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그물망 사이로 흐르는 인연
길림신문 2025-04-15 15:48:47(서란)배영춘
바다에 던져진 그물은 고기를 잡기도 하고, 때론 파도에 휩쓸려 허망하게 돌아오기도 한다. 인연도 그러했다. 단단히 묶어둔 줄 알았던 매듭이 어느새 손끝 사이로 스르르 흩어질 때, 나는 그물망 사이로 빠져나가는 물고기를 떠올린다. 잡힐 듯 놓칠 듯 흔들리는 것이 인간의 정은 어쩌면 인생은 그물을 던지고 놓치는 일의 반복 속에서 빚어지는 것 같다.
어릴 적, 아버지는 “은혜는 돌아오길 기다리지 말고 네 발로 찾아가라.”고 하셨다. 그 말씀은 지금도 내게 울림으로 남지만, 정작 나는 밀물과 썰물 사이를 맴도는 빚진 마음을 품고 산다. 중학교 2학년떄의 가을, 마을에 중학교가 없어지면서 모두 시내 중학교로 전학할 때였다. 가정 형편이 여의치 않아 전학을 포기하려던 나를 담임 선생님이 붙잡았다.
“ 너의 눈빛에서 나는 희망을 보았다”며 길림시‘3호학생’선발을 추천해 주셨다. 서란현 전체 학교에서 단 6명만 뽑는 그 상을 선생님께서 나에게 주시며 시내 중학교로 가라고 여러모로 도와주셨지만 그러지 못했다. 결국 나의 세월은 모래알처럼 손 틈새로 사라졌다. 선생님께 편지 한 장, 작은 선물 하나 보내지 못한 채 지금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받은 만큼은 돌려주지 못해도 잊지 않고 있는 걸 보면 은혜란 갚는 것도 중요지만, 허락되지 않는 여건속에 마음에 모시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봄비가 어깨를 적시던 동대문 시장 골목길에서 우연히 만난 그 사내가 백발이 성성한 로인으로 변했지만 나는 단번에 알아봤다. 변변치 않은 걸음으로 과일 가게에서 일을 하는 걸 보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사회에 첫발을 떼고 사업을 하던 시절, 그는 경쟁자로서 나를 많이 괴롭혔던 사람이였다. “실례합니다만....”조심스레 입을 열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눈동자엔 내 존재가 없었고 내가 누구인지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 오랜 시간 품었던 원한이 바다물에 녹아내리는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무너졌다. 어둠을 손에 쥐고 있으면 손바닥만 검어지는 법이다. 원한은 숯을 품고 타는 것과 같아 오로지 나만 재더미로 만들 뿐이였다. 그날 나는 비로소 손을 폈다. 쥐였던 것을 내려놓으니 바다바람에 간직했던 소금기마저 씻겨 나가는 것 같았다.
사람을 만나면 흔히 약속처럼 “다음에 밥 한 끼 먹자”는 말은 가장 가벼운 작별 인사가 됐다. 초년엔 서운함이 밀려왔지만 이젠 알 것 같다. 모두가 자신의 파도와 썰물에 치여 사는 삶, 기대를 내려놓을 때 관계의 무게가 편안해진다는 것을 알았다. 친구가 약속을 잊어도 “그럴 수 있지” 웃으며 넘기게 된 것도 그런 깨달음 때문이다. 진정한 우정은 오래 묵혀도 신맛 나지 않는 술처럼, 때로 잊혀도 다시 돌아온다. 련락이 뜸해진 친한 친구가 문득 “왜 소식이 없냐?”며 찾아올 때면 그 사이 흘러간 시간마저 관계의 깊이로 스며드는 것을 느낀다.
작년 겨울, 대림 지하철역 플랫폼에서 우연히 만난 한 친구가 나를 알아보더니 “너처럼 련락 없는 사람은 처음이다.”며 열띤 포옹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 친구와 련락처는 주고 받았지만 두 번 만남 없이 두 달 만에 중국으로 돌아갔다. “우린 서로의 계절을 지나쳤나 봐”라는 마지막 문자가 계절의 끝에 외롭게 빛났다. 처음엔 아쉬웠지만 이제야 리해한다. 맞지 않는 이들을 보내 주는 것도 서로에 대한 배려임을 알았다. 그물에 걸리지 않고 흘러간 물고기처럼 반짝이는 비닐만 남기고 자연스럽게 헤어지는 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단칸방 밥상우의 노트북을 두드리다가도 10년 넘은 랭장고 우르릉거림에 문득 정신이 든다. 밤이면 시끄러워 잠 못 잔다며 안해가 새것을 사자고 할 때마다 “아직 잘 돌아 가잖아” 버티는 내 모습에서 인간관계를 생각해 본다. 동창회에서 만난 친구와의 대화는 예전과 달리 틱톡 숏폼 처럼 짧아진 연설 같았다. 옛정은 추억의 향기로 남기고 지금의 내게 필요한 건 창문을 활짝 열어 쏟아지는 신선한 공기 같은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류통기한이 있다면 그것은‘변화’일터, 낡은 그물을 버리지 않으면 새로운 어획을 담을 수 없듯이 말이다.
오랜만에 홀로 커피숍에서 노트북을 두드리며 내 커피와 남의 커피를 바라보며 생각해 본다. 어차피 내 잔의 쓴맛 커피는 내가 마셔야 한다는 것을, 남의 설탕을 타도 결국 내 인생의 주인은 나 자신임을 알아야 한다. 그물에 걸리지 않고 흘러간 인연들도 그물 자체가 아닌 바다를 더 크게 보게 하는 밑밥이었다는 것이다.
바다가 밤새 그물을 털고 새날을 맞이한다. 허물어져도 좋다. 파도는 이미 새로운 그물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니까,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놓친 것들의 그림자로 오늘을 빚으며 내일을 기다리는 손길을 뻗어보리라. 어차피 새로운 그물은 파도우에 또 펼쳐지니까.
编辑:안상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