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어를 끌고 제남으로 출장가는아들을 문 앞까지 바래고 돌아와 란장판이 된 아들의 방을 치우고 있는데전화벨소리가 울렸다 .
“엄마, 엄마 , 빨리빨리 신분증!”
숨이 넘어갈 듯이 한마디 하고는 전화가 끊겼다. 참, 나 원 , 이 자식이 또신분증을 빠뜨리고 갔나 보다 . 예전엔서류가방을 두고 가서 공항에 택배기사까지 보낸 적도 있었다 .
화가 치밀었지만 어쩔 수 없이 신분증을 찾아들고 택시를 타고 역으로 갔다. 아들은 벌써 역 앞에서 초조하게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택시에서 내려한마디 꾸중할 새도 없이 아들은 신분증을 받아챙겨서는 잽싸게 역으로 뛰여들어갔다 . 나는 아들에게 한마디 단단히 해야겠다고 뒤쫓아갔다.
저 앞 개찰구 입구에 줄서있는 아들의 뒤모습이 보였다 . 그런데 당장이라도 뛰여가 대판 꾸중할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갑자기 마음이 울컥해났다 .
난 아들을 다른 엄마들처럼 애지중지 사랑으로 키우지 못했다 . 고사리같은 손으로 내 손을 꼭 잡고 “엄마 , 언제 와? 몇밤 자면 와?” 하면서 엉엉울어대는 다섯살 난 아들을 할머니한테 떼여놓고 한국으로 돈 벌러 떠나갔었다.
한국에서 아들 걱정에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았고 꿈속에서도 엄마를 찾는 아들의 부름소리에 깨여나 배개를적시며 눈물을 흘렸다 . 참 돈이 뭔지,사는 게 뭔지 아리숭하기만 했다 .
그때는 한국에 가려면 10여만원의거금을 들여야 했지만 돈을 벌려면 불법체류를 해야 하기에 몸도 마음도 너무나 힘들었다 .
한국 법무부에서 불법체류자들이자진신고 귀국하면 1년후 다시 비자를 받아 한국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정책을 개진하였다 . 이 좋은 기회를타서 나는 4년 만에 중국으로 돌아올수 있었다 .
공항에 도착하니 어느새 키가 훌쩍커버린 의젓한 아들이 환하게 웃으며나를 맞아주었다 . 그날 저녁 아들은오랜만에 엄마를 만나서 그런지 많이서먹서먹해하면서 물어보는 말에만대답했다 . 그리고 예정된 시간이 다가오자 나는 다시 한국으로 가는 수속을하러 다녔다 .
어느 날 아들이 저녁밥도 안 먹고한쪽 구석에 울먹해 앉아있었다 .
그리고 며칠후 아들의 숙제책을 검사하다가 우연히 책가방에서 일기책을 보게 되였다 .
엄마는 또 한국에 가려고 수속을 하고 있다 . 난 엄마가 좋다 . 엄마가 제발 가지 말고 나랑 같이 영원히 살았으면 더 좋겠다. 우리 반 용이네 엄마는 한국에 간 후 아버지와 리혼하여지금 용이는 아버지와 둘이 산다 . 용이가 말했다 , 엄마가 자기를 버렸다고 . 나도 우리 엄마가 한국에 가면 날버리고 돌아오지 않을가봐 두렵다.마음이 찢어지듯 아팠다 . 나는 며칠을 고민하고 생각하던 끝에 드디여 한국행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해 겨울 나는 기뻐서 퐁퐁 뛰는아들애를 데리고 남편이 일하는 산동성 연태시로 왔다 . 와보니 남편이 하는 일은 생각보다 신통치가 않았다 .아들을 연태시의 한 소학교에 전학시키고 먹고 살아야 하니까 한식당을 하게 되였고 식당은 노력한 대로 차츰제 궤도에 들어섰다 . 남편은 다른 일을 시작해보겠다며 한국으로 떠나갔고 녀자 혼자 힘으로 애 공부 뒤바라지하며 식당을 운영한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았다 . 새벽에 나가면 밤늦게까지 일하다 보니 아들을 돌볼 새가 없었고 그 바람에 아들의 공부성적은 점점 떨어져갔다. 교내 운동회는 물론 학부모회의도 한번 참석하지 못했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사춘기에 들어선 아들은 갑자기 돌변한 것처럼 삐뚤게 나가기 시작하더니 매일밤늦게까지 PC방에서 살았고 숙제도하지 않아 담임선생님의 호출이 쉴 새없이 날아왔다 .
