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임 연변대학 농학학부 김수철교수에 대한 이야기
편집자의 말:
연변대학이 올해 학교창립 70돐을 맞이했다.연변지역 최고학부로서의 연변대학은 그동안 수많은 우수한 민족인재들을 양성해 조국건설과 사회번영을 위한 사업에 적극 기여했다. 오늘날 그 인재들을 키운 연변대학의 원로 교수님들은 자랑찬 연대인들의 빛나는 "별"들로서 학교와 사회의 존경과 애대를 받고 있다. 길림신문사는 연변대학 창립 70돐을 맞으면서 연변대학당위 선전부와 함께 연변대학 학과의 "별"들을 선정하여 륙속 보도한다.
95세 고령인 전임 연변농학원 김수철교수.
1925년생인 김수철교수는 올해 95세이다.
1949년도에 연변농학원 제1기생으로 공부한후 학교에 남아 다년간 농학학부 생물교연실에서 근무해온 김수철교수는 1987년도에 정년퇴직할 때까지 연변농학원에서 식물학, 과수분류학, 수목학, 농학라틴어 등 과목들의 교수와 교수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는 평범한 일터에서 부단한 자기개발과 학습으로 걸출한 교육인재로 되였으며 괄목할만한 성과와 기여로 학교와 사회의 애대와 존경을 받았다.
산에 들어가 식물과 만날 때가 가장 행복
지난 7월 12일, 기자는 룡정에서 만년을 보내고 있는 김수철교수님댁을 찾았다.
이젠 퇴직하신 몸이고 또 95세 고령이지만 김교수님의 집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과 각종 식물표본자료들로 넘쳐 있었다.
“식물채집은 식물연구의 가장 기초이다. 그래서 일요일이나 방학간 등 틈만 나면 식물채집통을 둘러메고 산으로 돌아 다녔다. 그렇게 쉴새없이 채집한 식물이 2만 5000장이나 됐고 이를 계기로 길림성로력모범의 영예까지 받아안았다.”고 김수철교수는 과거를 떠올렸다. 바로 연변농학원 재직시절 곧 퇴직을 앞둔 1986년도의 일이였다.
실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과 식물표본자료들.
“내가 만나려는 식물마다 저들이 갖고 있는 모든 정보를 나에게 끊임없이 전달해주는 데서 나는 눈고픔과 귀고픔을 말리는 매력에 도취되여 다른 여념을 가질 겨를이 거의 없다.” 김교수의 말이다. 산에 들어가서 식물들을 만나보고 연구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김수철교수는 말했다.
몇십년래 교수임무를 완수한 기초우에서 김수철교수는 방학이나 주말 같은 휴식시간을 리용하여 연변각지 특히 장백산일대, 심지어 동북3성과 내몽골, 안휘,산동, 운남, 해남도 등 전국의 방방곡곡에도 발자취를 남기면서 고등식물표본 1만5000여종이나 채집했다. 그중 식물표본으로 만든 것만 해도 9000여종이나 되며 각종 진균식물표본 2000여종이나 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아직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국화과 식물 3종을 발견하기도했다.
농학원 학생들의 현장실습을 지도하고 있는 김수철교수(왼쪽).
식물이란 것도 참 묘하게도 교통이 편리한 가기 쉬운곳에는 일반적인 식물이 많지만 교통환경이 어려운 곳일수록 희한한 식물이 많이 있다고 김수철교수는 다년간의 식물채집경험을 빌어 이야기했다. 그러한 희한한 식물채집을 위해 전국의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하루에도 60키로메터씩 산발을 타고 산에서 풍찬로숙하면서 비로서 수많은 결실들을 맺게 된 것이다.
김수철교수님은 1953년부터 론문을 쓰기 시작했다. 연변대학 교내에서 꾸리는 《학습과 연구》라는 간행물을 통해 연변라자식물지 론문을 썼는데 그것은 연변농학원 식물학사상 첫 론문이였다.
화가도 뺨칠 그림솜씨
채집한 식물들을 그림으로 잘 표현하는 것도 식물연구에서 매우 중요하다.
교수효과를 높이기 위해 김수철교수는 60세를 바라보는 년세에 회화강습반에 참가하여 소묘와 수채화기법을 배웠다. 그림재간을 익힌 후 자체로 편집, 제작한 농학, 과수, 림업전문 식물학, 수목학 교수용 환등편 750장을 만들었고 1200장의 식물조직 절편을 만들어 교수에 응용함으로서 식물교학과 그에 따른 과학연구를 위해 튼실한 기초를 마련해주었다.
그림그리기가 매우 익숙한 김수철교수.
김수철교수가 그린 버섯그림.
