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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한락연의 발자취 따라(32)

유경봉 길림신문 2021-11-05 16:24:29

▧ 김동수

제9장 무지개로 피다

1. 천지보다 깊은 우정

2011년 6월 4일, 북경 동성구 54대가 1호에 위치한 중국미술관에서는 한락연유작전이 성황리에 열리였다. 유작전에는 한락연의 자녀들과 북경의 많은 지명인사들과 지성인들이 대거 참가하였다. 당시 중국미술관 관장이였던 범적안(范迪安)선생은 “한락연의 일생은 중국 현대 예술 발전에 공헌한 일생이며 그로 하여 20세기 중국 미술사에서 독특한 지위를 차지한다.”고 극찬하였다.

한락연의 부인 류옥하(좌)와 장치중 장군의 딸 장소아녀사

수도 북경에서 열리는 고품격의 전람회에 처음 참가하는 나로서는 느낌과 감회가 남달랐다. 학자와 전문가들의 평가와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락연을 기념하여 현재 하고 있는 일들이 얼마나 보람차고 의의가 있으며 또한 지금껏 해온 일들이 헛된 짓이 아님으로 하여 못내 자호감을 느끼였다.

간소한 개막식이 끝난뒤 나와 한건립녀사는 북경시 숭문문동대가 22동 2호(崇文门东大街22栋2号)에 살고 있는 장치중 장군의 딸 장소아(张素我)녀사의 댁으로 찾아갔다.

문에 들어서니 첫눈에 장치중 장군이 모택동, 주은래와 함께 찍은 커다란 사진이 보였다. 그 옆에 장소아녀사가 젊었을 적에 한락연의 부인 류옥하, 등영초, 송미령 등 쟁쟁한 녀성들과 함께 찍은 사진도 놓여있었다. 장소아녀사는 96세(2011년) 고령이였는 데도 정정하고 기억력이 좋고 사유가 민첩했다. 그녀는 건립녀사를 보더니 너무나도 반갑다며 오래도록 뜨겁게 포옹하였다.

저명한 사회활동가인 장소아녀사는 1933년 남경 금릉녀자대학을 졸업하였다. 금릉녀자대학은 중국에서 제일 처음으로 녀성 고급 지식분자들을 배양한 요람이였다.

당시 금릉녀자대학을 졸업한 녀학생들은 한결같이 아름답고 단아하고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웠을 뿐만 아니라 열정적이고 간고분투하며 민첩하고 과감하게 행동하는 정신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작은 가슴에 덕을 숭배하고 남을 돕는 것을 락으로 여기는 아름답고 고상한 덕행을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1935년 장소아녀사는 영국으로 류학하였고 1937년 귀국 후에는 항일구국 운동에 참가하였다. 해방 후에는 선후로 북경외국어학원, 대외경제무역학원에서 교수로 사업하였다. 제5기부터 제9기까지 전국정협 위원, 상무위원으로 당선되기도 하였다.

나는 장소아녀사께 머리 숙여 인사를 드렸다. 그가 내여주는 소책자에 남경 금릉녀자대학의 교훈(校训)이 후생(厚生)이라고 적혀있었다. 후생이라는 뜻을 정확히 알 수 없어서 장소아녀사에게 물었더니 “두터울 후자에 낳을 생자니 무슨 뜻이겠어? 사람이 태여나서 오직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서는 안된다. 자기의 재간과 능력으로 다른 사람을 방조하고 사회를 위하여 복을 마련해야 된다. 그래야 다른 사람에게 유익할 뿐만 아니라 자기의 생명도 그로 하여 더욱 빛나고 풍성해지고 보람차게 된다. 대강 이런 뜻이야.”라고 말씀하였다.

한락연의 딸 한건립, 장치중 장군의 딸 장소아와 함께 있는 필자

뒤이어 장소아녀사는 건립녀사를 부른 사연을 천천히 말씀하였다.

그녀는 한락연이 그려서 선물한 〈신강 천지〉 풍경화 그림을 한점 소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오래 가면서 얼마전에 벽에 걸어놓은 끈이 끊어져 유리가 깨여지고 틀도 마사졌다. 천만다행으로 그림은 파손되지 않았다. 장소아녀사는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다. 얼마나 소중한 그림인가? 이 진귀한 유품을 어떻게 보관할가? 이제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라고 이 궁리, 저 궁리 하던 끝에 한락연의 자녀들에게 돌려주기로 작정하고 건립씨를 불렀다는 것이였다.

내가 옆에서 동영상과 사진을 찍으면서 “한락연을 기억하세요? 이 그림이 한락연이 선물한 것이 맞아요?”라고 물었다.

“그럼, 맞고 말고! 신강 우룸치에서… 아직도 기억이 생생해. 건립이는 아버지를 똑 떼닮았다니까. 이 그림은 한락연이 직접 나에게 선물한 것이지. 지난 50여년 동안 나는 우룸치에서 란주, 향항, 북경에까지 옮겨 살면서 어디 가든 줄곧 이 그림을 방에 걸어놓았어요.”

