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기장군의 흉상(胸像) 한국 청주시 강내면 태성리에
1월 6일, 필자는 조남기장군의 고향인 한국 청주시 강내면 태성리를 찾았다.
2014년 11월 19일자 《한국일보》에 “한•중수교 산파 조남기장군 흉상(胸像) 건립”이란 기사에서 “조남기장군의 흉상을 조카인 조흥연이 사비로 세웠다”를 읽고 1년전부터 한번 다녀올 생각으로 이번 행차를 했다.
조남기장군의 흉상옆에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하늘이 맺은 인연입니다”
20년전에 필자는 《연변일보》기자로 조남기장군의 조카인 조흥연회장(당시 51세)을 인터뷰한적 있다. 그때 조흥연은 연길에서 한국 독자기업인 《연변명성건재유한회사》와 《연길남흥건업유한회사》를 창립,한인상공회운영위원, 연변한국투자인협의회, 연변한인회 회장을 겸임하였다.
필자는 “인연이 있는데 신문에 실린대로 찾아가면 되겠지…”라고 생각하면서 6일 아침에 20년간 아무런 련계도 없던 조흥연을 찾아 이국의 낯선 길에 올랐다.
1월 6일 12시에 태성리에 도착하여 《태성리경로당》을 찾았더니 밭고랑같은 주름살을 얼굴에 가리운 한 백발할머니가 외로이 자리에 누워서 손가래질했다. 경로당을 나서니 바로 경로당 북쪽에 자리한 《태성리진료소》에서 한 아줌마가 나왔다.
“안녕하세요? 물어봅시다. 이 동네에 조흥연이라는 어르신님이 계십니까?”, “계십니다. 바로 저의가 조흥연의 댁인데요…” 고래도 춤추게 할 신화같은 화답이였다.
“저는 20년전에 사모님의 댁에서 후한 대접을 받았던 원 연변일보사 오기활기자입니다!”, “아! 그래요? 우리는 진짜 하느님이 맺어준 인연입니다. 나는 평소에 진료소를 안다니는데 오늘 아침엔 부르는듯이 진료소에 가고싶었습니다.”
“66대순(大順)”이라더니 2016년 1월 6일이 이렇게 대순일줄이야! 아니면 오늘은 나의 손녀 생일날인데 일본에서 생일을 이틀 앞두고 길을 떠난 아쉬움을 달래지 못했는데 말이다.
이녀사(이성자)는 “조흥연이 지금 건설장에 있다”며 스스로 우리를 증조부인 독립운동가 조동식의 동상과 증조부의 손자인 조남기장군의 흉상이 자리한 곳을 안내했다. 이녀사는 또 우리를 자택에 모시더니 따뜻한 커피를 대접하고나서야 문밖까지 손을 저으며 전송했다.
“조남기장군의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관을 세우려 합니다”
조흥연이 건설장에서 대기하고있었다. 명함을 보니 《오송. 청주도로확장공사대책위원회》 위원장 신분이였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늙을 새가 없다”더니 조흥연이야말로 20년전의 씩씩하고 열정에 넘치는 모습이 그대로였다.
조남기장군의 흉상을 세우게 된 과정을 물으니 2014년 11월 11일자 《중부매일》신문을 건네주었다.“한•중수교 산파 조남기장군”이란 제목의 기사내용이다.
“한•중수교 성사의 산파역인 충북 청원출신 조남기(88, 사진) 중국정치협상회의 전임 부주석에 대한 흉상제막식과 사진전이 10일, 생가인 청주시 강내면 태성리에서 열렸다. 이날 흉상제막식과 사진전은 조남기 전임 부주석의 조카인 조흥연이 사비를 털어 마련했다. 조부인 독립운동가 조동식선생의 동상옆에 조남기 전임 부주석의 흉상을 세웠고 한국과 중국에서의 활동사진 20여점을 전시했다. 조남기 전임 부주석은 1992년 한중수교과정에서 핵심적 기여를 한 인물이다.”,“1927년 옛 청원군 강내면 태성리 89번지에서 태여난 그는 청원출신 독립운동가 조동식(1873ㅡ1949)선생의 손자로 13살 때 조부를 따라 중국으로 망명했다. 조동식선생은 1919년 <3.1>운동 때 강내면에서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대봉화홰불시위> 주동자로 2년간 옥고를 치렀던 일제강점시기 독립운동유공자이다.”
