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기자절을 맞으며 조선족언론계의 별 고 정경락선생의 인생마무리 돌이켜 본다.
광동촌에서 습근평주석이 앉으셨던 자리에 앉아 기자생애 마지막 취재를 하고난후 기념사진을 남긴 정경락선생
추모문으로 맞는 기자절
올해의 추위는 류달리 때이르게 찾아왔다. 기자절(11월 8일)을 맞으면서 문득 한분의 모습이 사무치게 그리워난다. 그렇게도 신문사업을 사랑하던 “영원한 기자” 고 정경락선생이 저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따뜻한 미소를 짓는듯하다.
7월 2일, 저미는 가슴을 안고 마지막 림종전까지 고 정경락선생을 지켜보던 때가 어제같았는데…
우수한 공산당원이며 중국조선족신문출판분야에서 독특한 기질과 개성으로 활약, “위대한 발기”로 중국기자협회의 높은 평가를 받았고 중국신문계와 조선족사회를 들썽하였던 “중국변경만리행”의 일선 지휘원… 길림신문사, 연변일보사 전임 부총편집,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지부생활》잡지사 전임 총편집, 연변조선족자치주 출판협회 부주석… 이 시각 고 정경락선생의 추도식에서 울리던 추도사가 들려오는듯하다…
선생과 꼭 30여년을 굳건히 지켜온 “오리발필우”로서 필자는 그의 존재로 하여 내 인생의 나그네길이 덜 외로웠었다.
“연변과학기술대학(현재 연변대학 과학기술학원) 총장 김진경박사는 한 사람의 나이를 생리적나이, 지적나이. 정신적나이, 정감적나이로 획분하여야만 진정한 나이로 평가할수 있다고 합니다. 하다면 륙십 생신을 맞는 오기활선생의 실제 나이는 얼마일가요? 저의 나름대로 분석하면 오기활선생의 생리적 나이는 40, 지적나이는 36, 정신적나이는 50, 정감적나이는 28살로서 생기와 정력이 넘치는 ‘젊은신사’라고 평하고싶습니다. 오기활선생은 제2인생에 데뷔하고 새로운 령마루로 오르고 있습니다.”
꼭 10년전, 필자의 60생일파티에서 한 선생의 너무나도 다정다감하게 나를 감동시킨 축하사의 한단락이다.
그런데 그가 홀연히 떠나 버렸으니 이렇게 다정했던 얘기를 더는 들을수 없게 된것으로 이 마음이 너무나도 허무하다.
기자절을 앞두고 고 정경락선생을 그리는 추모글을 쓰고싶었다. 그런데 할말이 하도 많아 어느것부터 썼으면 좋을지 몰랐다. 머리를 굴리던끝에 그의 마지막 발자취, 마지막 유언, 유서 등을 추려서 “아름다운 마무리”로 제목을 달고 쓰기로 했다.
마지막 발자취 마지막 작품
필자는 선생과의 첫 합작으로 도문시 홍광향 흥진촌 촌민위원회 김봉룡주임을 취재하고 《연변일보》력사에서 첫 장회(章回)인물통신으로 취급된 “흥진골에 봉룡이 날아왔다.”(1985년 12월 19일자)를 발표했다. 그후부터 선생과의 합작취재를 계속해오다가 “습근평주석은 완전히 농민감정입데다”(길림신문2015년 10월 24일자)로 마감글을 썼다.
“습근평주석은 완전히 농민감정입데다”는 필자와 선생의 최후의 합작품이며 선생의 기자생애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신문기사였다. 그러니 화룡시 동성진 광동촌은 그가 취재길을 다녀온 마지막 동네인셈이다.
취재를 마치고 필자와 함께 기념사진을 남기다
그리고 필자는 2004년 선생과 함께 책 《성공을 향하여!》(돌아보는 성보 10년 창업발전사)를 시작으로 책자출판을 합작하여왔는데 선후로 화책, 기자문집 등 6권의 책을 출판했다.
