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광이” 김혁소설가와 만나다
“책속에 묻힌 삶이 즐겁다”고 말하는 김혁소설가
항상 느끼는것이지만 중국조선족이민사에서 유서깊은 룡정에 가면 “일송정 푸른솔”과 함께 “해란강가를 말 달리던 선구자”의 “거친 꿈”이 아직도 어느곳엔가 깊이 서려있는듯한 력사와 문화적 선각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 문화의 아우라에 꺼둘려 몇해전부터 굳이 고향 룡정으로 다시 이사와서 살고있는 중국조선족 중견소설가인 김혁선생을 찾아가는 걸음도 이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특히 선생은 책과 영화 등 문화적인 수집에 취미가 있고 우리 력사와 문화를 현실적인 시각으로 접목시키는 작업을 견지하면서 무게있는 문학작품들을 량산해내고있어 우리 문단과 세인들의 관심을 받고있기때문이였다.
김혁소설가는 20살이 채 안돼 10대부터 벌써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한 우리 문단의 기재(奇才)이다. 김작가는 소설뿐만아니라 시, 수필, 아동문학, 평론까지 다양한 문학분야를 골고루 섭렵하면서 재치있고 아름다운 필치, 빼여난 창작기교와 심금을 울리는 작품으로 애독자들의 깊은 사랑을 받아왔다.
김작가의 집은 일제시대 “영국더기”라고 불리웠던 룡정시 동산가 의산가원의 6층에 자리잡고있었다. 비가 오면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비소리가 듣그럽게 들려 청우재(听雨斋)라고 이름했다는 작가의 옥탑방서재에 들어서니 그야말로 온통 책의 나라였다. 60여평방메터 되는 동서남북 4면이 모두 책장으로 만들어져 책들로 빼곡하고 테블우는 물론 바닥에까지 책들이 무더기로 쌓여있었다.
그렇게 저그만치 책이 1만 3000권 이상은 있다고 했다. 이사할 때 178마대의 책을 짐져 올리면서 이사일군들이 지쳐서 혀를 빼물지경이였다고 한다.
문단과 사회에서 김작가는 “독서광”외에도 “영화수집광”으로 소문이 나있다. “청우재” 의 한 공간은 김작가가 지난 90년대 중반부터 모으기 시작한 각종 영상물들로 꽉 차있었다. 각종 영화영상물이 6000장은 된다고 소개했다.
김혁소설가의 “청우재” 옥탑방 일각
“중국조선족 공민들중에 나보다 영화를 더 본 사람 있으시면 어디 한번 나와 보시지?” 이렇게 호언할 정도로 김작가는 극성스런 영화수집광이였다.
김혁작가가 영화를, 테잎들을 본격적으로 수장하기 시작한것은 지난 90년대 중반부터였다. 수천권의 책과 비디오 하나만 달랑 지니고 연길북대의 작은 세방집에서 몇해를 홀로 자취한적이 있었다. 그때 작가의 외로움을 크게 달래준것이 영화였다. 홀로만의 지지리한 밤을 이겨내려고 비디오대여점에서 매일이다싶이 테잎을 3개씩 빌려다 보았다고 한다.
세계영화사의 경전은 물론, 할리우드의 흥행작이며 인도의 가무영화이며 향항의 깽영화며 지어 애니메이션영화까지도 걸탐스레 보았다. 북대부근의 비디오대여점을 다 돌고는 지어 멀리 철남의 대여점에까지 뻐스를 타고 가서 테잎을 빌려다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 문뜩 그저 이렇게 시간죽이기로 좋은 영화들을 감흥으로 흘려보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김작가는 좋은 영화들을 본격적으로 소장하기 시작했다.
먼저 세계명작 개편영화들로부터 소장했다. 쉐익스피어의 “햄리트”이며 살론브론데의 “제인에어”며 마거릿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며 유고의 “빠리노뜨르담”이며...
문자로만 읽었던 명작들이 아름다운 화면과 정감어린 육성으로 작가의 눈앞에 펼쳐졌을 때 김작가는 새로운 련인과 일견종정(一見鐘情)에 빠지듯 영화에 흠뻑 매료되고말았다.
그 다음에는 세계영화사의 경전들을 사들였고 그 다음에는 영화천국인 할리우드의 대작들을 사들였고 그 다음에는 중국신예감독들의 전위적인 영화를 사들였고 그 다음에는 흥행세를 보이고있는 한국영화들을 사들였다. 지어 영화평론가들이 “쓰레기”라고 지칭하는 무협영화나 깽영화도 선택해보면서 그 폭력적 미학과 비주류 미학이 주는 류다른 감수를 즐기기도 하였다.
그렇게 박봉을 깨서는 “새앙쥐 콩알 물어 들이듯” 한편 두편 사들여 소장한 영화가 테잎으로, DVD디스크로 저그만치 6000여부, 짜장 하나의 영화고(庫)로 된것이다.
“하루 한편씩 본다고 할 때 20년은 꼬박 봐야 하는 분량”이라고 김작가는 소개했다.
지금도 김작가는 평소 시간날 때면 하루에도 5~6편씩 스스로 영화파티를 벌리면서 영화가 주는 깊은 향수속에 빠져있다.
“시와 노래, 가무, 회화, 조각과 건축에 이어 인류는 영화라는 쟝르를 탄생시켰습니다. 각 쟝르의 예술은 모두 인류가 세계를 관찰하는 하나 또 하나의 눈입니다. 때문에 영화는 ‘인류가 개안한 7번째 눈’이라고 학자들은 말하고있지요.” 하고 그는 영화라는 쟝르가 인류에게 하사한 공능과 의의데 대해 설명했다.
