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이러우》 리옥희의 연기인생 스토리 들어본다
《리옥희》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많을지 모르지만 《수이러우》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녀는 유명한 조선족연극배우이다. 리옥희라는 본명보다는 《수이러우》(水肉)라는 소품의 명대사가 이름보다 더 정답고 부담없이 받아들여진다는 리옥희씨, 당시 30세의 새각시에서 중후한 50대후반 중년으로 모습 바꾼 리옥희씨의 《수이러우》 연기인생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여봤다.
《수이러우》의 탄생배경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시간은 1987년 연변TV의 음력설야회 현장에 가 멈추어선다. 지금도 허다한 조선족시청자들을 배꼽 잡게 만드는 명대사인 《수이러우》는 바로 그해 음력설야회의 소품 《사촌언니》에서 나온 명대사이다.
도시에 사는 사촌녀동생의 애 돐잔치에도 참가할겸 호도거리후 집에서 기른 양어장의 물고기도 팔겸 겸사겸사 도시에 나타난 시골뜨기 사촌언니(리옥희 분)가 물고기를 팔아야겠는데 한어로 물고기를 뭐라고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개고기는 꺼우러우, 소고기는 뉴러우, 양고기는 양러우 한다는데서 《큰 계발》을 받고 대담히 물고기는 물 《수이》에 고기 《러우》를 더해 수이러우라고 불러버린것, 《수이러우 매바, 푸둥푸둥디 수이러우 매바》(물고기 사세요, 살찐 물고기 사세요) 하고 조선어와 한어로 뒤범벅된 엉터리 사구려를 웨쳐 시청자들은 참지 못하고 빵 터져버렸다.
물론 당시 이 소품에서는 이외에도 허다한 명대사와 세부들이 사람들의 배꼽 잡는 묘미로 등장했지만 지금까지 근 30년 세월이 흐르도록 좀체로 잊혀지지 않는 명대사가 있으니 바로 《수이러우》라는 명대사이다.
그해 음력설야회에서 소품 《사촌언니》로 공전의 성공을 거두었지만 리옥희씨는 지금도 마음 한구석에 아쉬운 느낌이 있다. 바로 편집되고 삭제된 소품의 허다한 내용과 언어들이 너무 아깝기때문이다. 원래 《사촌언니》는 근 30분이나 되는 꽤 긴 소품이였고 재미있는 대사들도 많았는데 텔레비죤 프로그람에 오르면서 소품시간이 10여분으로 대폭 줄어들었고 심열에서 부적절하다고 판정되여 올리지 못한 딴깐(호도거리), 짜팬(사기), 따쓰니(때려죽일 놈) 등 과격한 언어들이 모두 삭제되였다는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품이 성공할수 있었다는것은 리옥희씨의 탄탄한 연기력도 작용했겠지만 이 소품이 음력설야회무대에 오르기전부터 이미 크게 소문난 인기소품이였기때문이라고 리옥희씨는 말했다.
원래《사촌언니》는 룡정현문공단에서 전 주 문예경연에 내놓은 작품인데 소품이 무대에서 높은 인기를 얻게 되자 연변TV 음력설문예야회에 추천된것이였다. 1987년도 연변TV에 이 소품이 방송되기전에 이미 연변 각지는 물론 동북3성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200여차 넘는 공연을 한 인기소품이라고 한다.
심양에서 공연할 때는 관중들의 끈질긴 앵콜요청에 하는수 없이 소품을 다시 공연하는 일까지 있었다니《사촌언니》가 당시 얼마나 큰 인기를 얻었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다.
당시 《수이러우》 리옥희의 인기는 대단했다. 시내에 있는 상점이나 시장에 나가면 사람들이 겹겹이 에워쌌고 시도때도 없이 소품의 한대목이라도 즉석 연기해줄것을 바라는 지청구때문에 진땀을 빼기도 했단다.
한번은 도문시장에서 리옥희가 나타나자 몰려든 사람들때문에 시장의 보안원이 질서를 정리하느라 애를 먹었고 리옥희는 결국 사람들의 지청구에 못이겨 시장매대우에 올라가 한단락의 소품연기까지 하고서야 내려올수 있었다고 한다.
《수이러우》 그전 이야기
리옥희씨는 항상 자신감이 있는 당당한 녀자이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천부적인 연기적 재능과 끼를 믿었고 항상 노력을 아끼지 않았기때문에 성공의 반렬에 오를수 있었다.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기회가 차례지기 마련이라는 도리를 리옥희씨는 실천으로 증명했다.
