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길림신문] 《길림신문》과 함께
김파 길림신문 2025-04-24 14:41:11박병선
60여년을 살아오면서 잊지 못할 일들이 꽤나 된다. 이 가운데서 《길림신문》과 함께 했던 청춘의 날들이 퍼그나 무거운 비중을 차지한다. 내가 《길림신문》과 깊은 인연을 맺은 지 어제일 같은데 벌써 35년이 된다.
지난 90년대초까지만 해도 내가 출근하던 공장에서는 6부의 《길림신문》을 주문해 부서마다 나누어 주었다.
1990년 봄의 어느날이였다. 나와 동료는 공장의 일로 길림신문사를 찾아갔다. 그때 리금남 사장이 직접 우리 둘을 열정적으로 접대했다. 점심 식사자리에서 리사장이 이런 우스운 말을 했다.
“당신들이 보다싶이 일신의 천금이라고 불리는 나의 눈은 남들의 눈보다 특별히 작아서 ‘감자눈’이라는 별명도 있소. 나의 평생소원이 뭔지 아오?”
나와 동료는 서로 쳐다만 볼 뿐 대답을 못했다. 뜸을 들이던 리사장이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반백년을 살아오면서 녀자들한테서 남자답게 잘 생겼다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 것이 유감중의 제일 큰 유감이오. 이쯤 말하면 나의 소원이 무엇인지 알만하겠지. 하하하...”
리사장은 가슴이 뻥 뚫릴 것처럼 한바탕 통쾌하게 웃었다. 의문이 풀린 우리도 따라 하하하 웃었다.
“지금까지 한 말은 조용한 우리 밥상 분위기를 돋구기 위한 우스개라고 받아주오. 나 이렇게 못나도 사업만은 빈틈없이 하는 사람이오. 그래서 녀성들한테서 종종 ‘사업사나이’라는 말을 듣고 있소.”
리사장의 얼음 우에 표주박 밀듯이 유머가 가득 슴배인 말에 우리는 푹 빠져들었다. 어느새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였다. 아쉽지만 헤여져야만 했다. 리사장은 우리의 손을 잡고 이런 부탁을 했다.
“당신네 공장에서 우리 신문을 많이 주문해주니 고마운건 더 말할 것 없고 앞으로 우리 신문의 륭성발전을 위해 좋은 글들을 많이 써주오. 비단에 꽃을 수놓는 자수가가 되여주면 안될가? 선전을 책임진 선생님들이라 좋은 글을 많이 쓸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소.”
“네.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있는 힘껏 노력하겠습니다.”
나와 동료는 어깨에 힘을 실어주는 리금남 사장의 말에 선뜻 자신있게 대답했다.
이때부터 나는 《길림신문》을 중시해 보기 시작했다. 연변 외 성내 기타 지방의 소식들도 알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성구나 속담을 비롯해서 비유나 묘사, 서두나 결말이 잘 된 글은 필기책에 베껴두기도 했다. 그리고 시간이 있을 때면 다시 읽어보기도 했다.
나는 신문을 본 다음 일주일에 한번씩 신문을 고향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님에게 우편으로 부쳐보냈다. 신문보기를 즐기고 실농군인 아버지는 신문을 받아보고는 이런 내용의 편지들을 보내오군 했다.
“신문을 참 잘 꾸렸구나. 성내 우리 민족들의 소식들까지도 알 수 있고... 몇십년을 땅과 씨름해 온 나지만 신문을 읽고 나서는 아직도 배울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으로도 농사에 관한 과학기술정보 같은 것이 실린 신문이면 빼놓지 말고 꼭 부쳐보내다오...”
“요즘 저녁이면 우리 집 문쩌귀가 불이 날 지경이다. 내가 신문에서 본 다채로운 소식과 과학영농지식들을 동네에 나가 선전한데다가 또한 실제로 곡식의 단위당 수확고가 전보다 훨씬 높으니 글쎄 우리 집에 발길을 별로 안 돌리던 사람들도 나의 이야기를 들으러 찾아온단다...”
......
리금남 사장과의 만남은 나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나는 몇년간 부지런히 《길림신문》에 글을 써서 보냈다. 박문희, 문상화 등 편집선생님들의 손을 거쳐 적잖은 글들이 해볕을 보았다. 따라서 길림신문사의 우수통신원이란 영예도 지녔다.
열심히 글을 쓰는 나의 열정에 탄복되여서였는지 길림신문사를 찾아가면 편집선생님들마다 친인을 대하듯이 열정적으로 대해주었다. 글을 많이 써보내라며 원고지 2~3권씩 주기도 했다.
특히 광고처 처장직을 맡았던 리만화선생님은 “멀리 화룡에서 찾아왔는데 그저 돌려보낼 수야 없지. 내가 밥을 사야지.”라고 하면서 번마다 나를 푸짐한 점심밥상으로 접대하군 했다.
또 지금까지 나의 머리속에 깊이 조각되여 잊을 수 없는 기자는 문상화선생님이다. 그때 선생님은 내가 30살을 먹도록 총각이라는 것을 알고 나를 집으로 청해 식사대접도 했고 나에게 사촌 처제를 소개해준 적도 있다.
이렇게 봄볕처럼 따뜻한 편집선생님들이였기에 내가 출근하던 공장이 파산된 후 나는 빠듯한 살림임에도 몇년간 계속 《길림신문》을 자비로 주문해 보았다.
지금도 나는 홍옥선생님이 나와 안해 그리고 딸이 함께 찍은 가족사진을 배합해 편집한 문장이 실린 신문(2006년 10월 10일)을 먼지 하나 오를세라 비닐에 싸서 대물림보배처럼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지금까지 가족사진을 첨부해서 발표된 글은 오직 이것 하나뿐이다.
이후 나는 해외에 나가 일하는 피곤한 몸이라 10여년간 글을 쓰지 못했다. 여러해 동안의 해외생활을 종말 짓고 귀국한 나는 재작년부터 여유시간이 있게 되자 쓰러져가던 불이 입김에 되살아나듯이 인연이 끊겼던 《길림신문》과 다시 인연을 맺게 되였고 가물에 콩 나듯 글을 발표하고 있다. 앞으로도 《길림신문》과 나의 인연은 쭉 이어질 것이다.
지금까지 150여편(수)의 기사, 동시, 시조, 수기, 수필을 국내의 신문, 잡지, 방송에 발표했고 여러가지 상을 수차 받을 수 있은 것도 《길림신문》의 좋은 글들이 나에게 더없는 훌륭한 스승이 되여주었기 때문이다.
《길림신문》의 40돐 생일을 맞으면서 지금까지 찍어온 발자취에서 내뿜는 금빛찬란한 업적에 큰 축하를 보낸다. 앞으로도 《길림신문》이 걸어갈 길이 만방에 향기 가득 풍겨 봉접이 날아드는 꽃길이 되기를 두손 모아 간절히 빈다.
/박병선
编辑:안상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