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원수기] 교정의 멜로디
김파 길림신문 2025-02-19 13:19:02“젊은이들은 희망에 의해 살고 늙은이들은 희망(추억?)에 의해 산다”고 내 나이 일흔중반을 넘으니 과거사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것을 금할 수 없어 다시 펜을 들었다.
1956년 8월 초, 내가 소학교에 입학하던 그날 어머님은 누룽지 한줌을 책보자기에 넣어 주면서 배고프면 꺼내 먹으라고 하셨고 아버지는 학교에 가거들랑 선생님을 만나면 깍듯이 인사 드리고 선생님 그림자조차 밟아서는 안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상학종이 울리였다. 아래우 흰저고리 치마 소복단장한 쌍태머리 어린 처녀선생님이 입에 호각을 물고 “호르륵 호르륵” 불자 학생들은 벌떼마냥 교실로 뛰여 들어갔다. 그 처녀선생님은 갓 돈화2중 초중을 졸업한 애숭이 선생님, 랑랑 18세도 안되는 김순희선생님이시였다.
2년이 지나 교정의 종소리는 레루장으로 변신하였다. 그 당시 교장겸 조문교원이시던 천창범선생님께서는 손에 자그마한 마치 하나를 달랑 들고 “땡-땡-땡” 세번 울리면 학생들은 우르르 교실로 들어갔고 “땡-땡” 두번 울리면 하학종소리였다.
1960년 8월, 우리 집은 당시 돈화시 흑석공사에서 당위 선전위원으로 사업하셨던 아버지를 따라 흑석공사 안락촌으로 이주하였다. 내가 5~6학년을 다닐때, 상학시간을 알린 것은 폭탄종소리였다. 교장 조봉구선생님이 마차를 삯내 가지고 3305병기공장에 가서 헐값으로 사온 일본군이 버리고 간 속이 빈 폭탄, 길이가 한메터 반, 변두리가 반아름도 넘는 종이였다. 한번 울리면 온 마을을 쩌렁쩌렁 울렸던 종소리였는데 조봉구선생님께서 항상 자그마한 철라사로 치던 종이였다.
1962년 8월 초, 내가 돈화2중 초중부에서 공부하던때는 아츨한 전기벨소리였다. 3년간 이 벨소리와 동반하면서 우리는 지식을 배웠으며 사람의 됨됨이를 가르침 받았다.
1968년 7월, 내가 연변한어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배치받은 곳은 돈화현 흑석공사 만복소학교였다. 상학시간이 되면 당시 교장이였던 려흥복(吕兴福)선생님은 징을 들고 막대기에 붉은 비단을 묶은 것으로 세번 울려 상학을 알리였으며 두번 울려 하학을 알리였다.
1969년 2월, 내가 모교에 돌아와 흑석공사 제2완전소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그때는 여전히 폭탄종소리였다. 1974년 3월, 돈화2중에 조동되였을때도 여전히 전기벨소리였다.
2009년 7월, 나는 42년 교원직을 마무리하고 정년퇴직하였다. 집에서 조용히 글을 쓰고 있노라니 가까운 돈화5중에서 울려오는 교정의 종소리 ㅡ 은은한 음악소리가 들려온다. 바로 상학과 하락을 알려주는 종소리였다.
교정의 멜로디는 호각소리로부터 레루장소리, 폭탄종소리, 벨소리, 징소리, 나중에는 음악소리로 탈바꿈하였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교정의 멜로디속에서 자랐고 지식을 배웠으며 참된 인간으로 성장하였다.
이같이 성스러운 민족교육사업에 몸을 잠궈 평생을 고스란히 헌신하신 이는 그 얼마였던가! 그때 나를 가르쳐주셨던 은사님들은 하나둘 선학을 타시고 저 멀리 하늘나라에 가 계신다.
또 그동안 맺혀진 사생지간의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은 그 얼마였던가!
사람들은 흔히 오늘날의 학생은 그제날 교원생명의 계속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후배들은 지금도 역시 초심을 잊지 않고 떳떳이 이 성스러운 초소를 지켜나가고 있다. 문화는 민족의 얼이라고 했거늘, 황혼기에 들어선 필자는 동년배와 마찬가지로 민족의 얼이 영원하기를 기원한다.
/천재만
编辑:안상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