애로움과 제자들에 대한 깊은 사랑을 남긴 채 74세를 일기로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다.

리득춘 교수님께서 쌓으신 학문적 업적은 연변대학에서의 조선어교육과 연구의 기틀을 마련해 놓았고 중국에서의 조선언어학계의 학술연구 방향을 제시하고 그 연구범위를 넓혀주었다. 교수님은 중국민족어학계에서의 조선민족 언어연구의 학문적 위치를 높였고 중조언어문자비교 연구방면에서 중국의 조선-한국학연구와 발전 및 중국조선족한국학 고등교육사업발전에 일조하였으며 세계적으로도 우리 민족의 언어연구에 마멸할수 없는 공헌을 하였다.

후대양성에 필생의 정력을

리득춘교수님은 1938년 10월 19일 훈춘현에서 아버지 리종모씨와 어머니 조두일씨의 둘째 아들로 태여났다. 가난에 쪼들렸던 형편에도 밝고 씩씩했던 교수님은 훈춘현 제2소학교 때 벌써 “나무”등 동시를 쓰기 시작하였고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는 과외로 연극을 창작하고 연기에도 열중했던 열혈문학청년으로 성장하였다. 썩 후에 동요작곡가 김종화선생이 곡을 붙인 동요 “나무”가 전국동요축제에서 2등상을 받았으며 소학교 음악교과서에 오래동안 기재되였다.

훈춘고중을 졸업한 교수님은 1958년 8월 연변대학교 어문학부 조문전업에 입학하였고 졸업후 연변대학통신학부 조선어교연실 조교로 남게 되면서부터 언어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게 되였다.

심한 생활고와 지식인에 대한 각박한 시대를 겪은 리득춘교수님에게 교수사업과 학술연구는 유일한 돌파구였고 삶의 신조이였다.

70년대의 ‘공농병대학(工农兵大学)’시절, 전국 각지에서 뽑혀온 조선어계의 한족학생들을 이끌고 농촌 각지를 다니면서 ‘밖으로 나가 공부하기(开门办学)’의 쓰고 단맛을 보았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 그에게는 가족보다 학생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몸이 불편한 안해와 어린 남매를 집에 두고 일년 동안의 절반 이상을 학생들과 함께 산간벽촌에 내려가 생활하였다. 어쩌다 집에 있는 주말이면 늘 객지생활을 하고 있는 학생들을 불러 들이군 했다. 10여명의 학생들이 늘 줄지여 선생님 댁을 찾았고 따뜻한 밥상에 둘러 앉아 학생들과 함께 보내는 것을 행복으로 여긴 교수님과 사모님이셨다. 훗날 국내외 여러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로 추천받은 그때의 학생들은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이 주말마다 찾아 갔던 리득춘 교수님댁이였고 환대해 주시던 사모님과 귀여운 코흘리개 어린 두 자녀 경일이와 홍매였다고 추억했다.

중년에 이르러 주로 석사, 박사생 양성에 힘을 기울인 교수님이셨다. 특히 1988년에 박사연구생 지도소조 조장직을 맡고 정판룡교수와 협조하여 중국조선족 제1 기 언어학 박사생 양성에 열정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때로부터 수천명의 조선어 고급전문인재를 양성해낸 교수님, 현재 중국조선어학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강보유, 렴광호, 김기석, 최건, 김영수 등 교수들을 포함한 국내 조선어연구의 중견으로 될수있는 조선어학박사 14명을 친히 양성하였다. 그 외에도 수많은 학부생, 석사생제자들은 현재 국내 여러 대학 조선어학과의 인솔자로, 더 나아가 관련연구부문의 저명한 학자들로 명망을 떨치고 있다.

석사, 박사생 모집수가 한명, 두명 정도일 때에는 단독 교실도 없이 교수님댁 밥상에서 수업할 때가 많았다. 안도로 가는 기차표값조차 아껴야 했던 석사연구생시절에 교수님은 나에게 부모님과 같은 존재였다. 댁에서의 오전 수업이 끝나면 부근의 두부방에 가서 친히 두부를 사다가 감자를 넣고 끓여 주시군 하였는데 그 된장국과 배추김치맛을 나는 영원히 잊을수 없다.

