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라고 부르고 싶은 형
정현관 길림신문 2024-12-23 10:35:34설날이 다가오니 내가 살고 있는 대련시 종로거리에 장사군들이 한참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아빠엄마의 품에 안겨 이것저것 사달라고 조르는 조무래기들의 모습들이 또한 멋진 풍경을 이루고 있다.
“아빠, 나 연을 띄우고 싶어요. 저 꼬리가 긴 연을 사주세요.”
“아빠, 나 로라스케트를 사고 싶어요. 빨리...”
“아빠, 저기 공원놀이 가자요.”
광장 벤치에 앉아 부모들의 손을 잡고 이것저것 사달라고 떼쓰는 어린이들을 물끄러미 보노라니 설 때마다 잊혀지지 않는 고향의 친인들, 특히는 아버지못지 않게 온 가족의 중임을 떠멨던 큰 형이 다시 한번 머리속에 떠올랐다.
1952년 7월, 흑룡강성 목단강시 동녕현 삼차구에서 회계로 일하시던 아버지가 병마에 3년간 시달리다 약 한첩 써보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나셨다. 때 이른 서리가 38세밖에 안되는 어머니의 머리를 하얗게 물들였고 차오르는 슬픔과 고생은 찰거마리처럼 어머니의 뒤를 따랐다.
집안 식구를 먹여살리려고 홑치마바람으로 정미소에 가서 왕겨를 채에 쳐 싸래기를 얻어오는 어머니의 고생을 차마 눈뜨고 볼수 없었던 큰 형은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마을로 돌아왔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빨리 철이 든다.”는 말이 있듯이 그때 형님의 나이가 17세밖에 되지 않았지만 온 가족의 중임을 떠메기 시작했다. 공수를 하나라도 더 벌려고 톱밥이 휘날리는 목재판 일과 남들이 꺼려하는 채석장 발파 일도 서슴없이 찾아갔다. 형은 집에 있을 때면 아버지마냥 빈틈없이 나를 보살폈다. 생산대의 고된 로동에 몸이 지쳤어도 집에 돌아오면 동네 아이들과 눈싸움을 하느라고 푹 젖은 솜신을 형은 또 부뚜막에 앉아 말려주었다. 공사(향)의 농기수리공장에서 종업원으로 있을 때 배급받은 새 작업복을 나에게 주고서 자신은 낡은 작업복을 수선해 입었다. 그것도 5년이나. 외출을 갔다오면 언제나 공책, 연필 등 학용품들을 사다주었고 동네 결혼, 환갑 잔치에 갔다오면 항상 사탕, 과자를 가져다 나의 베개밑에 놓아주었다.
형은 아버지못지 않게 나의 생활 구석구석을 보살펴주었지만 부정행위에 대해서는 한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내가 중학교 2학년을 다닐 때였다. 생산대의 모내기 일을 도와주는 활동에 참가하게 되였다. 공수를 더 벌려고 남이 보지 않을 때 포기 사이, 줄 사이 간격을 늘게 꽂았다. 때마침 써레질을 하다가 나의 모내기를 유심히 지켜보던 형이 나를 불러놓고 호되게 꾸짖었다. “셋째야, 사람은 항상 허위를 부려서는 안된다. 이렇게 늘게 모를 꽂으면 어떻게 높은 산량을 거두겠니? 당장 다시 꽂거라.”왁짝 떠드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박대장이 허허 웃으면서 “됐소. 어린 나이에 잘못을 할 수도 있지...”라고 말했으나 형은 무참을 당해 눈물이 글썽한 나의 손목을 잡고 다시 모내기를 해나갔다.
세월이 흘러 형님이 우리 곁을 떠난지도 26년이 된다. 형은 갔어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한점 없이 살았던’ 형님과의 추억들은 언제나 나의 뒤받침이 되여주고 있다.
“아버지!” 라고 부르고 싶은 형, 저 하늘나라에서 편안히 계셔요.
/대련 리삼민
编辑:유경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