장소아녀사는 조금 숨을 돌리고 나서 계속 이야기하였다. “이 그림은 한락연이 1946년에 그린 거예요. 그 때는 신강 천지로 오르는 길이 없어 일반 사람들은 감히 오를 엄두도 못냈어요.그때 나는 우룸치에 살면서도 한번도 가보지 못했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나 열정적이고 용감히 도전하는 한락연이 노새를 빌려 타고 천지에 올라가 이처럼 아름다운 천지 풍경화를 그렸어요. 그는 여러 폭 가운데서 한폭을 나에게 선물했어요… 참 소중한 것이지.”

장소아녀사는 가슴 속에 아련히 남아있는 기억을 되살리며 추억의 정을 못 잊어 눈굽을 찍으면서 두손으로 그림을 어루만지였다. 마치도 한락연의 두손을 잡은 것처럼.

“1991년 8월에 나는 전국정협에서 조직한 신강고찰단 성원으로 신강으로 갔어요. 그 때는 이미 천지로 오르는 도로가 통하여 차를 타고 천지에 올랐어요. 한락연이 당년에 그렸던 천지 풍경을 직접 두눈으로 실감하니 너무나도 가슴이 북받치고 감회가 새로왔어요. 마치도 한락연의 멋진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어요.” 말을 마치고 장소아녀사는 이윽토록 한건립녀사를 응시하였다. 그리고는 그림을 한건립 녀사의 손에 꼭 쥐여줬다.

한건립녀사는 이 그림은 아버지와 장치중 장군, 그리고 어머니와 장소아 녀사의 우정 뿐만 아니라 우리 두 세대 가족의 두터운 우정의 상징이므로 꼭 소중히 보관하겠다고 하면서 북경 신개로거리에서 장치중 장군의 가족과 함께 살았던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였다.

장소아녀사는 가정부를 불러 그림을 조심스럽게 정히 포장하였다. 그는 이것이 한락연의 친밀한 우정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며 더없이 경건한 마음으로 그토록 심려하였다.

금전만능의 시대에 상상도 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 진귀한 유품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그 마음과 정신적 경지에 나는 놀랐으며 그것도 자신의 정신이 흐려지기전에 꼭 실행해나가는 그의 행동에서 나는 한 인간의 고귀한 삶, 고상한 경지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깊이 느꼈다.

장소아녀사는 퇴직할 때까지 영어 교원으로 일했는데 지금도 영어를 류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부끄러운 것은 내가 영어를 할 수 없는 것이였다. 내가 그에게 한락연의 고향 룡정에서 한락연공원을 건설하고 동상을 세웠다고 말하자 그는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한다.”며 나의 손을 잡고는 “몇해전만 같아도 도움을 줬을 텐데.”라고 하며 서운해하면서 “사진이라도 보내달라.”고 부탁하였다.

가정부가 약 드실 시간이라고 하여 우리는 기념사진을 찍고 일어났다. 눈굽을 찍으며 문가에 서서 오래도록 바래주던 장소아녀사의 모습이 이 글을 쓰는 이 시각도 기억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한락연이 장소아녀사에게 선물한 〈신강 천지〉 그림

그 후 얼마 안되여 북경에 있는 한건립녀사께서 나에게 장소아녀사가 세상 떴다는 놀라운 비보를 전해왔다. 나는 솟구치는 눈물을 훔치며 고인의 명복을 빌고 빌었다.

장소아녀사는 파란만장한 격동의 시대를 거쳐온 혁명가의 후예였지만 그토록 겸허하고 소박하고 붙임성이 좋았으며 인정미가 온몸에 차고 넘쳤다. 그녀는 또렷한 기억 속에 뜨거운 가슴에 한락연이라는 인간을 고이고이 품고 있었다. 감격스러운 것은 그녀와의 만남을 통하여 한락연과 장치중과의 밀접한 관계와 천지보다 깊었던 그들의 우정을 더 확인한 것이였다. 더욱 감격스러운 것은 무슨 일이나 과감히 도전하고 실천하는 한락연의 불요불굴의 개척정신과 창조정신을 사실적으로 알게 된 것이였다.

2012년, 한건립녀사는 장소아녀사가 남겨준 〈신강 천지〉 풍경화를 특별히 연변박물관에 무상으로 기증하면서 수많은 고향 사람들이 진품 한락연의 그림을 감상하도록 깊은 아량을 베풀어주었다.

먼먼 후날, 자라나는 후세들이 그 그림을 감상하면서 그림에 깃들어있는 가슴 찡한 사연들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들의 눈과 마음에 비춰지는 전세대 사람들의 처절했던 분투와 추구, 희로애락과 파노라마같은 삶의 순간들은 과연 어떤 모습일가?

编辑:유경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