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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 항일투사] 리추악-중공주하중심현위원회 부녀위원

김정함 길림신문 2023-09-04 12:54:19

제3편 동북항일련군 녀성 장교와 중공 각급 녀성 지도간부

1. 사급 이상 장령, 시와 지구급 이상 중공 지도간부

리추악(李秋岳, 1901—1936): 중공주하중심현위원회 부녀위원, 중공연(수)방(정)특별지부 서기

원명은 김금주(金锦珠)이고 조선 평안남도 출신이다. 평양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부터 맑스-레닌주의 서적을 읽었고 1919년에 있은 3.1반일민족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1924년에 황포군관학교에서 교관으로 있는 남편 양림을 찾아 중국 광주로 왔다.

1925년 2월, 국민혁명군 제1차 동부원정선전대에 참가하였고 그 해 가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7년에 당조직의 파견으로 남편과 함께 쏘련에 가 모스크바 동방대학에서 3년 동안 공부하였다.

1930년에 중국으로 건너와 양림이 중책을 맡고 있는 중공만주성위원회 부녀부에서 사업했다. 이 기간 남편인 양림과 함께 동만, 남만 등지를 다니며 항일투쟁을 지도하였다.

1932년 가을, 양림이 중앙쏘베트구역으로 전근되여가자 중공만주성위원회의 배치에 따라 중공주하중심현위원회 부녀위원이 되였다. 낳은 지 얼마 안되는 아들을 한 농민에게 맡겼지만 아들은 돌도 차기 전에 병으로 요절했다.

1932년 가을, 농민들을 동원하여 9.18사변 1주년 기념 시위행진을 단행했으며 옷, 신, 식량, 탄약 등을 유격구에 날라갔고 구호대를 조직하여 부상병들을 간호해주었다.

1934년 8월, 중공연(수)방(정)특별지부 서기가 되였다. 일제가 합동지대(유격대)와 산림대에 대한 ‘토벌’을 감행하자 특별당지부를 이끌고 대중들을 지도하여 합동지대의 투쟁을 지원하였다.

자그만한 키, 가무스레한 얼굴에 늘 조선치마저고리 차림으로 다니는 그녀를 보고 당지 사람들은 한족이나 조선족이나 할 것 없이 그를 ‘쇼헤이리’(小黑李)라고 불렀다.

1935년 9월, 자기가 거주하고 있는 마을에 반일회, 부녀회, 아동단 등 조직을 설립하였고 반일모범대, 농민자위군, 반일청년의용군 등 대중무장조직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이런 조직들을 통해 많은 우수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주력부대에 보내주었다.

1935년에 조상지와 함께 중공중앙 ‘12.6지시편지’ 정신을 관철하기 위하여 산속에 들어가 산림대를 쟁취하는 선전교양사업을 벌렸다. 그리하여 일부 산림대와 공동항일협의를 달성하고 밀영을 그 산림 속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또 주민들과 전사들을 이끌고 산속에 밀영을 세우고 병원, 복장공장, 학교를 지었으며 산림대인 ‘인의’대를 쟁취하여 동북인민혁명군과 련합작전하게 하였다.

1936년초, 조상지와 련계를 맺고 통하특별당지부를 내왔으며 서기가 되였다. 통하에 온 후 장일지로 변성명하고 서북하와 북운방 일대에서 부녀반일회를 조직하였으며 골간청년들을 당에 받아들이고 항일련군에 보냈다. 짧디 짧은 반년 사이에 300여명이 참가한 4개의 반일회 조직을 묶어세웠고 여섯 가구를 서북하구로 이주시켜 제3군의 련락소를 마련해주었으며 항일련군부대에 많은 식량과 군수물자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통하반일회 규약 초안〉도 작성하였다.

1936년 8월, 적들은 전문 치안정숙선무반을 조직하여 그녀를 비롯한 혁명가들을 붙잡으려고 대량의 군령, 헌병, 특무들을 이 지역에 파견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반역자의 밀고로 놈들에게 체포되였으며 1936년 9월 3일 통하현 서문 밖에서 살해되였다.

(자료출처: ≪동북항일련군명록≫, ≪흑룡강당사인물≫)

/박문봉 편저 《동북항일전쟁 조선족 인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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