기관지천식때문에 환절기 때면 늘 기침을 심하게 하신 교수님, 기침을 심하게 하시고 나서 온 몸에 땀을 흘리시면서도 석, 박사생들의 학위론문에 빨갛게 줄을 그어주시고 한 구절, 한 단락을 바로 잡아 주시군 하셨다. 우리는 그렇게 교수님의 손에서 커가게 되였다. 제자들에 대한 극진한 책임감과 깊은 사랑으로 지병때문에 고생하면서도 2010년에 마지막 박사생 제자들인 지동은, 김수동, 강미화, 마영미 등을 무사히 졸업시켰다.

교육생애 마지막 박사생제자들인 지동은(왼쪽),강미화와 함께 

교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아바이”라고 다정하게 부르면 허물없이 응해주시군 하였다. 때론 친구처럼 제자들과 노래방에서 “백명의 위인”을 힘차게 부르시면서 학술연구 방면 뿐만 아니라 생활면의 고민도 무랍없이 들어 주셨다. 한편 학술에 있어서 더 없이 철저했던 교수님은 제자들 칭찬에 린색했다. 석사, 박사 연구생들 중에는 나이가 든 학생들도 많았다. 인생이야기로 꽃을 피울 때에는 너무나 친절한 선배님이시다가도 일단 론문에 대한 토론이 시작되면 더없이 엄격했던 교수님은 “겉보다도 내실을 갖추어야 학술계에서 살아갈 수 있다.” “학술사업을 위해서는 그 어떤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들과도 따뜻하게 손을 잡아야 한다.”고 늘 제자들을 타이르셨다. 성과앞에서 겸허했던 그 자세와 학술에 대해 지키신 신조는 우리 제자들의 영원한 본보기이며 목표이다.

교수님이 타계하신 후 령전을 우러르며 제자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석, 박사 공부를 하면서 욕을 안먹어 본 사람이 있었나요? 그렇게 교수님은 우리를 자식처럼 편달해주셨어요. 교수님의 그 욕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없었을 겁니다. 부모님 같았던 교수님의 그 욕이 너무 그립습니다.”

상해외국어대학 김기석교수는 “내가 어려운 중국음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지금 중국어학계학자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전적으로 리득춘교수님의 편달과 갈라놓을 수 없다. 또 교수님이 아니셨다면 중-조음운대비 연구분야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했다. 나 역시 그러하다. 한개 시골 중학교 조선어문교원이였던 내가 리득춘교수님의 사랑과 편달이 아니였더라면 대학교 박사지도교수를 꿈꾸지도 못했을 일이다.

1993년 7월을 계기로 해마다 한국에 다녀오신 교수님께서는 돌아올 때마다 책을 한 트렁크씩 무겁게 지고 와서는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군 하셨다. 또 늘 국내외 학술회의에 제자들을 이끌고 가서 여러 유명한 학자들에게 자신있게 소개해주셨다. 하기에 나를 포함한 교수님의 여러 제자들은 지금도 조선의 김일성종합대학, 사회과학원언어연구소, 한국의 서울대학, 고려대학, 연세대학, 이화여자대학, 국립국어연구소 등 유명한 국어학 교수들과 스스럼없는 교류를 하고 있다. 2011년 12월에 지나친 병독으로 쓰러지신 교수님, 급환자 응급실에서 10여 일간의 구급치료 끝에 눈을 뜨시고 하신 첫마디 말씀이 “영수선생, 내 가방을 찾아주오…”였다. 강의안이 들어 있는 가방을 찾으셨던 것이다. 사실 정신을 잃으신 동안 교수님은 강의하러 들어간 환각으로 사셨던 것이다. 그때 우리 제자들은 뭉클하는 가슴을 어쩔 수 없었다. 퇴원하신 후, 교수님은 심한 후유증 때문에 몸을 일으킬 수도 없으면서도 박사학위 심사론문을 세심히 보아 주셨고 그 동안 중단한 론문 집필을 빨리 끝마쳐야 한다고 하시면서 누워서 열심히 원고를 보시군 했다.

실로 교수님의 일생은 교육자의 일생으로서 《강의》와 《학술》 이라는 네 글자를 떼여 놓을 수 없었다. 우리 연변대학은 물론, 전국의 유명한 대학교들의 한국어 강당에는 교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수없이 많다.