“영화는 인간의 유희적 욕망을 충족시켜줌과 동시에 사람들의 지적수요에 응분의 감수를 안겨주는 좋은 발명임에 틀림없습니다. 영화를 보는것이 우리 삶의 일부라면 영화속의 기복다단한 스토리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취미의 가능성을 열어두는것이 삶 그 자체로 볼수 있지 않을가요.”하고 김작가는 지론을 펼쳤다.
영화 “두만강”의 장률 감독과 두만강가에서
현재 우리 문단과 사회적으로 각종 수장열이 일고있는데 영화수집은 일상에서 아주 좋은 애호와 취미생활로 될수 있다고 김작가는 이어 말했다. 수집이라는것도 일단 빠지게 되면 그 분야에서 미치게 되는데 경제적인 부담도 뒤따른다. 그러나 영화가 작가의 창작생활에도 많은 영향을 주기때문에 아무리 경제적으로 어렵고 힘들어도 그 취미를 버릴수 없다고 김작가는 말했다.
김작가는 세계적인 명작영화라면 거의다 빠짐없이 소장했다. 명작영화 “제인에어”만 보더라도 각 년대별 흑백영화부터 시작해 채색, 지어 무대극 판본까지 다 소장했다. 년대별 시청자들의 심미적욕구와 시대적특성에 따라 명작영화도 부단히 리메이크되고 발전, 변화하는데 시기별 달라진 부분들을 대조하면서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했다. 그 차이점과 다른점을 찾고 연구하는것이 바로 영화수집가에게는 지대한 흥취와 락이 될수 있고 작가로서 그에게는 커다란 참조계로 될수 있다는것이다.
김작가는 외지 출장을 나갔을 때는 시간을 내여 꼭 각지 음향서점들을 돌아보는 버릇이 있다. 새로 나온 영화거나 기록편 같은 영상물들을 얻기 위해서이다. 지금은 인터넷으로 많이 구매하기도 한다. 구하기 힘든 오래된 판본의 좋은 영화들을 얻었을 때의 기분은 “낚시군이 월척을 낚았을 때의 기분과 비견할수 있는 짜릿한 그 맛”이라고 김작가는 말했다.
“지금에 와서 영화는 독서와 더불어 취미 이외의 내 삶과 같은것”이라고 김작가는 말했다.
필경 영화를 통해 만나는 명작이나 력사사건건들은 서책으로 느끼기보다 더 직관적이고 생동하고 립체적이다. 그것이 작가에게는 많은 상상의 공간과 무한한 창작이미지의 원천이 되고있다고 그는 말한다.
김작가는 단지 “영화광이”의 수집벽에만 그치지 않았다. 여러 간행물에 영화칼럼들을 대량 발표하는가 하면 자신의 블로그와 위챗계정을 통해서도 경전영화들과 새로 개봉한 영화들을 적극 소개하고있다.
“영화로 읽는 조선족”시리즈 련재물을 무려 3년간이나 “예술세계”잡지에 인기리에 련재하고있는데 이는 바로 영화라는 시안으로 들여다본 중국조선족의 력사라는 새로운 시도의 연구물로서 많은 독자와 평단의 절찬을 받고있다.
김작가는 문학창작에서도 영화수집의 덕을 톡톡히 입었다고 말했다. 특히 근년래 력사소재의 소설과 인물평전 창작에 주력하면서 력사에 대한 다큐영상물들을 대량 참조하였으며 많은 계시를 받았다고 소개했다.
이 몇년간 김작가는 연변에서 옥사한 청나라의 마지막 황후 완용의 비사를 다룬 장편소설 “완용황후”, 조선족 첫 위안부주제를 다룬 장편소설 “춘자의 남경” 등 굵직한 소재의 장편소설들을 창작발표했다. 명년에는 또 조선족으로서 중국영화사상 첫 “영화황제”로 선정된 김염의 일대기를 간행물에 련재한다고 한다.
또한 “윤동주평전” 등 인물전기창작에서도 성과를 올렸고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인물시리즈들인 “한락연”, “주덕해” 인물시리즈들도 륙속 출간해내고있으며 앞으로도 중국조선족 인물전들을 창작의 주요시간대에 놓고 더 창작해 나갈 타산이다.
김작가는 현재 고향인 룡정에서 룡정.윤동주연구회를 발족하고 윤동주연구기념사업, 조선족유적지 답사 등 력사와 문학의 만남도 적극 추진하고있다. 이 모임은 “애국, 애족, 애향의 원론적인 호소를 문학적으로 풀어 조선족들의 마음에 심어주는 문학인들의 올곧은 량심과 책무를 리행하고있다.”는 평가를 받고있으며 우리 력사와 문화에 소원해진 우리 시대 젊은이들과 문화인들에게 한줄기 빛이 되여주고있다.
김혁작가의 “청우재”에서 동쪽으로 산굽이를 따라 도보로 20분가량 가면 걸출한 민족시인 윤동주의 묘소가 있다. 한주 적어도 한 두번은 애견 두마리를 앞세우고 그곳까지 산책을 다녀오군 한다는 김혁작가의 산책길 명상이 궁금하다.
그것은 어쩌면 옥탑방 “청우재”에 거친꿈 꾸듯 조용히 묻혀있다가 일단 재생시키기만 하면 다시금 생생한 화면과 음성으로 살아나 펼쳐지는 멋진 영화처럼 작가가 가고자 하는 이 시대 문학인의 선각적인 한 모습이 아닌지 모르겠다.
编辑:안상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