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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기의 무차별 폭격속에서 전우들을 지켜

정현관 길림신문 2024-12-16 14:56:42

[로병사의 이야기](7)

적기의 무차별 폭격속에서 전우들을 지켜

―지원군 방역대대 부패장 김영자 로병사 만나보다 

김영자로병사의 집 거실 벽에는 당기가 당대표대회 등 중요 행사 기념사진과 함께 걸려있다. 

15살에 위생병으로 군 생활 시작, 18세에 항미원조 방역대대 부패장, 21살에 입당, 퇴역후 화룡현병원과 제1자동차공장병원 등 일터에서 간호장, 소아과 주임의사에 이르기까지 한 평생을 조국의 의료사업에 헌신, 퇴직후 공익사업에 투신하여 70여명 불우이웃 아이들을 방조. 

중국제1자동차그룹 제14기 당대표대회 유일한 퇴직 당대표, 전국 리퇴직간부 선전개인으로 중앙조직부 표창......

겹겹이 쌓인 영예증서들과 객실 창문가에 세워져 있는 한폭의 붉은 당기가 근 한세기를 걸어온 91세 김영자의 삶의 궤적이자 기록들이다. 이 또한 당에 대한 그녀의 무한한 충성심을 보여주고 있다.

15세 소녀위생병

1933년, 연길현 제4구 동성향(현재의 화룡시 동성진) 광명촌에서 3녀3남중 둘째로 태여난 김영자는 열다섯나던 1948년에 현과 투도구(현재의 투도진)의 두개 중학교의 입학시험에 동시합격을 했다. 열다섯 어린 나이에 그녀는 배움에 대한 열망이 불타올랐으나 학비로 식량 15말을 내놓을 수 없었던 가정 여건으로 인해 부득불 학업을 포기해야만 했다. 

젊은 시절, 군복 차림의 김영자

마침 심양군구 제3륙군병원에서 향에 위생병을 모집하러 내려왔고 김영자는 그해 11월에 의연히 중국인민해방군에 참가하게 되였다. 

“당시 연변에서 처음으로 녀군인을 모집했습니다. 처음 부대병원에 배치 받을 때가 해방전쟁시기이다보니 주당위 옛터에 자리 잡은 부대병원에는 부상병들이 엄청 많았습니다. 그중에서 두 다리가 절단된 환자들은 그나마 어린 위생병들에게 업혀 화장실에 갈수 있었지만 사지가 모두 절단된 환자들은 위생병들에게 안겨서 화장실에 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뒤처리까지 어린 위생병들이 해줘야 했습니다.”조국의 해방사업을 위해 희생을 아끼지 않았던 수많은 부상병들을 돌보면서 그들에 대한 경의와 안타까움이 함께 밀려왔다고 김영자는 말한다. 

“그때 저의 키가 162센치메터였습니다. 녀위생병중에서 그나마 몸집도 있고 힘도 있어 비록 녀전사지만 남자들 못지않게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덕에 병원에서는 저를 인차 승진시켰습니다.” 부대병원에서 근무하는 2년 남짓한 기간에 김영자는 어엿한 ‘로전사’로 성장했고 부반장을 거쳐 반장(현재의 고급간호사)으로 승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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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이 항미원조전쟁에서 세균전을 실시한다는 소식이 후방에까지 전해졌다. 당시 조선어, 중국어,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는데다 2년 남짓한 부대병원 근무경험까지 있었던 김영자는 항미원조전쟁에 나가 꼭 나라와 인민을 위해 적들과 싸우고 싶었지만 당시 병원에서 관련 배치가 없어 혼자서 속만 태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1951년에 드디여 항미원조에 지원하라는 상급부문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녀는 즉시 신청했다. 

18세 방역대대 녀성 부패장

1951년 3월, 김영자는 로녕성 무순시에서 3개월간 방역업무를 학습하는 동안에 당시의 전쟁형세에 대해서도 다소 료해했다. 학습이 끝날 무렵에 김영자는 동북군구 후군위생부 모 방역대대의 부패장으로 임명되여 부대원 72명을 인솔하게 되였다. 당시 패장을 임명하지 않았기에 김영자는 패장이나 다름이 없었다.

“단동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상하구(上河口)역이 있었는데 그 맞은켠은 조선 청수입니다. 두 곳은 큰 산을 사이두고 있었고 철도 턴넬이 있었습니다. 제가 갔을 때는 압록강 철교가 미군의 폭격에 의해 끊어졌고 모든 물자와 인원들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상하구역을 통해 조선으로 이송되였습니다.”라고 김영자는 회억했다.

상하구에 도착하여 주요하게 책임졌던 업무는 중, 조 량국을 오가는 지원군 전사들의 백신접종 상황을 점검하고 건강증을 발급하는 일이였다. 김영자는 부대병원과 학습반에서 배운 탄탄한 방역지식과 그동안 련마한 지휘협조능력을 발휘하며 불철주야 방역임무를 원만하게 완성해나갔다. 

지난 세기 60년대초, 김영자 부부(뒤줄 오른쪽)가 부모 등 가족과 함께

1952년 9월 30일 밤, 공화국 창건 3주년을 맞으며 국가에서 제1선 군인들에게 국경절 물자를 보내 주었다. 그 바람에 군인들이 그동안 고도로 긴장했던 탕개를 잠시 느슨히 하고 있었다. 칠흑같이 캄캄하던 상하구역전 근처가 특무들이 갑자기 쏘아올린 조명탄으로 인해 사방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금세 미군 비행기가 상공에 떠오르더니 무차별 폭격을 해댔다.  