최후에 합작한 책자는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리종권자서전, 2016년 2월)였다. 선생은 올해 음력설기간에도 페암치료로 매일 병원을 드나들면서도 근 반달사이에 밤낮이 따로없이 무려 28만 5천자에 달하는《나는 이렇게 살아왔다》 의 심독(审读), 표지(封面)설계, 제판(版式)설계, 사진수정은 물론 심지어 출판원고를 인쇄공장에 맡기는 일까지 전담을 하였다.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는 선생이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도서이며 리종권선생만이 아닌 고 정경락선생이 인생에 부치는 편지라 하겠다.
지난 3월 1일, 정경락선생은 병상에 누워서 필자에게 이런 글을 위챗으로 보내왔다.
ㅡ 오형, 내가 이번에 앓으면서 나의 생명이 나한테만 속한것이 아님을 깊이 느꼈고 내가 나의 생명을 아끼는것이 여러분들의 기대에 보답하는것임을 늦게나마 느꼈소. 바로 이런 느낌과 보답이 내가 이 책(《나는 이렇게 살아왔다》)에 관심을 돌리고 배판까지 열심히 배우면서 완수할수 있었던 동력이였소. 아직도 내가 남을 위해 뭔가를 할수있다는것이 삶의 가치, 삶의 보람, 삶의 행복임을 느낀것만으로도 내 가슴이 뿌듯하오…
행복은 다른 사람의 몸이 아닌 자신의 몸에 뿌려지는 향수라고 한다.
고 정경락선생의 삶의 가치, 삶의 보람, 삶의 행복론 및 그의 몸속에 슴배여있는 짙은 향수는 필자의 머리를 무릎까지 숙여지게 하였다.
지금부터 5년전 일이다.
2011년 9월 5일, 필자는 정경락선생, 김성걸선생과 함께 한달동안 간밤을 새며 대형화책《일하는 멋, 베푸는 삶》의 출판 관련 모든 일을 끝내고 자축하는 술좌석을 마련했을 때 정경락선생이 이런 말을 하였다.
ㅡ나는 밤낮이 따로없이 일을 하면서 내가 80세까지 산다고 해도 이제 겨우 7000날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렇게 바쁘게 살것이 뭐냐며 자책을 하였소. 그런데 일전에 잡스의 인생철학을 다시공부하고나서 세월은 가는것이 아니라 세월은 온다고, 아직도 7000날이나 내 앞에 다가오는데 이제부터 함부로 살지 말고 오늘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을 준비하고 오는 세월을 마중해야 하겠소.
그런데 다가오는 7000날을 마중하며 꿈너머 꿈을 설계하던 그이가 겨우 1520일밖에 못살고 우리 곁을 떠났으니 비통함을 금할수 없다.
마지막 유언과 투병일기
2014년 9월 8일, 선생이 페암으로 진단을 받고 우리들과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이 절대 나를 환자취급을 하지 말라, 나를 이전처럼 대하고 나한테 여전히 할일을 맡겨달라. 이것이 당신들이 나에 대한 최대의 관심이고 격려이다.”
이에 필자는 그의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찬탄하며 그의 병치료에 힘을 주고저 《건강은 마음으로 지켜라》는 등 몇권의 의서를 주면서 “전략적으로는 암을 멸시하고 전술적으로는 암을 중시하며 이번 투병을 기회로 고심히 연찬하여 몇년이라는 시간을 정하고 향후 집집마다에 암투병지침서로 찾게 되는 값진 책을 써내라.”는 강제성임무를 정경락선생에게 주었다.
그후로부터 필자는 2016년 7월 2일 1시 25분에 그가 운명하기전까지 암환자 정경락선생을 환자가 아닌 멀쩡한 인간으로 대하며 그에게 병고해탈에 도움이 될만한 일거리를 맡겼고 그와 함께 할수있는 활동을 조직하였다.
운명하는 그날, 깨끗한 정신으로 최후의 막숨을 쉬며 운명을 마감하는 정경락선생을 차마 볼수 없어서 그와의 마지막 영별이 너무나도 애석하여 필자가 참다못해 그의 옆에서 흐느낌소리를 내자 선생은 “내가 웃으며 떠나려는데 울기는 왜 우오…” 라고 하면서 마지막 맥없는 말을 남겼다.
“부모같은 오형이 끝까지 책임져주오!”
이는 7월 2일 오후 1시 20분경, 선생이 필자와 눈동자를 맞추고 막숨을 내쉬면서 힘없이 꺼낸 말이다.
