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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 항일투사] 김문철(金文哲, 1911—1939)

김정함 길림신문 2022-01-18 09:59:07
제2편 중공 각급 지도간부

3. 시, 지구급 중공 지도간부

(중공 시위원회 위원, 특별위원회 위원, 중심현위원회 위원, 성위원회 직속 위원회 책임자 및 비서처 책임자 등)

김문철(金文哲, 1911—1939):

중공할빈시위원회 서기. 1911년에 조선 평안북도 진남포(镇南浦)에서 태여났으며 원명은 김찬(金灿)이고 김만성(金满成), 장문철(张文哲), 김철(金哲), 김철오(金哲悟) 등 많은 이름과 가명을 썼다.

1921년에 부모를 따라 중국 북평의 통현으로 이주, 통현의 로하(潞河)소학교에서 공부하다가 1928년에 로하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29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같은 해 중공상해조선인지부의 파견으로 서울, 평양에 가서 활동하였다. 조선 국내에서 활동하는 기간에 이른바 치안유지법, 출판법 위반으로 기소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7년 도형을 선고받았지만 얼마 후 특사령이 내려져 1934년 가을 석방되여 북평에 돌아왔다.

석방 후 공청단강소성위원회에서 《소년진리보》를 책임지고 편집하였으며 1935년에 도개손(陶凯孙)과 결혼하였다. 1936년 1월부터는 도개손 등과 함께 《소년진리보》를 꾸렸다. 1936년 5월 25일, 할빈에서 중공할빈시위원회 서기(도개손은 선전부 부장으로 임명)로 되여 철도와 공장, 학교, 선박수리소 등지를 찾아다니며 당사업을 활발하게 벌렸다.

그러던 중 반역자의 밀고로 할빈에서 6.13사건(일본관동군사령부에서 6월 13일 오후 3시 할빈, 치치할, 하라얼, 목단강 등지에서 동시에 중공당원에 대해 벌린 체포작전이며 도합 240명이 체포되였다.)이 터지자 조직의 동의를 얻어 6.13사건이 발생한 지 나흘째 되던 6월 17일 할빈을 떠나 북평으로 갔다.

그후 북평민선대(北平民先队)에서 지도사업을 하다가 1936년 12월 체포되였으나 다행히 신분이 폭로되지 않아 1937년 봄에 출옥하였다.

출옥 후 당조직과 련계가 끊어졌지만 1937년 8월 경 여러 경로를 통해 끝내 남경팔로군판사처의 리극농(李克农)과 련계를 취하게 되였으며 그해 9월 연안으로 갔다. 연안에서 섬북공학(陕北公学) 제1기 제2대대에 들어가 학습하였다(안해 도개손은 중앙당교 제13반에 들어갔다).

연안에서 다시 입당하였지만 1938년 1월 중앙당교의 사무를 주관한 강생에 의해 도개손과 함께 ‘일본간첩’으로 무함 받아 체포되였고 안해와 함께 1939년 3월 비밀리에 처형되였다.

1982년 5월, 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는 장기간 억울함을 당한 이들의 루명을 벗겨주고 명예를 회복시켜주었다.

(자료출처: 《중공할빈당사인물전》)

/박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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