하루는 식당에 손님이 꽉 들어찼는데 아들이 큰 밥상 하나를 차지하고앉아 밥을 먹으며 도저히 자리를 비워줄념을 하지 않았다 .
“손님은 왕이다 . 자리를 치워주렴 .”홀 직원이 보다 못해 한마디 했다.그러자 아들은 벌컥 화를 내면서 상을뒤엎어버리는 것이였다.
“이 집에서는 내가 왕이야 . ”
나는 너무도 한심해 가게 밖으로 씽씽 걸어나가는 아들의 뒤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아들을 방치해둔 대가는엄청났다. 아들은 당연히 대학교에붙지 못했다 . 너무 후회되고 미안했다 . 하루는 죄지은 마음에 아들에게류학을 떠나면 안 좋겠냐고 은근슬쩍물었더니 아들은 갑자기 철든 것마냥심하게 머리를 가로젓는 것이었다 .
“아니요 . 엄마가 그렇게 밤낮없이힘들게 일해서 번 돈을 내가 어떻게함부로 탕진해요? 나는 엄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다 알고 있는데…”
사춘기 때부터 나와 별로 대화가 없었던 아들이 불시에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언제 이렇게 다 커서 엄마 마음을 알아주는 기특한 아들이 되였단 말인가! 그렇지만 요즘 세상에 좋은 대학을 나와도 직장을 구하기가 하늘의별따기인지라 대학물을 먹지 못한 아들이 앞으로 살아갈 일로 나는 무척속이 상했다 .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자기 스스로MC학원을 찾아 등록했고 2년후에는자격증을 땄으며 결혼잔치 등을 포함하여 주변의 여러 행사들을 맡아서 진행하면서 나름대로 활약을 하더니 3년전부터는 심수의 모 광고기획사 연태분사에 취직해 지금은 부장으로 승진했다 .
아들은 작년 회사 년말총화대회에참석해 받은 생화 한다발을 손에 들고환하게 웃으면서 가게에 들어섰다 .“아들 , 웬 꽃다발이지? 혹씨 녀자친구 주려고?”
“아뇨 , 엄마 주려고 . 며칠전 엄마생일에 출장가서 못 챙겨서요 . 오늘회사에서 년말총화를 했어요 . 나는열심히 일을 잘해서 상금도 많이 탔어요 .”
그러면서 조금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꽃다발을 나에게 안겨주었다 . 꽃다발 속엔 돈봉투와 함께 메모지도 들어있었다 .
”엄마 , 지금껏 나 때문에 고생 많았어. 사랑해.”
그 순간 나는 온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너무도 기쁘고 행복해 눈물이 절로 흘러내렸다.
“아들 , 남자는 담배는 안 피우더라도 사회생활을 하려면 술은 좀 배워야할 것 같은데 오늘처럼 좋은 날엔 엄마랑 술 한잔 하는 게 어때?”
“좋죠 . 그럼 우리 한잔 마셔요 .”
우리 모자는 처음으로 마주앉아술을 나누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엄마 구실을 제대로 못해서 참 너한테 미안해 . 바쁘다는 핑게로 챙겨주지도 못했고…”
“어렸을 때 엄마가 나를 버리고 한국에 다시 갔더라면 오늘의 내가 없었을 거예요 . 이제 내가 성공해서 엄마를 호강시켜줄게요.”
오직 엄마만 옆에 있으면 된다던 아들이 잘 자라줘서 정말 다행이고 감사했다.
아들은 훤칠한 체격에 인물도 괜찮다 . 요즘 눈치를 보니 한족아가씨와사귀는 것 같다 . 욕심같아서는 조선족아가씨면 좋겠지만 세상에 뭐나 마음대로 되는 일이 어디 있으랴 . 민족차별 없이 한족사위 , 한족며느리를 보는 시대이다 . 그리고 나도 지금까지스스로 잘살아온 아들 인생에 끼여들고 싶은 생각은 없다 .
출장갔다 온 아들의 캐리어 속에서 와이샤쯔를 꺼내 깨끗이 씻어서 다리미질하며 흥얼흥얼 노래까지 부르는 나는 정말로 행복한 엄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