그의 마지막 부탁의 말뜻인즉 《투병일기》를 다 썼으니 끝까지 책임져달라는것이였다. 선생이 사망된 며칠후에 그의 가족에서 그가 생전에 쓴 일기를 찾았다는 기별이 왔다.
인생은 한권의 책이다.
《투병일기》 1부(2014년 9월 8일부터 2015년 10월 30일까지)는 삶을 위해 싸우는 고인의 노력, 시도, 즐거움, 락심 그리고 성취에 대한 기록이며 병마와 동무하면서 보다 나은 삶의 뜻을 가지려는 사람들에게 인생의 진리를 밝혀주는 지침서로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가운데서 일기 한편을 골라 독자들에게 올린다.
2015년 3월 24일
요즘은 길림신문사의 부탁을 받은 원고의 자료를 찾으려고 련속 이틀을 허비했다. 컴퓨터 앞에 앉으니 서두가 떠오르지 않는다. 붓이 무디다는것은 결국 머리가 무디다는것이다. 좀 더 생각하고
1, 사실대로 쓰자
2, 결론보다는 과정을 쓰자
3, 꼭 읽히게끔 쓰자
4, 뭘 설명하기보다는 뭘 반영하기에 신경을 쓰자
5, 없어서 못쓰는것이 아니라 발이 닿지 않아 못쓴다.
6, 비판보도, 폭로보도가 없는 신문은 산송장이다.
엄동설한에 왕청현 배초구진 봉림촌 오기철촌주임을 취재하고있다.
지금 민생에 문제가 없는가? 잠잠한것이 뉴스가 없어서인가? 아니다. 돈이 없어 못 쓰는가? 아니다. 고생하기 싫어서 못쓴다. 언론사개혁이 멀었다, 멀었어! 뛰는 사람이 적고 앉아 있는 사람이 많은 언론사, 그게 바로 문제다. 부르면 가는 기자, 통지해야 가는 기자, 그나마 《길림신문》은 머리를 쓰는 신문이다. 앉아서 뉴스를 만드는 신문은 파지다.
래일은 박금룡의 3년 제사날이다. 벌써 3년이나 흘러갔다. 그간 하늘나라에서 잘 있었는지. 이번에 내가 쓰려는 글이 워낙은 금룡이가 써야 할것인데 그가 없어 내가 대신 쓰는거다. 금룡이 쓴다면 어떻게 쓸가? 또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겠는데 말이다. 금룡이의 가장 큰 우점은 일단 선택하면 행동에 옮기는것이다. 그리고 거창하게 내민다. 계획이 주밀하지 않으면 조정하면서 완벽화한다.
《연변25시》를 꾸릴 때 내가 평생 기자로 일해왔지만 백성이나 기층에 대해 너무 소홀히 했다고 말하면서 앞으로 백성을 위하는 《백성신문》을 꾸려보자고 했더니 금룡이는 이를 인차 받아물고 “백성중심, 백성봉사, 백성참여”라는 신문방침을 새롭게 내놓았다.
《연변25시》 는 한시기 정말 인기가 높았다. 한번에 5000 부, 지어는 8000부까지 팔렸다.
당보는 군중에 신입하고 다가가야 한다. 신문은 특수상품이다. 주문상품, 먼저 돈을 받고 후에 주는 상품, 하루 세끼 식비로 1년분 식비를 먼저 냈는데 신문을 만드는 사람들이 먹는 사람들의 식미를 고려하지 않고 되는대로 작식을 한다면, 자기들의 주관대로 음식을 만든다면 그래 먹는 사람이 좋아하겠는가? 당신이라면 기분이 잡치지 않겠는가?
정말 신문이 주문이 아니고 책가게나 전화방에서 팔리는 상품이라면 대관절 얼마나 팔릴가? 고민을 하지 않을수가 없다. 과연 우리가 한것이 무엇인가?
