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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장백현위 초대서기 권영벽동지

최창남 길림신문 2021-12-30 15:04:05

권영벽동지는 1909년 8월에 조선 함경북도 경성군 룡성면 수성리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중국공산당 당원이며 중공 장백현위원회의 초대서기였다.

권영벽동지(자료사진)

권영벽이 출생한 지 이듬해 인 1910년에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자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조선을 떠나 중국동북에 오게 되였다. 1929년 권영벽도 그들을 따라 중국 길림성 연길현 옹구동골에 자리를 잡고 농사를 짓게 되였다.

1931년 권영벽은 일본침략자들이 동북을 점령하자 적극적으로 반일투쟁에 나섰다. 당조직의 양성과 교양하에 그는 계급각성이 재빨리 제고되여 1932년10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2년 권영벽동지는 연길현 옹구당위원회 서기직을 맡았다. 그는 군중을 교양하고 군중을 조직하여 농민협회, 반일동맹회 등 혁명군중조직을 건립하였고 광범한 농민들을 발동하여 생산을 발전시키고 항일유격대에 보낼 원호물자를 마련하는 등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원호하였다. 1935년에 일본침략군, 괴뢰만주국군과 경찰들이 미친듯이 항일유격근거지를 향해 포위토벌을 감행하면서 반동적인 집단부락정책을 실시하여 군민간의 혈연관계를 끊어 놓은데서 유격근거지가 엄중하게 파괴되였다. 이리하여 당에서는 유격대와 군중을 안도현 처창즈에 철수시켰다. 권영벽은 동북인민혁명군에서 정치지도원으로 있었다.

1936년3월, 항일련군부대가 교하로 원정할 때 권영벽은 2퇀 2련에 편입되여 당지부서기로 있었다. 원정이 끝난후 그는 제2군 6사의 선전과장사업을 하였다. 그리고 그해 5월에 6사는 무송현 동강에서 력사적의의를 띤 “동강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서는 장백산을 중심으로 장백, 안도, 림강 등 지방에 새 유격근거지를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중공 장백현위를 창립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조직건설사업으로 되였다. 장백현위의 지위와 역할은 매우 중요하였다. 중공 장백현위는 상급당위의 지시와 임무를 동만과 남만 각지에 전달하고 지방 사업과 정황을 상급당위에 보고하는 중추적역할을 놀아야 했다. 그러므로 상급당위에서 중공 장백현위 제1책임자를 선발하는데 아주 큰 중시를 돌렸다. 현위서기의 직책을 잘 감당하자면 위험을 겪을 담력이 있고 군중을 선동하는 능력이 있으며 군중과 밀접히 련계하는 사업작풍과 사업방법을 지녀야 하며 사태를 정확히 판단하는 능력과 치밀성, 림기웅변하는 지략 및 통찰력을 구비하여야 했다. 상술한 기준에 부합된 인물이 다름 아닌 권영벽동지였다.

1936년 10월말, 6사 당위에서는 권영벽동지를 중국공산당 장백현위원회 서기로 임명했다. 권영벽동지의 중요한 과업은 당조직을 건립할 준비사업을 하고 군중을 발동하여 조국광복회를 조직하는 것이였다. 1937년 7월, 권영벽동지는 십칠도구 평강덕에서 현위회의를 소집하고 동북지구의 혁명정세와 그 것에 따른 당면한 주요과업에 대한 남만성위의 지시를 전달하였다. 권영벽은 1년동안에 많은 당원과 조국광복회 회원들을 발전시켰다. 그는 생명위험을 무릅쓰고 반일회, 항일구국회, 부녀회, 청년단, 소년단, 농민협회, 생산유격대를 비밀리에 세웠고 또 적들의 봉쇄를 뚫고 항일유격대에 정보를 전하고 군수품과 약품을 보냈으며 군중을 동원하여 원호물자를 모아 항일유격대에 보냈다.

1937년10월, 변절자의 밀고로 중공 장백현위원회와 조국광복회 조직망이 탄로되였으며 현위서기 권영벽과 기타 100여명의 항일투사들이 체포되였다. 항일전쟁승리 전야인 1945년 3월 10일, 권영벽동지는 서울 서대문형무소 교수대에서 영용하게 적들에게 살해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36세였다.

/최명광(崔明光), 최창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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