보다 좋은 회화기법을 익히기 위해 김수철교수는 북경식물연구소에서 그림그리기훈련을 받고 돌아온 연변약물검험소의 박씨성 사업일군을 스승으로 모시고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재간을 배웠다고 자랑했다. 붓으로 그림을 그리면 철필로 그릴 때보다 더 섬세하고 세밀하게 그릴 수 있어 지금도 그 그림재간을 배운데 대해 흡족해 한다.
김수철교수님이 그린 식물표본그림들은 웬만한 화가도 뺨칠 섬세하면서도 생생한 그림솜씨였다. 김수철교수님이 안경도 안거시고 천남성과의 대표적인 관엽식물인 안투리움을 생생하게 재현하는데는 채 10분도 안 걸렸다.김수철교님이 지금까지 그린 식물도본만 무려 2500장이나 된다.
정년퇴직후에만 17권(편)의 론저 출간
김수철교수는 1981년이래 자체로 편집 제작해서 학생들에게 많은 교재들을 내여 주었는데 《식물학실험지도서》 상, 하권 《길림성전간잡초명록》《식물학교재》(조선문통신학습용)《식물계통학》(일본어 연구생용) 《농학라틴문교재》(자체로 타자)《중국과수분류학간편교재》《연변농학원정원수목종지》《수목학실습지도서》《길림성수목학교재》하권 등 다수가 있다.
정식출판된 저서들로는 《장백산동북파경제식물지》《동북알칼리땅식물도감》《중국장백산채색식물도감》 《연변중초약》《장백산자원식물도감》 등이 있다. 이외에도 길림성국화과식물3개신기록종,중국국화과식물의 1개신기록종,연변야생사료식물명록 룡정현에서 나는 유용 및 유해진균의 조사초기보고 등 13편의 학술론문들이 국내외 학술간행물들에 발표되였으며 여러차 일본, 한국 등 국외의 학술세미나에 요청되여 학술보고를 진행하였다. 교수님은 정년퇴직후에만 17 권(편)이나 되는 귀중한 론저를 출간한 평생교수다.
화룡 청산에서 농학원 목축학부 학생들의 중초약실습을 지도하고 있는 장면.
김수철교수는 45년동안이나 연변농학원 식물학교연실에서 교학과 과학연구사업에 종사하면서 농학, 과수, 축목, 생물화학 등 농학원전업반과 의학원학생, 연구생들에게 식물학, 수목학, 과수분류학, 라틴어 등 교학을 담당하면서 국가 인재양성에 큰 기여를 하였고 한국 서울시립대학 박사연구생들의 장백산원정실습, 연변의학원 한국반생들의 장백산 현지 식물실습 등을 지도하였다.
교수연구에서 거둔 우수한 성과들 때문에 김수철교수는 1958년도에 연변농학원 모범교원 및 연변조선족자치주 사업모범으로 표창받았으며 1960년과 1963년에 농학원의 선진교원, 1978년도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우수교원의 영예를 따냄과 동시에 길림성우수교원대표대회 대표로 당선되였다. 1979년도에는 길림성과학기술활동 적극분자로 뽑혔으며 1986년에는 길림성 로력모범, 연변조선족자치주 로력모범 , 연변주 우수공산당원 등 허다한 영예의 꽃다발을 받아 안았다.
학자의 사명감으로 여생을 불태우는 평생교수
김교수는 퇴직 후에도 연변생물학회 리사장, 길림성 식물학회 리사, 길림성 초원학회 고문, 길림성 자연자원(동부 자원식물, 목초, 중초약재등)조사사업 기술고문, 중화인민공화국 동식물검역국(도문) 기술고문등 사회적인 직무를 맡고 로익장을 과시했다.
김수철교수가 정년퇴직 후에도 쉬지 않고 계속되는 식물연구에 몰두하고 있는데는 원인이 있었다.
이미 출판된 《길림성식물명록》에 빠진것이 너무 많고 심양 동북식물연구소의 보고서에도 틀린 것이 많기에 내가 보충해야 한다는 것이 김수철교수님의 생각이였다.
안도현 만보 서북차에서 학생들의 중초약학습 지도장면.
“길림성식물지는 반드시 출간해야 하는데 지금 그림을 직접 그리는 식물학자가 나밖에 없으니 내가 해야 한다.” 결국 그냥 지나칠수없는 학자의 량심과 사명감에서 시작한 일이였다.
김교수는 자기가 수십년간 수집한 2500종의 식물표본으로 《길림성식물지》 출판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식물표본그림에 질 좋은 채색사진을 배합하고저 만여원을 투자해 촬영기재를 새로 샀다. 고령의 몸으로 산발을 타고 돌아 다니며 수많은 사진자료들을 찍어왔다.
