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림신문 > 기획


[우리 민족 항일투사] 김영신-중공동만특별위원회 부녀위원

김정함 2023-08-23 14:24:48

제3편 동북항일련군 녀성 장교와 중공 각급 녀성 지도간부

1. 사급 이상 장령, 시와 지구급 이상 중공 지도간부

김영신(金英信, 1905—1932): 중공동만특별위원회 부녀위원

원명은 김영숙이고 1905년에 조선 평안남도에서 태여나 1910년에 부모를 따라 길림성 연길현 의란구 남동촌으로 이주했다. 1928년에 남동생 김이천과 함께 혁명단체에 가입한 후 마을녀성들을 각성시켜 혁명에로 이끌었다. 마을처녀들은 물론 아낙네들까지 선동하여 야학에 다니게 하였다.

1930년에 있은 동만 ‘붉은 5월 투쟁’에서 주구를 반대하는 투쟁에 앞장섰고 이 해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같은 해 8월 13일, 중공연화중심현위원회가 결성되자 제1임 부녀위원이 되였다. 그 해 10월, 중공왕청현위원회가 설립되자 중공왕청현위원회 제1임 부녀위원으로 파견되였다. 11월에 중공연화현위원회 조직부 부장 마준 그리고 중공왕청현위원회 제1임 서기 김훈의 지도하에 적들이 수시로 들이닥칠 위험에도 늘 대흥구, 신선동, 하마탕 등지에 내려가 반일 선전고동 사업을 수행했다.

1930년 겨울, 중공하마탕구위원회 서기 김상화가 체포된 김훈의 뒤를 이어 현당위원회 서기 직책을 이어받자 새로운 현당위원회의 지도하에 감조감식 투쟁, 주구청산 투쟁을 주도하였으며 유격대원들과 함께 당지 륙군대와 보위단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1931년 봄, 보위단을 습격하고 주구 청산 투쟁을 활발히 전개해가던 중 ‘대검거’에 걸려 연길감옥에 갇혔다. 감옥에 갇힌 후 신분이 아직 폭로되지 않은 조건을 리용하여 감방의 녀성들에게 항일의 도리를 선전하였으며 혁명승리에 대한 신심을 북돋우어주었다.

1932년 3월, 위만주국이 세워지면서 특사령이 내렸는데 그 때까지 신분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아 석방되였다. 감옥에서 나온 후 상급의 지시에 좇아 연길현 왕우구유격근거지로 가 중공동만특별위원회 부녀위원이 되였다. 이 시기 잇달아 불행이 덮쳐들었는데 귀여운 딸애가 병에 걸려 죽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던 남편 한별이 희생되였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1932년 11월, 화룡현 평강구로 내려가 항일근거지를 창설하며 반일병사 쟁취 사업을 다그칠 데 대한 중공동만특별위원회의 중요한 지시를 전달하였다. 약수동에 머무르며 사업을 지도하는 기간에 동지들과 더불어 화룡현당위원회와 평강구당위원회 그리고 여러 기관들이 륙속 어랑촌근거지로 전이하고 현내의 4대 구유격대의 장총대를 근거지에 집중시켜 통일된 현유격대를 조직하며 원 동북군벌의 군대 속에 깊숙이 들어가 반일병사 쟁취 사업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개할 데 대하여 널리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어 여러 혁명조직의 부녀간부들과 자리를 같이하고 근거지 창설의 새로운 정세에 맞게 부녀사업을 힘있게 추진할 데 대하여 지도를 하기도 하였다. 11월 30일경, 중요한 비밀암호를 지니고 문두찬 등과 함께 약수동을 떠나 장인강 도대구로 가다가 위만자위단을 앞세운 일본군 ‘토벌대’와 조우하여 부상을 당하고 희생되였다.

(자료출처: ≪동북항일련군명록≫)

/박문봉 편저 《동북항일전쟁 조선족 인물록》

编辑:김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