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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 항일투사] 리용 리용구 리용국

김정함 길림신문 2023-03-27 14:49:21

제2편 중공 각급 지도간부

4. 현·구급 중공 지도간부

리용(李镛, 1897—1954): 중공동만특별위원회 통신련락부 부장

원명은 리종성(李钟声)이고 춘파(春波), 추산(秋山)이라고도 했다. 1897년(일부 자료에서는 1888년이라고도 적고 있음)에 조선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헤그밀사사건으로 유명한 리준(李俊)의 아들로 태여났다.

중국 절강군관학교(일부 자료에서는 운남강무학당이라고 적고 있음)를 졸업하고 중국군 소위로 임관했으며 1919년 4월 로씨야 울라지보스또크에서 결성된 한인사회당 군사부 담당 중앙위원이 되였다.

1920년에 대한민국림시정부로부터 동로(东路) 사령관으로 임명되여 북간도에서 반일무장부대의 통합에 힘썼으며 1921년 10월 대한의용군을 재건하고 사령관이 되였다. 1922년 9월, 고려혁명군 연해주총지부 북부사령관으로 지명되였다.

1925년에 쏘련군사고문단과 함께 중국 광동혁명근거지로 가서 국민혁명군 산두(汕头) 주둔 포병련에서 참모로 활동했다. 1927년 12월, 광주봉기 당시 봉기군 교도퇀 제1영 군사고문으로 참가했고 봉기 실패 후 해륙풍근거지 건설에 참여했다.

1930년에 중공상해조선인지부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얼마 후 동북으로 돌아와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에 참가했다. 5월, 중공연변특별지부 위원이 되였고 10월에 중공동만특별위원회 통신련락부 부장이 되였다.

1931년 11월 24일, 조양천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여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주: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에 따르면 일제 패망 후 장춘에서 조선으로 돌아가 정권 건설에 참여하여 선후로 조선로동당 북청군 당위원장, 도시건설상, 사법상 등을 력임했으며 1954년 8월 18일 사망했다.)

(자료출처: ≪연변력사사건당사인물록≫,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

리용구(李容九, ?—?): 중공 동만특별위원회 교통처 처장

1931년 9월, 길림성 연길현 의란구에서 반제동맹과 농민협회에 참가하였으며 왕우구유격구 돌격대 대장을 지냈다. 후에 구국군, 산림대에 들어가 병사 쟁취 사업을 하였으며 1935년에 중공 동만특별위원회 교통처 처장이 되였다. 1936년에 쏘련으로 들어갔다가 1958년에 귀국하였으나 병으로 집에서 휴양하였다.

(자료출처: ≪동북항일련군명록≫)

리용국(李用国, 1904—1933): 공청단연화중심현위원회 서기, 중공왕청현위원회 서기

전일(全一), 전우(全友) 등이라고도 했으며 조선 함경북도 성진군에서 태여나 1915년에 부모를 따라 길림성 연길현 조양천 봉림동으로 이주했다. 룡정 은진중학교와 동흥중학교에서 수학했으며 중학교 시절에 사회주의 단체인 사회과학연구회에 가입했다.

1927년에 봉림동 일대에서 대동학교를 설립하는 한편 농민협회, 소년회, 부녀회, 청년회 등 대중단체를 결성했다. 이 무렵 고려공산주의청년회 만주총국에 가입하여 국자가지부에서 활동하였다.

1930년 6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8월에 공청단연화중심현위원회 설립에 참여하고 서기가 되였다. 1930년 10월, 공청단동만특별위원회 서기가 되였으며 1933년 5월 중공 왕청현위원회 서기가 되였다.

1933년 6월, 민생단원으로 지목되여 현당위원회 서기 직무에서 해임되고 11월에 왕청 마촌에서 억울하게 총살당했다. 해방후 중공왕청현위원회로부터 명예를 회복받고 혁명렬사로 추인받았다.

(자료출처: ≪연변력사사건당사인물록≫)

/박문봉 편저 《동북항일전쟁 조선족 인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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