“조남기 전임 부주석은 1982년부터 1997년까지 3차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됐고 1988년 정치협상회의 제 9기 전국위훤회에서 부주석에 선출됐다. 2000년 4월과 2001년 6월에 한국을 방문해 생가를 찾기도 했다.”
“조흥연은 이와 관련해 ‘한중수교가 체결된지 20주년이 넘었고 수교후 량국간 큰 경제적교류 및 성과를 거뒀음에도 정작 수교에 역할을 한 사람에 대해서는 몰라주는것같아 안타깝다면서 한중수교의 산파역할을 한 조남기장군에 대해 재조명하기 위해 이번 흉상제작과 사진전을 마련했다.’고 했다.”
“조흥연은 ‘최근 들어 청주공항을 통해 중국관광객들의 방문이 크게 늘고있는데 조남기장군의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관을 세워 청주의 중국관광활성화에 기여하고싶다’면서‘조선족들의 관광코스’라며 지자체 등의 관심과 지원을 제안했다.”
조흥연위원장의 소개에 따르면 조동식선생은 1977년 12월 13일에 대통령표창을 받았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상을 받았다. 조동식동상은 충청북도지사, 청원 군수, 광복회 충청북도지부의 후원으로 2013년 11월 21일에 준공, 제막하였다. 조동식동상의 전후면은 《愛國志趙東植先生》,《韓國獨立運動的先驅》란 조남기장군의 친필을 박았다.
“세계적인 인물인 반기문총장과 해외서 위인으로 불리는 조남기장군은 모두 우리 충청도출신입니다.”, 조위원장은 충청북도 자랑을 했다.
20년만의 뜻깊은 재회
“연변의 장래를 보고 사업을 개척해야 합니다”
이곳저곳 건설현장과 건설용 부지로 안내하는 조위원장은 지금 자기가 채용하는 거의 모든 건설장 일군들이 조선족이라면서 그네들을 불러놓고 건설현장에서 다 함께 기념사진을 남겼다.
그리고는 “그분들은 방금 사내식당에서 점심식사를 끝냈다”며 필자를 《만리장성》(중국음식점)에 데리고가서 중국산 《고량주》를 친히 부어올리고는 《만리장성》의 성장을 불러놓고 중국자랑에, 조선족사랑으로 반주했다.
20년이 지났것만 조선족에 대한 그의 사랑과 기대는 드팀없이 여전했다.
이 시각 20년전 조흥연회장이 하던 말이 서서히 떠오른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 경영인들은 중국조선족 특히는 연변조선족들에 대한 부당한 평가를 버려야 한다. 당면의 리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연변의 래일을 그리면서 네일 내일을 탓하지 말고 늘 분주히 보내야 한다.”
“될수록 현지 조선족들을 많이 채용하고 의식, 기술, 문화 등 여러면에서 서로 따라배워야 한다.”
“연변의 장래를 보고 대담히 사업을 개척해야 한다. 나는 한국에 와서도 신문잡지를 통해 한국기업들의 연변진출을 호소했다.”
“중국 나들이를 하는 한국 종교인들에게 지나친 포교경쟁(布教竞争) 을 자제할것을 바란다. 중국의 법을 어기지 않고 과잉선교를 자제하는것이 바로 현지 조선족과 이곳 한인을 돕는 일이다.”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참 금쪽같은 말씀이다.
길림성 영길현 차로하에 태줄을 묻은 조흥연은 중국사랑, 충북자랑에 다시 만나자로 필자를 바래주었다.
건설현장에서 조선족일군들과 함께.
사진글/강용호, 오기활특약기자
编辑:홍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