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는 그들이 있기에 안심된다!
정현관 길림신문 2025-04-18 10:22:52---룡정시 학서촌 촌주재 공작대 간부들의 이야기
일분일초를 다투어 병원으로
4월 11일 오후 5시 경, 룡정시 삼합진 학서촌 촌주재 공작대로 파견 근무하고 있는 강영호 주임으로부터 메세지가 왔다. 거의 매일이다싶이 위챗으로 련락하고 있지만 이번에는 집에 계시는 나의 어머니가 위태하다는 긴급한 내용이였다. 진위생소에서 링겔 두통을 맞았지만 혈압이 좀처럼 내려가지 않았고 구토가 매우 심하다고 했다. 때는 이미 오후 5시가 넘어 택시를 부르기도 어려웠고 동네에 와있던 개인 차들도 공교롭게도 모두 시내로 간 상황이였다.
병원에서 검사와 병 간호를 하고 있는 연변주기상국의 룡정시 삼합진 학서촌 촌주재 공작대 강영호 주임
시간이 일분일초 긴박한 상황속에서 강영호는 룡정시인민병원의 120 구급차를 호출했고 동시에 이웃마을에 사는 학서촌의 김룡남 전임서기에게 통화하여 나의 어머니를 모시고 룡정시인민병원으로 출발하게 하였다.
학서촌에서 룡정시까지는 50여키로메터, 릴레이식으로 120 구급차를 갈아탄 후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룡정시인민병원 급진실로 들어갔다. 도착하자마자 강영호는 혼자서 77세 되는 로인을 모시고 CT 검사도 하고 입원수속도 하면서 저녁 8시가 넘도록 식사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군인출신 퇴직간부인 림광군 전 대대장도 소식을 전해듣고 늦은 밤이지만 연길에서 직접 운전해서 세수대야, 타올, 치솔, 치약, 광천수, 온수팩 등을 사가지고 병원으로 찾아갔다.
퇴직해서 이미 여러해 동안 학서촌에 뿌리내리고 있는 림광군은 나의 어머니를 '아재'라고 부르면서 맏아들 노릇을 해왔다. 그날 밤, 강영호와 림광군 두 분이 병원에서 나의 어머니를 정성껏 간호했을뿐더러 이튿날 아침에는 죽을 사다가 대접해 드렸다.
자식 못지 않게 정성스레
나도 이제는 쉰이 넘었지만 고향을 떠나온지가 오래되여 어머니 병시중을 들어본 적이 한번도 없어서 어떻게 하는지를 잘 모른다. 어떻게 보면 아들보다도 주위 분들이 정성이 더 깊었다. 정말 먼곳에 있는 친척보다도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 말의 뜻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다음날 삼합진 부진장이며 학서촌에 파견되여 근무하고 있는 강일선 서기가 병문안을 왔다갔다고 한다. 팔을 심하게 다쳐 병원에 왔던 걸음차로 짬내서 문안하러 왔던 것이였다. 성농업청에서 학서촌에 파견, 근무하고 있는 진설풍 제1서기는 우리 어머니가 고향에 홀로 계시고 외동아들이 먼곳에서 근무하고 있는 사정을 헤아려 강영호에게 며칠간 잘 간호해줄 것을 부탁했다. 강영호가 정성스레 간호한 덕분에 우리 어머니의 병세는 빨리 호전되였고 나도 어느 정도 시름놓게 되였다.
농망기에 농민들을 도와 사과배를 따고 포장하는 강영호 주임
학서촌의 최영실 회계는 소식을 듣고 그동안 빨래도 하지 못하는 사정을 알고 나의 어머니가 입었던 옷들을 주동적으로 집에 가지고 가서 세탁했다. 너무나도 고마워서 최영실에게 위챗으로 련락드렸더니 “기회가 되니까 로인께 효도를 하는겁니다.”라는 짧지만 그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답장을 보내왔다. 이 외에도 전에 촌에서 회계사업을 해왔던 황금복녀사도 우리 어머니의 입원 사정을 알고 맛나는 돈까스 음식을 챙겨드렸다고 한다.
오늘날 사회 인정이 메마른다고 하지만 그래도 우리 사회에는 아직까지 후더운 인정과 상부상조하는 기풍이 넘쳐흐르고 있는 것이다.
고향의 든든한 대들보
매번 고향에 갈때마다, 그리고 거의 매일이다 싶이 위챗으로 어머니와 통화를 하면서 고향마을과 촌주재 공작대 간부들의 사적은 많이 들어왔다. 이번에 직접 체험하고 느껴보니 강영호, 진설풍, 최영실, 강일선을 비롯한 촌주재 공작대 간부나 림광군, 김룡남과 같은 동네 분들은 오늘날에 있어서 정말 “살아있는 뢰봉”이라고 할 수 있다.
올해 55세인 강영호는 비록 여러 병에 시달리고 있지만 봄파종부터 시작해서 모내기, 김매기, 가을수확에 이르기까지 궂은 일, 어려운 일 가리지 않고 무상으로 동네 일을 도와주고 있다. 올해 겨울에도 별로 쉬지 못하고 여러 집의 땔나무를 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학서촌에서는 강영호를 “동네 보배”, “동네 머슴”이라고 주저없이 그의 공로를 인정하고 있다. 김룡남 전임서기는 “강동무는 만나본 간부중에서 제일 ‘고집’이 셉니다. 비록 쉰이 많이 넘었지만 그 어느 젊은이보다도 이악스레 일합니다. 그는 겉치레 없이 진심으로 일하기 때문에 촌민들의 가슴속에 뿌리내렸습니다!”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농망기에 농민들을 도와 사과배를 따고 포장하는 강영호 주임
기층의 버팀목
지금 강영호는 학서촌을 자신의 제2고향으로 생각하고 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고향 길을 산책하는 것이 하루 일과의 시작이다. 어느 집 굴뚝에서 연기가 나지 않으면 가서 문을 두드려보기도 하고 연기가 나도 모두 잘 보내고 있다는 메세지도 잊지 않고 보내주곤 한다. 비록 고향 멀리 떨어져 있지만 강영호가 공유하는 동영상이나 사진을 통해 수시로 고향소식을 접하고 있다. 특히 이번 감동적인 사연을 계기로 고향의 민심과 인정에 대해서 더 깊게 알 수 있게 되였다.
고향에는 림광군이라고 하는 큰 형도 있고 동창 김룡남도 있다. 특히 강영호와 같은 고향의 “기둥”, “통신수”도 있다. 나는 이러한 자랑스러운 고향의 지킴이들이 있기 때문에 고향이 안심되고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는 나의 고향만이 아닌, 고향을 멀리 떠난 나처럼 외지에 있는 자식들의 생각을 포함해서 우리 사회 많은 이들의 공감대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공감대가 널리 퍼져 고향의 고수준 발전과 우리 사회의 진보를 진심으로 기대하는 바이다.
/리성일
编辑:유경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