학술연구의 경지

론문발표, 학술회의 등 활동이 중단되여 있었던 험한 세월에도 꾸준히 밀도 있는 조사와 연구를 이어왔던 리득춘교수님이셨다. 오늘날 세상에 내놓은 수많은 연구업적은 바로 젊은 그 시절부터의 세심하고 지속적인 연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1985년에 부교수로, 1992년에 교수로 승진한 교수님은 정년이라는 개념도 없이 연구를 중단하지 않았다. 다년간의 연구과정에서 교수님은 자신의 연구방향을 명확히 하고 시대적인 특징을 갖춘 다학과 교차적인 연구령역을 개척함으로써 교수연구와 조선어전문연구 및 그 성과가 하나의 계통성을 띄게 하였다.

선후로 <한국어 한어기원 한자어 및 한국어 단독 사용한자어 연구(试析韩国语汉源汉字词和韩国独有汉字词, 2005)>, <세기교체기 한국어 새 단어 중 한자어 고찰(世纪之交韩国语新词中的汉字, 2004)>, <중국에서의 한국학 연구(中国的韩国学研究, 2006)>등 백 오십 여 편의 학술 론문을 국내외 학술간행물에 발표한 교수님은 “중-조 언어문자관계 비교연구”와 “중국조선어연구”의 새로운 령역을 개척한 한 분이시며 중국조선어 문법체계를 확립함으로써 국내외 학술계의 높은 평가를 받으셨다.

리득춘(왼쪽)교수님과 필자

리득춘 교수님은 《명청시기 조선어번역서에 반영된 근대 한자음운 체계(明清时期朝鲜朝翻译韵书中所反映的近代汉语音韵体系)》,《중국문자 음운과 한국 언어문자 생활(中国文字音韵和韩国语言文字生活)》, 《조선 한조 번역사와 조선어 관련연구(朝鲜汉朝翻译史与朝鲜语关系研究)》, 《조선언어역사 연구(朝鲜语语言历史研究)》, 《연변조선족 이중언어문제 연구(延边朝鲜族双语问题研究)》등 묵직한 항목으로 여러 차례 중국 국가인문사회과학 중점항목, 중국 국가교육부 중점항목, 중국 길림성 사회과학기금항목 등에 관한 연구를 원만하게 완수하였다.《조선운서와 명청음계(朝鲜韵书与明清音系)》가 발표된 후 한어 언어관계 연구 령역에서 독특한 학술지위를 부여 받게 된 교수님은 학계로부터 “이 항목의 연구성과는 중요한 학술가치와 실용가치를 갖고 있으며 중국언어학사업의 발전에 적극적인 공헌을 하였다.”라는 평가를 받았고 또한 중국의 저명한 음운학가인 녕계복(宁继福)선생으로부터 “근대한어에 대한 전면적인 정리와 계통적인 비교는 리득춘선생의 이 항목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라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교수님은 늘 학생교양이나 학술연구는 국제 간의 교류를 떠나서는 “우물 안의 개구리”신세 밖에 될 수 없다고 하면서 “서울대학교”, “김일성종합대학”은 물론 미국, 대만, 인도 등 국외 여러 조선어연구부문, 대학과의 교류를 중히 여겨왔다.

1988년을 계기로 국내의 여러 대학에서 펼쳐지는 학술대회는 물론 일본의 “고려학국제학술토론회”, 한국의 “국제한국어교육학회”(외 90차), 러시아의 “러시아 원동대학 국제교학교류회”, 조선의 “김일성종합대학 국제학술교류회”, 대만의 “환태평양한국학국제학술대회” 등 98차에 달하는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하여 대담히 자신의 학술연구성과를 발표함과 동시에 선진적인 연구성과를 받아들였으며 국제, 국내에서의 연변대학의 지명도를 높이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불멸의 성과

