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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 항일투사] 왕경(王耿)

김정함 길림신문 2022-07-06 12:47:55

제2편 중공 각급 지도간부

3. 시, 지구급 중공 지도간부

왕경(王耿, 1905—?): 중공동만특별위원회 조직부 부장, 대리서기

원명은 문갑송(文甲松)이고 문벽도(文碧涛), 리완룡(李完龙), 립효로(立晓露) 등으로도 불리웠다. 1905년에 봉천(오늘의 심양)에서 태여나 1916년에 중국 국적을 취득했다. 동녕현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 길림사범학교에 진학하여 수학했다.

1922년 8월, 고려공산당(상해파) 길림구역회에 입당하였으며 12월에 쏘련 울라지보스또크에서 혁공소학교의 교사로 근무했다. 1928년에 국제공산당의 파견으로 동북에 와 사업하다가 할빈에서 체포되여 옥살이를 하였다. 1929년에 출옥 후 중공만주성위원회 비서처에서 사업하였으며 당해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0년 2월, 중공만주성위원회의 파견으로 중공동만특별지부(5월에 중공연변당부로 재조직)를 건립하고 서기가 되여 ‘붉은 5월 투쟁’을 지도하였다. 1930년 8월, 중공연화중심현위원회 설립을 주도하고 서기가 되였다. 1930년 10월, 중공동만특별위원회 설립에 참여하고 조직부 부장이 되였다.

1931년 가을, 왕경은 한족들 속에서 우수한 열성자들을 선발하여 당원으로 발전시켰는데 리연록, 왕덕태의 소개인이 되여 입당시켰다. 1931년 9.18사변을 전후하여 양림과 료여원이 성당위로 소환되자 잠시 대리서기가 되였다.

1932년 11월, 남만으로 파견되여 반석현로농의용군 정치부 주임으로 사업하다가 1933년초에 중공료대(辽台)림시현위원회에 파견되여 선전부 부장이 되였다. 그러다가 1934년에 일본경찰에 체포된 뒤 서울에 압송되여 서대문감옥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수감중 옥내공산주의자동맹 결성에 참여했다.

(중국측 일부 자료에서는 감옥에서 사망한 것으로 나오나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에 따르면 1945년 8월 15일까지 장기복역하고 출옥한 후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에서 사업하였으며 선후로 조선공산당 서기국원, 사회로동당 림시중앙위원, 근로인민당 상임위원 및 사무국장으로 사업하였다.)

(자료출처: 《동북항일련군명록》,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 등)

/박문봉 편저 《동북항일전쟁 조선족인물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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