1979년도의 어느 겨울날, 리옥희씨는 인생의 전환점이나 다름없는 운명의 선택을 하게 된다. 꿈 많고 아름답던 23살 꽃나이 시절, 당시 의란록장에서 사슴사육원일을 하고있던 리옥희씨는 문화예술사업에 대한 열정을 못 버린채 룡정영극원에 가서 영화해설원공부를 하고있었다. 룡정영극원 가까이에 룡정현문공단이 있었는데 어느 하루는 문공단앞을 지날 때 당시 룡정현문공단에서 사업하고있던 최인호선생이 《꼭다리모자 쓴 애 나 좀 보자》하며 리옥희를 불러세웠다. 이전에 하향을 내려와 친구집에 묵고있었던 최인호선생을 찾아 자기의 천부적인 연기재능과 함께 예술의 꿈에 대한 간절한 추구를 털어놓은적이 있었는데 최인호선생이 그녀를 용케 알아보고 불러세웠던것이다.
《너 연극을 해보겠니? 동북3성 콩클에 올릴 연극이 하나 있는데 딸과 며느리역을 물색중이다.》 최인호선생의 물음에 리옥희는 오매불망 해보고싶었던 연극배우인지라 마다할 리유가 없었다.
그런데 룡정현문공단에서는 리옥희에게 조건이 있었다. 즉 리옥희는 이미 나이(당시 23살)가 많아 문공단에 정식직원으로 들어올수 없으며 이번 콩클이 끝나기까지 한달가량의 시간동안만 문공단의 림시배우로 연극할수 있되 공연이 끝나 극단이 해체되면 무조건 다시 원 일터로 돌아가야 한다는것이였다.
림시라도 정식 공연무대에 나설수 있다는것은 얼마나 행운스러운 일인가?
리옥희는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은채 문공단에서 제기하는 약속에 동의하고 곧 연극연습에 들어갔다. 그때 룡정현문공단에서 무대에 올린 연극은 장막연극 《두부장사》와 《착한 며느리감》이였는데 리옥희는 천부적인 연기자질과 꾸준한 노력으로 극중 맡겨진 인물역을 뛰여나게 잘 소화해내 연극공연이 대성공을 거두게 되였다. 그번 공연에서 리옥희는 첫 무대연기였고 림시배우였음에도 불구하고 연기를 잘해 연기상까지 받아안았다.
이렇게 되자 룡정현문공단지도부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연기상을 받은 이튿날로 문공단지도부에서는 급급히 그녀를 데리고 의란록장에 가서 그녀의 호구며 사업관계를 서둘러 룡정현문공단으로 옮겨왔다. 인재를 남에게 빼앗길기봐 급급했던것이였다. 어제까지만해도 사슴사육원이였던 리옥희가 하루밤새에 연극무대에서 맘껏 꿈과 재능을 펼쳐보일수 있는 전직연극배우로 환골탈태한셈이였다.
룡정현문공단의 전직배우로 된후 리옥희는 범에게 나래가 돋친 격으로 탄탄한 연기내공을 쌓음과 동시에 괄목할만한 성과들을 따냈다.
1979년도부터 룡정현문공단에서 사업하는 동안 리옥희는 《두부장사》,《울고웃는 사람들》,《시름거리 웃음거리》등 장막극들과 《착한 며느리감》등 단막극, 《기생 봉선아씨》를 비롯한 가극은 물론 소품《사촌언니》와 같은 다양한 쟝르의 연기제재들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주체할수 없는 끼와 재능을 보였다.
많은 사람들은 리옥희씨가 1987년도에 연변텔레비죤방송국의 음력설야회 소품《사촌언니》를 통해 비로소 유명해지고 연기인생의 첫 걸음을 시작했다고 생각하고있지만 기실 그녀는 스타가 되기전에 이미 준비된 인기스타로 숨겨져있었다.
더 높은 연기인생을 위하여
1987년도에 《수이러우》로 크게 소문난후 리옥희는 더 높은 연기인생을 꿈꾼다. 꿈이라는것은 꾸는데만 그치지 말고 현실화 될수 있도록 그 꿈을 쫓아가고 이룰수 있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
리옥희는 룡정현문공단이라는 작은 현시급 무대보다 좀 더 크고 전문적인 연기무대에 나가서 허심히 배우고 성장하는 연기인생수업을 받고싶었다. 그곳이 바로 연변의 최고수준 연극 권위들과 작품들을 만날수 있는 연변연극단이였다.