1991년부터 여러 차례 국가인사부와 국가교육위원회에서 발급한 「우수교사」의 영예를 받아 안은 교수님은 1993년에 《국무원정부특수수당수혜자(国务院政府特殊津贴授予者)》로 지정 받으셨다. 이외 연변대학으로부터 《연변대학과학연구1등상》, 《건교50주년 특수공헌상》 등 10여차의 영예와 길림성 정부와 길림성 교육위원회에서 발급하는 《길림성사회과학연구 40년 이상 특수학술성과상(吉林省社会科学研究40年以上特殊学术成果奖)》, 《동북3성 조선어문특수공헌상(东北三省朝鲜语文特殊贡献奖)》등 15차 이상의 수상을 하셨다.일찍 1998년에 한국으로부터 《한글발전유공자》로 포상 받고 훈장 및 국무총리상장을 받았으며2007년에는 한국고등교육재단과 연변대학에서 공동으로 설립한 중국 국내한국학의 최고의 상인《와룡상》을 수여 받았고 2009년에는 《대한민국동숭학술상》을 수상했다.

2011년 정년퇴직을 맞이하기까지 선후하여 연변대학 조문학부 학위평정위원회 위원, 연변대학학술위원회 부주석,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학술위원회 학과평의조 성원, 중국교육부중점연구기지-중・조・한・일 문화비교연구중심 주임,연변대학동방문화연구원 원장 등 중직을 맡았던 교수님은 북경대학, 산동대학, 길림대학, 락양해방군외국어대학, 천진사범대학의 겸직교수로 계셨으며 「연변대학학보」, 「동강학간(东疆学刊)」, 「민족어문한국학과중국학(民族语文韩国学和中国学)」, 「중국민족고문자문헌연구총서(中国民族古文字文献研究丛书)」 등 중문잡지와 「조선학연구」, 「중국조선어문」 등 조선어잡지의 편집위원을 맡으셨고 중국조선어학회상무리사, 중국민족언어학회 상무리사, 중국 알타이어학분회 부주석 등 직무를 력임하면서 중국에서의 한국어교육과 연구 뿐만 아니라 전반 외국언어문학의 학과건설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1963년 졸업해서부터 2011년 상반 년까지 연변대학교라는 하나의 우물만을 파신 리득춘 교수님은 장기적으로《기초조선어》, 《조선어고문헌선독》, 《조선어발달사》, 《조선어수사학》, 《조선어사》 등 교수 임무를 담당하면서 중국조선어 고등교육 과정체계를 건립하고 완성화하였다.

피땀으로 하나하나 펼쳐낸 저서와 교과서들로는 《고대조선어》,《중세조선어개요》,《조선어기초교정》 등 40여권이나 된다. 그 중 《초급조선어》는 1996년 길림성 우수교재 1등상을, 《한조어문문자관계사》는 1995년 전국 대학교인문사회과학 연구성과 국가급 2등상을, 《조선어발달사》는 2007년 동북3성 조선문 우수도서 1등상을 받았다.

2007년 국제학술회의에서 박사,석사생 제자들과 함께

평생의 정력을 교육사업과 연구사업에 몰부으신 리득춘 교수님은 연변대학조문학부의 언어학 인재양성의 수요로 70여세 고희의 년세에도 박사생수업을 맡아 하신, 연변대학에서 제일 오래동안 재직에 계신 분으로 남았다.

병마 때문에 부득이 퇴직을 해야만 했던 그날, 멀리 바라보이는 모아산을 바라보시면서 후-하고 한숨을 쉬시는 교수님의 뒤모습을 바라 보면서 인생의 전부였던 연변대학을 떠나시는 교수님의 외로움과 아쉬움, 그리고 제자들에 대한 걱정을 곁에서 느낄수 있었다.

우리 곁에 계실 때 학술에서 가져야 할 자세, 학문연구의 방법을 더 많이 전수받아야 했는데…… 학문에 막혔을때 아무때나 문을 열어 주셨던 교수님이 몇년만 더 계셨더면 내가 지금 후배들에게 더욱 떳떳한 도사로 나설수 있을텐데… 다시는 교수님을 모실 수 없게 된 후에야 얻은 깨달음에 후회가 막급하다.

오늘도 제자들을 굽어 보실 우리 선생님! 선생님, 이제 제자들 걱정 그만 하시고 편히 쉬세요. 선생님의 그 제자사랑을 우리는 영원히 잊을수 없습니다.

/연변대학 조선-한국학 학원 교수, 박사생지도교수 김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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