“거의 2분에 한번씩 미군 폭격기가 포탄을 떨어뜨리는 것 같았습니다. 련속 다섯시간을 쉴새없이 그렇게 폭겼했지요.”

마침 당직을 서고 있던 김영자는 즉시 심양에 있는 동북군구에 이 위급한 상황을 보고했다. 상급 부문에서는 상황에 따라 부대원들을 안전지역으로 이동시켜라는 명령을 보내왔습니다.” 김영자는 폭격을 당할 위험도 무릅쓴채 촌민들 집에 몇명씩 나뉘여 밤잠을 자고 있는 전우들을 일일이 찾아 깨워서 방공시설로 대피시켰다.

날이 밝아 폭격현장으로 가보니 원래 헐망하던 초가집들은 거의 다 허물어졌고 도로도 모두 파괴된 상황이였다. 다행히도 부상자들은 한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김영자는 72년전의 그날 밤을 생각하면서 놀란 가슴을 눅잦혔다. 

퇴역후 간호장, 주치의사로

1954년, 전우들과 함께 상급부문에서 맡겨준 전쟁시기의 방역임무를 원만하게 완수한 김영자는 집체 2등공을 받고 입당까지 하였으며 같은 해에 제대했다.

그녀는 심양시제4병원 외과 간호사, 무한시제1병원 수술실 간호장, 무한군구(하남) 포병부대 간호장으로 근무하다가 1963년에 불혹의 나이에 귀향하여 화룡현병원으로 전근했다. 그녀는 총간호장으로 근무하면서 내과, 외과 수술대에서 수많은 환자들을 구해냈다. 

책장을 가득 메운 수많은 상장과 기념장들이 평범하지 않은 김영자의 인생을 대변해주고 있다.

1973년에는 길림성병원 소아과에서 8개월간의 연수기회를 가졌다. “전례가 없었습니다. 연수생 신분으로 선진개인까지 되였고 연수생 대표로 성병원의 당대로 선거되여 당대표대회에까지 참가했습니다.”

1976년 5월에 장춘제1자동차공장병원으로 전근한 그녀는 그동안 3009부대병원과 장춘아동병원에서의 연수를 거쳐 닦은 기량을 바탕으로 소아과 주치의사를 맡았으며 1985년에 정처급 대우를 받으며 리직했다. 

리직후에도 당과 나라 위해

최근, 김영자로인의 집을 찾은 취재진의 첫눈에 들어오는 것은 거실 벽에 걸려있는 당기였다. 김영자는 “저는 날마다 저 당기를 바라보면서 중국공산당의 일원임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신앙을 더 확고히 다지며 초심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라고 말한다.

중공중앙 조직부로부터 발급받은 전국 리퇴직간부 선진개인 상장

무슨 일에서나 “당원은 항상 앞장서 당과 나라에 헌신하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당원은 나이에 관계없이 ‘일’을 하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는 김영자로인의 말이다. 

김영자는 말한 대로 실천함으로써 주변 사람들의 귀감이 되였다. 

장춘시자동차구조선족로인협회 제1기, 제3기 회장을 맡은 적 있는 김영자는 2008년 문천대지진 발생후 선뜻 특수당비로 3만원을 바쳤고 2010년 옥수대지진 발생후에도 1만원, 연변 특대홍수 발생후 또 1만원을 바쳤다......

김영자할머니도 퇴직금으로 생활하는 평범한 리직간부로서 기부금은 모두 평소 퇴직금에서 한푼 두푼 모아온 생활비다.

“내가 입당한 것은 바로 인민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서입니다. 국가가 어려움을 겪고 인민이 재해를 입었을 때 절대 방관해서는 안됩니다. 비록 재해지역에 가서 직접 힘을 보탤 수는 없지만 재해지역의 군중들을 위해 기부금을 보내는 것은 70년 당 년한을 가진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의 유용한 인재로 자라날 수 있는 애들이 가난한 가정형편 학업을 이어가지 못하는 것은 국가의 손실일 뿐만 아니라 아이의 일생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김영자는 대학에 합격했지만 가정생활이 어려워 중도포기하려는 학생들을 보면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며 서슴없이 경제적 지원을 주었다.

김영자가 받은 각종 기념장

“나는 길림일보, 장춘일보, 길림신문 등 신문간행물을 정기주문해 보았습니다. 지난 세기 90년대, 한번은 신문에서 빈곤가정의 아이들이 학업을 마치도록 구조하는 자선활동을 알게 된 후 직접 공공뻐스를 두번 갈아타고 장춘시자선총회를 찾아가 천원을 기부했습니다. 그때 저의 몇달치 리직로임에 해당하는 금액이였죠.” 

이 일을 계기로 김영자는 한족, 만족, 몽골족, 조선족 등 여러 민족의 도합 74명의 빈곤학생을 지원했는데 지원금은 무려 20만원에 달한다.

“나의 변천사를 보면 중국공산당의 위대함을 알 수 있지요. 1985년 리직할 때 퇴직금이 111원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근 1만원 됩니다. 거의 90배 성장한 셈이죠. 이 얼마나 설복력이 있는 실례입니까?!”라고 말하는 김영자로인은 “항상 조국과 인민을 위해 바친 로일대들의 로고와 희생을 잊지 말고 오늘의 평화로운 조국에 감사하며 조국에 충성하고 더욱 큰 기여를 하기를 바랍니다.”고 후대들에게 당부했다.

/길림신문 유경봉, 정현관, 오건 기자


编辑:유경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