길림성식물지는 연변대학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도합 6권으로 출판될 예정인데 올해안으로 제1권이 출간된다. 이와 함께 김수철교수는 《길림성식물채색도감》의 출간도 계획중에 있다.
손녀 김영화(오른쪽)가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농학원교수로 재직중이다.
우연의 일치일가? 김수철교수의 손녀인 김영화도 현재 연변농학원에서 원예학과 교수로 근무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아온 김영화교수는 길림농업대학 생물공정학과를 졸업하고 할아버지의 제의로 한국중앙대학교에 가서 원예학 석박사를 전공한후 연변농학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할어버지의 뒤를 이어가고 있다.곧 출간되는 《길림성식물지》 역시 손녀와 할아버지의 공동주필로 만들어진다.
“우리 인간이 살아가면서 식물이 없다면 단 하루도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인간생존에 있어서 그만큼 중요한 생물자원이라는 말이지요. 우리는 식물에 대한 끊임없는 분류와 깊은 연구를 통해 그것들의 재배, 보호, 리용을 통한 유익한 재부를 창조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김수철교수의 바통을 이어받은 손녀 김영화교수의 식물학에 대한 추구이다.
90평생을 한우물만 파온 사람
1949년도에 연변농학원 제1기생으로 공부하고 졸업한후 연변농학원에 남아 오늘 이때까지 줄곧 농학계에 대한 교수와 연구를 진행해왔으니 김수철교수는 90평생을 곁눈 한번 팔지 않고 “한우물”을 파온 사람이라고 말할수 있다.
김수철교수는 “100년도 못사는 인생”인데 공부하고 사업하는 시간을 자기의 생명을 가장 필요한 곳에 쓰는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쓸데없는 일에 정력을 빼앗기지 말고 무슨 일이든 한가지 일에만 전념하면 끝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한국학자들이 김수철교수를 보고 “한 우물은 판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1955년도에 민족화보사 기자가 촬영한 김수철교수의 식물연구모습.
김수철교수는 누구나 한가지만 하라고 하면 쉽게 싫증나서 오래 견지하지 못하는데 사회에서 가장 요구하고 수요하는 것을 전문적으로 공격하고 돌파하면 이것이 바로 성공비결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물질위주의 요즘 세태에서 사람들이 재물에 대해 정신을 많이 팔고 있는데 재물은 작은 것이지만 희망을 잃으면 전체를 잃는것이라고 부언하기도 했다.
연변대학은 영원한 나의 모교
김수철교수에 따르면 1949년 연변대학은 창립초창기에 현재 연길시 하남의 인쇄공장부근의 위만주국시기 공업학교자리에 있었다. 건물만 있고 실험실도 없었다. 김수철교수가 공부했던 농학학부도 거기에 함께 있었다. 의학원은 따로 있었다. 후에 연변대학 학생숙사자리에 농학학부가 이사갔다. 일본군 사령부자리가 바로 학교였다. 그때 림민호 부교장이 참 수고가 많았다고 김수철교수는 추억했다.
연변농학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의 모습.
중국공산당의 배려하에 민족대학인 연변대학이 연길에 섰다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도 그 류례를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우리 당의 민족교육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민족정책의 우수성을 보여준다. 연변대학은 과거의 없던데로부터 하나하나 만들어졌고 건교 70돐을 맞는 지금은 학술적으로도 많이 성장한 우수한 대학으로 떳떳이 성장했다. 식물학면에서도 길림성적으로도 돌출한 인재들이 많이 나왔고 중대한 프로젝트와 식물지작성에서도 연변대학이 돌파를 가져왔다. 특히 연변대학에서 김수철교수의 식물지출간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조건을 창조해주고 지지해주니 90고령의 고령에도 용기를 내서 일하고 학교의 관심이 있어 항상 힘을 얻는다고 김수철교수는 감개무량해했다.
김수철교수는 자신의 몸은 부모가 낳아 주셨지만 학문은 연변대학으로부터 얻은 것이기에 그 은혜를 잊어서는 안되며 연변대학은 영원한 모교라고 말했다. 대학으로부터 많은 지식을 전수받았기에 모교를 위해 적극 공헌하고 싶은 생각뿐이다. 모두들 모교의 은혜를 잊지 않고 적극적으로 기여한다면 더욱 많은 우리 민족 우수한 학자들이 용솟음쳐 나올것이라고 김수철교수는 말했다.이것이 바로 70성상 연변대학과 함께 빛뿌려온 연변농학계의 별 김수철교수의 페부지언이기도 했다.
/안상근 김성걸기자
编辑:安相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