1988년, 리옥희는 대담히 연변연극단의 문을 노크했다. 꿈을 쫓아가는데는 망설임과 주저가 쓸데없고 자신감과 확신만이 필요하다. 그러나 당시 연변연극단의 반응은 랭담했다. 그녀의 모든 과거의 성적들은 무시된채 전문학교의 예술교육도 받지 못했고 《사촌언니》라는 소품 하나만을 가지고 인기를 얻은 점은 긍정받기 어려우며 연극단보다는 구연단에 더 적합하다는 권유로까지 이어졌다.
그럴수록 꿈을 향한 리옥희의 오기는 더욱 확고해졌다. 그녀는 자기자신을 돌배에 비유하고 연변연극단을 사과에 비유하면서 맛없고 떫은 돌배도 사과와 배접하면 맛 좋은 사과배가 열리는 법인데 꿈을 찾는 자신에게 기회와 무대를 달라고 진심으로 사정했다. 정 불가능하다면 3년만 먼저 시용해보고 그래도 아니라면 깨끗이 단념하고 연극단에서 떠나겠다고 사정했다.
당시 연변연극단의 리경파서기가 그녀의 지성에 감복해 《이 동무는 연극을 할수 있다》고 판단해 리옥희는 연변연극단의 전직배우로 새로운 성장을 하게 되였다. 그것이 1988년도의 일이였다.
인기후의 슬럼프…그리고 화려한 탈피
연변연극단에 온후 리옥희는 의외로 인기후의 슬럼프를 겪게 된다.
필경 연변연극단은 연변의 최고 연극인들과 작품들이 탄생하는 곳이다. 경력이 화려하고 탄탄한 연기내공을 갖춘 많은 선배님들 앞에 선 리옥희는 비록 사회적인 인기를 얻긴 했지만 아직은 배울게 많은 초보자일뿐이였다.
연변연극단에서 리옥희가 맡은 배역중 하나가 장막극 《파산》에서 무대에 잠시 머리 내밀고 《무스것들이 문앞에서 왔다갔다하면서 떠드냐?》는 대사 한마디 던지는것뿐이였는데 그 잠간의 순간이나마 리옥희씨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관중들이 《수이러우다》하고 반색해 황당하게나마 조역의 안위를 느껴보았던적도 있다.
연극단의 연출이 농촌사람들이 볼 때는 사투리대사를 하고 도시사람들이 볼 때는 표준어대사를 하라고 해서 혼란스럽고 많이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밤잠도 잘 못 잤고 자기 색갈에 맞지 않는 연기요구에 이런저런 갈등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그렇게 인기후의 슬럼프를 겪으면서 리옥희는 비로소 자기 색갈에 맞게 성장하는 길을 찾아야 함을 절실히 느꼈다.
연변TV방송국의 한 전임 책임자는 리옥희가 1987년도에 《사촌언니》로 너무 큰 인기를 얻었기에 그 작품보다 더 성공적인 작품을 만들자면 상당히 힘들것이라고 그녀에게 충고한적이 있다. 그것은 공연한 걱정이 아니였다. 인기를 뛰여넘는 인기작품을 만든다는게 인기인들에게는 그만큼 큰 숙제이며 또한 그 중압적인 무게만큼 큰 부담과 스트레스도 고스란히 감내해야 하기때문이다.
리옥희가 인기후의 슬럼프를 겪을 때 그녀를 옆에서 지켜보고있던 최인호연출이 그녀에게 본인의 캐릭터와 맞는 구연프로그람을 제안했다. 녀자 1인극을 한번 시도해보라는것이였다. 당시 연변에서 1인극은 리영근, 강동춘 등 쟁쟁한 연극인들이 시도한적 있은외 녀자로는 리옥희가 처음 해보는 시도였다.
1인극 《새새발로친》의 한 장면
그래서 만든 작품이 《새새발로친》이였다.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대사면 대사, 어느것 하나 꿀릴데 없는 완벽한 작품이였다. 그것도 혼자서 일인다역의 재미있고 배꼽 잡게 하는 말과 행동을 완벽히 소화해냈다는것은 탄탄한 연기내공이 인기후의 슬럼프를 딛고 뿜어낸 힘찬 도약이였다. 1990년도의 연변TV 음력설야회에서 리옥희는 《새새발로친》을 관중들에게 선보여 또 한번 대중적인 사랑과 인기를 차지했다.