당보로서 우리의 성의, 우리의 노력이 부족하다. 조선족언론도 혁신이 일어나야 한다. 각 지역판으로 동북3성외에도 북경, 산동, 광주, 상해, 한국, 미국, 조선, 일본…등 지역을 나눠 16개 면으로 꾸렸으면 어떨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실로 “고 정경락선생의 일생은 일편단심 신문사업을 위한 일생이였다”(한정일 추모글에서)
지인들에게 남긴 마지막 당부들
지난 7월1일 오후 1시에 필자는 당창건 75주년 기념행사로 연변범서방프라스틱유한회사(미국독자기업)조광훈경리와 함께 주당위“지부생활”잡지사 주필을 지냈던 정경락선생을 위문하고 돌아오면서 “아직 20일은 문제 없겠다”고 짐작했는데 이튿날인 7월 2일 오전 11시경에 정경락선생의 부인으로부터 환자의 병세가 위급하다는 급보가 왔다. 나는 그 자리로 “지부생활”손원종(孫元钟) 전임주필에게 정황을 알리고 급히 연길로 향했다.
12시 40분경, 연변병원 병실에 도착하니 정경락선생이 한창 유가족들에게 부탁의 말을 남기고있었다.
ㅡ 울면서 태여난 세상을 웃으면서 떠나겠다. 평상시에 즐기던 노래(3곡)를 선택하고 내가 떠날 때 들려달라고 이미 부인한테 부탁하였다.
ㅡ 내가 죽은후 집에 유상을 걸어놓고 가족들과 하루 밤을 더 보내게 한후 다음날에 장례를 치러달라.
ㅡ 장례식에서 술을 붓지 말고 국화꽃을 64송이 올려달라.(주: 선생은 64세를 일기로 별세)
ㅡ 유골을 자리가 합당한 소나무밑에 묻고 평토를 하라. 앞으로 그 소나무밑에서 그리운 사람들을 종종 만나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눌수 있도록…
다른 하고싶은 말이 없는가는 필자의 물음에 선생은 이렇게 말헀다.
ㅡ 작년(2015년)4월 8일까지 집을 사느라고 공상은행에서 대출한 9만원 빚을 10년만에 다 갚고 안해와 함께 집조를 받아 쥐고 너무나 기뻐서 이제부터 시름을 놓고 잘살아 보자고 했는데, 이 암때문에 돈을 많이 써 가족에게 너무나 미안하다. 아들이 당뇨병, 부인이 통풍, 며느리도 건강이 안좋아 죽어서도 시름을 못놓겠다.
ㅡ 며칠전에 체면을 무릅쓰고 조직에 경제적으로 도와줄것을 제기하였다. 개인들이 모금한 돈은 절대 안 받겠다. (주: 조직에서 환자의 치료에 경제적보탬을 주고저 보고서를 올리고 추진하던중 고인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여 별세해 너무 안타깝다)
ㅡ 어느 누가 내가 전생에서 죽음의 고비를 세번 넘겨야 한다고 했다. 이미 두번은 “조국변경만리행”때 교통사고를 당했지만 죽음을 면했는데 이번의 암이 세번째 고비다. 이 고비를 넘기겠는지…
ㅡ 오형이 출판하려는 책제목(《왜 갔느냐면 일본에, 왜 사느냐면 일본서》)이 매우 독특하다. 오형이 부탁하던 책표지설계는 이미 컴퓨터에 저장해놓았다…
64송이 국화꽃 안고 떠나다
그때그때 바로 그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할 도리, 의무, 책임을 다하는것이 아름다운 마무리다.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사람은 스스로 가난과 간소함을 선택한다. 그리고 언제든 떠날 차비를 한다.
고 정경락선생은 리(利)가 눈앞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도 의(義)을 저버리지 않은 군자였다.
고 정경락선생은 그때 그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할 도리와 의무, 그리고 책임을 다하는것으로 자기의 인생을 아릅답게 마무리를 하였다.
국화는 늦가을 서리에도 어김없이 청초한 꽃을 피우기에 꿋꿋한 삶을 사는 군자로 불리며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사람들은 의지가 강한 사람이 그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음을 국화로 표현한다.
고인의 유언에 따라 조문객들이 안겨준 64송이의 국화꽃을 안고 우리의 곁을 떠난 고 정경락선생이시여, 천국의 아름다운 꽃밭에서 두견새, 파랑새로 새롭게 태여나 이승에서의 슬픔이랑 아픔이랑 부디 훌훌 털어 던지고 좋은 일만, 행복했던 일만을 기억하며 저승에서 영생하시라!
삼가 고인님의 명복을 빌고 빕니다.
오기활
编辑:안상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