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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돈끼호떼 ‘미쳐서 살고 제정신에 죽다’

김가혜 길림신문 2024-08-21 11:11:49

◆ 안녕

‘돈끼호떼’라고 하면, 어린 시절 교과서에서 읽었던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미치광이 정도로 기억된다. 이제서야 정식으로 원작을 완독하게 되였다. 매번 사고 치고 얻어 터지는 주인공의 에피소드들에 혀를 끌끌 차면서 말이다. 그러나 결말과 함께 책을 덮는 순간, 세차게 뛰는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한참을 설레야만 했다.

◎ 독서에 미쳐도 좋아

라만차 지역의 한 마을에 사는 이달고(하층귀족) 알론소 키하노는 기사소설에 너무 빠져든 나머지 분별력을 잃고 만다. 몸소 세상에 정의를 내리고 불의를 타파하며 약자를 돕겠다는 원대한 꿈을 세우고 실현하기 위해 모험에 나선다. 기사가 되기 위해 이름부터 기사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돈끼호떼 데 라만차’로 고친다. 그리고 이웃마을의 촌부 알론사 로렌소를 사랑하는 녀인으로 정하고 ‘둘시네아 델 토보소’라는 이름의 공주, 귀부인으로 격상시킨다. 그다음 증조할아버지로부터 대물림받은 낡은 갑옷으로 무장하고 ‘로시난테’라 이름 지은 비쩍 마른 말을 타고 모험에 나선다.

독서에 너무 열광한 나머지 정신이 돌아버린 사람, 이런 설정에 멈칫해진다. 독서는 위험하다? 과연 기사소설에 미쳐버린 주인공을 비웃어야 할가? 현실이 메마르고 허무하게 느껴질 때 불가능에 도전한다는 것, 멋지지 않은가? 나는 종종 ‘독서가 고프다’. 끼니가 되면 배가 고프듯 멘탈이 바닥 나면 책이 땡긴다. 그리고 독서를 통해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돈끼호떼를 웃었지만 그에 공감하고 있는 나를 보았다.

◎ 꿈은 항상 가능하다

모험을 위해 우습강스러운 모습으로 길을 나설 때 돈끼호떼의 나이가 쉰에 가까웠다고 한다. 작품이 씌여진 17세기 초반(참고로 《돈끼호떼》제1부는 1605년에, 제2부는 1615년에 발표되였다.) 의 인구수명으로 치면 한심한 로인네라고 보아야 할 나이였다. 첫 모험에서 만신창이가 되여 돌아오지만 몸을 추스리고 나서 산초 판사라는 농부를 설득하여 종자로 삼고 다시 길을 떠난다. 

그리고 두번째 모험에서 돈끼호떼를 구원하고저 온갖 애를 쓴 같은 마을의 신부와 리발사에 의해 달구지에 실려 귀향하지만, 또다시 산초와 함께 세번째 모험을 나선다.

삶이 종말에로 치닫는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한다고 하면 다들 말리기 마련이다. 작품 속 한 마을에 사는 신부와 리발사도 돈끼호떼를 광기로부터 끌어내고저 책들을 다 불태우고 서재를 벽으로 막아버리기까지 한다. 우리는 종종 ‘이 나이에’라는 말을 많이 한다. 꿈을 향한 도전이 젊은이들의 특권이기라도 한듯 말이다. ‘아직 젊었을 때’ 도전하라고 지나온 사람 립장에서 조언도 자주 한다. 하지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현실에 안주해야 한다는 핑게가 아니라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도전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점점 작아져서 ‘때가 지났다’고 판단할 뿐이다. 앙리 베르그송은 ‘넘어지는 것은 물론 똑같다. 하지만 한눈을 팔다가 우물에 빠지는 것과 별만 바라보다가 우물에 빠지는 것은 다르다. 돈끼호떼가 열심히 보았던 것은 바로 별이다. 이 공상과 망상의 정신이 추구한 웃음의 깊이는 얼마나 심오한가’라고 말한다. 돈끼호떼의 도전은 세번 다 실패로 끝난다. 

그러나 제1부에서 온갖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치고 다니던 돈끼호떼가 제2부에서 온 세상이 다 아는 인물이 되여있다. 물론 미치광이로 알려졌지만 말이다.

◎ 내안의 ‘돈끼호떼’를 깨우라

《돈끼호떼》를 다 읽고 나면 갑옷 차림에 말을 탄 ‘슬픈 몰골의 기사’ 돈끼호떼와 그 뒤를 따르는 작달막하고 뚱뚱한 종자 산초의 모습이 떠오른다. 

돌아가는 풍차를 거인이라며 덤비고 두무리 양떼를 군대라고 하며 돌진하는 돈끼호떼, 갤리선으로 끌려가는 죄수들을 해방시키고 되려 죄수들의 돌팔매질에 만신창이가 되는 돈끼호떼, 객주집에서 포도주가 가득찬 가족부대를 칼로 찔러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돈끼호떼, 우리 안의 사자를 풀어 놓으라 호령하며 당당하게 야수를 마주하던 돈끼호떼… 산초가 아무리 애걸하고 말려도 그는 막무가내이다. 이런 하나하나의 생동한 화면들로 참 많은 웃음을 안겨주었다. 그렇게 웃고 웃다가 어느 순간 가슴 뭉클한 감동이 찾아온다. 

세번째 모험에서 돌아온 돈끼호떼가 다시 평범한 인간 알론소 키하노가 되여 죽음을 맞이한다. 어서 일어나 기사로 모험을 찾아 다시 나가자며 오열을 터뜨리는 산초와 함께 내 안에 넘쳐드는 슬픔을 마주하게 되였다. 현실의 거대한 벽 앞에서 나약하게 죽어가는 인간적인 모습이였지만 용기 넘친 질주로 가득찬 삶이였기에 아쉬움이 더 짙었던 것 같다. 

우리는 항상 우유부단한 햄리트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나이가 들수록 앞뒤를 재고 리해득실을 계산하고 후과를 감당할 용기가 없어서 망설이고 배회한다. ‘단호한 한명의 돈끼호떼가 주저하는 아흔아홉의 햄리트를 이끌지도 모른다’고 한다. 모두가 인정하는 똑똑이로 살고저 현실에 길들여진 채 ‘나 자신’이기를 포기할 것인지, 온 세상이 비웃더라도 꿋꿋하게 자아를 고집하는 돈끼호떼로 살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시간이다.

하이데거는‘인간은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라고 말한다. 어차피 한번의 인생이다. 뮤지컬 <이룰 수 없는 꿈>(the impossible dream)의 가사처럼 한번쯤은 ‘감히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감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감히 닿지 못할 밤하늘의 별을 향해 두 팔을 뻗쳐보는’ 건 어떨가? 

치렬하게 달리다 간 삶은 아름답다!

编辑:안상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