연변축구팀이 전 주 여러 민족 군중들의 한결같은 응원을 받으면서 전국 갑급무대에서 휘황한 전과들을 올리던 지난세기 90년대중반, 리옥희는 실제로 연변팀의 응원대장으로 되여 본인의 독특한 인격적 매력과 인기로 연변팀을 향한 연변축구팬들의 응원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때 응원대장을 하면서 만나보았던 허다한 축구팬들을 작품에 담은 1인극 《응원대장》은 바로 리옥희가 생활과 연기를 서로 잘 결부시킨 성공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1991년도에는 텔레비죤드라마 《몽당치마》에 출연해 국가급 드라마 최우수연기상을 받아안기도 했다.
《수이러우》는 영낙없는 중국조선족녀성상
《저는 〈수이러우〉라는 제 별명이 마음에 듭니다. 어떤 사람들은 혹시나 제 이름을 모르고 〈수이러우〉라고 부르고는 제가 기분 나빠할가봐 눈치를 보는데 그때마다 제가 오히려 더 송구스런 느낌입니다. 시청자들이 사랑의 마음을 담아 지어준 별명인데 제가 왜 싫어합니까?》 리옥희는 내심 《수이러우》라는 별명이 싫지 않은 기색이였다.
리옥희씨가 《수이러우》라는 별명을 아끼고 사랑하는데는 또한 그 나름대로의 리유가 있다. 소품에서 나오는 사촌언니의 성격적 특점과 모습이 바로 우리 조선족녀성들의 소박하고 순수하며 근면하고 정이 있는 인간적인 면을 잘 담아냈기때문이다. 어질고 나약한듯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불러일으키지만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기앞의 할말을 당당히 할줄 알고 옳바른 시비도리를 따질줄 아는 그러한 이미지들이 바로 우리 조선족녀성들의 이미지와 많이 닮아있기때문이다.
리옥희씨가 출연한 조선족위안부할머니역 영화의 한 장면
지난해 리옥희는 연변연극단에서 정식으로 퇴직휴양했다. 공직은 떠났지만 아직 그가 할 일은 많이 남아있다. 그동안 그녀는 중앙텔레비죤방송국의 여러 채널에 출연해 조선족연기문화를 전국에 알리는데 적극 앞장섰으며 4년째 한국에서 중국조선족 관련 여러 문화행사들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면서 중한 문화교류에서도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지난해에는 한국에서 조선족위안부할머니의 역을 맡은 영화를 찍기도 했다.
조선족문화의 휘황은 반드시 온다
소품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아직 식지 않은 사람, 연기인지, 현실인지 취재과정에서도 한편의 재미있는 소품을 만나는듯한 기분이였다. 노래도 부르고 연기중의 명대사도 외우고…50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이렇게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연기를 사랑하고 거기에 심취돼있는 진정한 예술인이 과연 얼마나 될가?
후배들이 뭘하느냐고 물어보면 리옥희씨는 그저 놀고있다고 말한다고 했다. 모든 연극무대가 저조해있는 현실에 부아가 난다는 그녀, 그래서 밤잠도 안 온다는 그녀, 연기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그만큼 크지 않고서야 왜 그녀가 이처럼 안타까운 연기현실에 가슴 아파하고 안타까와할것인가?
중한 문화교류에서도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있는 리옥희씨(왼쪽 두번째)
《지금까지 지켜온 연변소품의 정통성과 우수성을 이제 계승하고 지켜나갈 사람들이 없을수도 있다는 현실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러나 그녀는 《조선족연극무대의 휘황은 다시 올것이라는 희망으로 살고있다》고 희망적으로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떠나갔고 그래서 과거의 재래식무대는 사라졌지만 우리에게 아직 문화를 전파해줄 허다한 인재들과 특히 소품과 같은 단편적이지만 영향력이 큰 영상문화를 잘 전파해줄 TV방송 같은 활무대는 엄연히 존재하고있다는것이다.
문제는 정부적차원에서 연기자들에 대한 관심과 연극무대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과 지지를 해주고 TV 등 조선족매체들에서 이한 사업을 잘 이끌고 조직할수 있는 기제나 시스템을 마련해주는것이 중요하다고 그녀는 조언했다.
연기인들은 재능을 펼칠수 있는 활무대가 마련되여 지속적으로 탐구발전할수 있어 좋고 대중은 감상할수 있는 민족특색문화의 TV활무대가 있어 등을 돌리지 않게 됨으로써 량성순환으로 발전하게 되는 매체문화, 그것이 바로 《수이러우》 리옥희가 조선족문화의 재휘황을 꿈꾸는 한가닥 희망의 끈이다.
编辑:안상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