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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푸는 인생,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락

안상근 길림신문 2024-07-31 12:50:50

연길시로보복장유한회사 리사장이며 당지부서기인 황승호의 이야기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즐겁다는 황승호씨

연길시 장백산로에 자리잡은 사계절 양광소구역 3호 아빠트의 16층 10호실은 140여평방 되는 아늑한 가정식 공간이다. 이곳은 연변의 문인들이 부담없이 차 한잔 나누면서 문학을 담론하고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공유하는 문인들의 전속 아지트 같은 곳이다.

문인들마다 집 열쇠를 챙기고 제집처럼 드나들 수 있는 편리하고 쾌적한 활동공간인데 이 공간을 제공한 사람은 바로 연길시로보복장유한회사 리사장이며 당지부서기인 황승호(75세)이다.

그는 다년간 연변시인협회 등 여러 문화단체들에 행사자금을 후원하여 문인들이 각종 문학예술행사를 부담없이 진행할 수 있도록 물심량면으로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었는데 지금까지 각종 문학행사들에 근 20만원에 달하는 자금을 후원하였다.

황승호씨의 후원하에 펼쳐졌던 제1차 '시향만리' 문학상 시상식

이곳에는 연변시인협회, 연변아동문학협회,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 연변시랑송협회 등 다양한 협회 회원들의 발길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김응준, 리상각, 림원춘, 한석윤, 김기형 등 이미 작고한 문인들의 발자취도 남아있는 력사와 이야기가 깃들어있는 곳이기도 하다.

김응준 리상각 한석윤 등 이미 작고한 연변의 로문인들과도 정분이 깊었다

연변의 유명한 작사가인 허동철선생은 성공한 기업인인 황승호 회장이 문인들과 어울려 만년을 즐겁게 보내면서 다년간 지속적으로 물심량면 우리 문화의 발전을 위해 념려하고 힘써주는 그 마음과 행실이 무엇보다 보귀하고 또 갸륵하다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함께 하는 세월입니다. 그래서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 삶의 락이지요.”기자를 만나 황승호씨가 첫마디로 건넨 솔직한 고백이였다.

황승호씨는 어찌보면 연변의 복장업계에서 성공한 기업가이다. 그러나 성공한 기업인이기에 앞서 그는 50년이 넘는 당령을 가진 로공산당원이였고 8년간이나 부대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끈질긴 군인정신이 돋보이는 퇴역군인이였다.

고향이 화룡시 서성진 북고성촌인 황승호씨는 1968년 2월에 참군하였다가 부대에서 8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1976년 3월에 퇴역하였다. 참군한 지 2년도 안되는 1970년 5월에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그는 지금까지 이미 당령이 55년에 달해 ‘영광스러운 당생활 50년’영예메달도 탔다.

1976년 3월 부대에서 퇴역할 때 남긴 기념사진 (앞줄 가운데 사람이 황승호씨)

황승호씨는 군에서 퇴역한 후 연변공로기계공장과 연길시아동복장공장, 연길시로보복장공장 등 기업들에서 기계대 대장, 공회주석, 당지부 부서기, 공장장, 당지부서기 등 요직들을 력임하면서 우수한 기업인으로 성장했다. 특히 그는 기업 기제전환의 동풍을 빌어 집체기업이던 로보복장공장을 국유기업으로 전환해 기업에 생기를 불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종업원들의 의료보험, 난방비 등 여러 면에서 복리와 대우를 향상시켜 환영을 받았다. 후에는 또  경기가 어려운 기업을 대담히 도맡고 다년간의 끈질긴 노력과 수완으로 기업을 우수한 사영기업으로 탈바꿈시키였다. 지난 2005년부터 지금까지 근 18년 동안 황승호씨는 함께 생사고락을 나눈 90여명의 종업원들을 잊지 않고 여러 면에서 그들의 생활을 관심하고 도와주었을 뿐만 아니라 기업기제가 바뀐 후에도 각종 복리대우를 지속적으로 견지하여 종업원들의 찬사를 받았다.

황승호씨가 회장을 맡은 연변복장협회의 성원단위인 중한민족복장학교  

현재 그가 운영하고 있는 연길로보복장유한회사 당지부에는 31명의 당원들이 있는데 종업원들이 병환에 있거나 명절, 경조사 때면 위문품과 위문금을 잊지 않고 전달하면서 훈훈한 직장동료의 정과 따뜻한 사랑을 잊지 않고 있다. 그래서 많은 종업원들은 재직에 있을 때나 퇴직한 후에도 항상 “우리네 황공장장이 최고지요.”라고 하면서 엄지손가락을 내흔들고 있다.

연변복장업종계통의 로당원들과 함께 당생일 경축

현재 황승호씨는 연길시로보복장공장 리사장과 당지부서기 직책이 있는 외에도 연변복장업종협회 회장, 연변시인협회 고문, 35퇀 전우회 고문 등 다양한 사회직책도 가지고 있다.

해마다‘8.1’건군절이 다가오면 그는 한전호 속에서 싸우던 전우들을 요청하여 퇴역군인 건군절 기념행사도 조직하고 있었다. 최고로 80명이나 되는 퇴역군인들이 모인 건군절 기념행사까지 조직한 적도 있다. 그동안 황승호씨가 건군절 기념행사에 지원한 사비도 8만원이 넘는다.

2012년 전우들과 함께 퇴역전 련대를 찾아서 남긴 기념사진(앞줄 왼쪽 세번째가 황승호씨)

“내가 다른 사람을 도우면 나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때가 있는 법입니다. 남을 돕느라면 자연히 나에게도 좋은 일이 생기기 마련이지요. 그렇게 더불어 사는 세상에 서로 도움주고 또 도움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인생의 조건이라고 봅니다.”그는 자신이 시송일관 견지하고 있는 베풀어가는 삶의 신조를 이렇게 해석하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젊은 시절의 군인생활 8년은 그에게 끈질긴 의지와 강인한 성격을 양성해주었다. 그는 자신은 군인성격이라면서 특히 ‘끈질기다’는 말로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했다. 하고자 하는 것은 꼭 해내고야 마는 견인력과 끝을 보고야 마는 정신, 그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무슨 일이나 ‘고추장 맛보기’로 이것저것 가리고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지금은 달나라까지 올라가는 세월인데 무슨 일인들 못하겠느냐.”고 하면서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군 한다.

“무릇 정확하고 정의적인 것이면 꼭 해낼 수 있습니다. 드팀없이 밀고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저의 다년간 사업성공과 삶에 대한 태도 그리고 신조입니다. ”

70대 중반의 문턱에 올라선 지금도 황승호씨는 자가용을 직접 능숙하게 운전하고 다니면서 여러가지 일처리들을 젊은이들 못지 않게 척척 해내는 멋진 로익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회를 위해 좋은 일을 하다가 가야 합니다. 그것이 제가 바라고 있고 또 열심히 실천해가고 있는 삶의 락이고 여생의 꿈입니다.”황승호씨는 이 말을 입버릇처럼 외우군 한다. 

/안상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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