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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필 리력서에 깃든 의용군선전대원의 이야기

김태국      발표시간: 2020-10-19 13:30       출처: 길림신문 选择字号【

반춘방의 아들 리종화는 전 북경 인민무장경찰부대 문공단 악대 대장으로서 음악인이고 군관이다.

“오막살이 우리 집에 새 아침 왔다네”

솔직히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노래를 즐겼는데 이 때문에 뜻밖에도 군복을 입게 되였던 것이다. 노래는 마치 오색구름처럼 그의 동화세계에 날아들었다. 그러나 군생활은 필경 음악이 흐르는 그런 꽃같은 랑만이 아니였다.

반춘방(潘春芳)은 1945년 12월 화전(樺甸) 군정대학에 입학, 6개월 후 조선의용군 7지대에 편입되였다. 96세의 이 로인은 현존하는 조선의용군 제일 마지막 전사이다.

반춘방 로인의 자필 리력서.

어느날 기자는 북경 서부의 한 아파트단지의 거실에서 반춘방을 만났다. 그는 10년 전에 짬짬이 적었던 무려 수십페지의 자필 회고록을 우리 앞에 내놓았다.

반춘방은 한국 경상남도 통영군의 한 량반 가족 출신이다. 조부는 큰 목수로 늘 밖에서 돌아쳤고 조모님이 가사(家事)와 농사를 거의 혼자 도맡다싶이 했다.“할머니는 벼 두 가마니를 각기 겨드랑이에 끼고 등에는 아이를 업었다는데요, 일년 농작물을 그렇게 혼자 집으로 날랐다고 합니다.” 반씨 가족에 구전하는 전설같은 이야기이다. 재간 있는 조부와 부지런한 조모가 있어서 식구들은 배를 곯지 않았다. 그러나 한일합병 후 생활은 갈수록 쪼들려갔다. 1918년, 조부는 10여명의 식솔을 이끌고 배를 리용하여 압록강 하구의 신의주로 이동, 강 이쪽의 어느 무인지경에 이불짐을 내려놓았다. 키를 넘는 쑥대밭이였지만 온 가족이 땀을 아끼지 않은 덕분에 자족한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쌀뒤주에 어느 정도 여유가 있게 되자 반씨 가족은 이번에는 오지의 길림시(吉林市) 화전(樺甸)지역으로 이주를 했다.

1924년, 반춘방은 화전자의 산골에서 고고성을 터뜨렸다. 아버지 반화정(潘化晶)은 어린 반춘방에게 어쩌면 구름같은 신기한 존재였다. 지척에서 손에 잡힐 듯 하면서 또 하늘가의 아득한 곳에 있었다. 늘 어디론가 바람처럼 훌 떠나버렸고 어느 날인가 귀신처럼 불쑥 집에 나타났다. 그의 비밀스런 행적은 8.15 광복 후에야 비로소 정체를 전부 드러냈다.

“아버지는 반일지사였는데요, 독립군에서 활동했다고 합니다.” 반춘방의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있는 아버지의 옛 형상이다.

광복이 나자 아버지는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갔고 한 때 정부 요원으로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면 어린 딸애는 그림자처럼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아버지는 짬만 있으면 낚시를 들고 동네어구의 강을 찾았다. 그 때면 반춘방은 다라치(다래끼의 방언)를 둘러메고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아버지는 낚시 바늘에 파리를 꿰어 물속에 넣었다. 낚시찌가 물속에 쑥 들어가면 곧바로 낚시를 잡아챘고 잇따라 딸의 손바닥 크기의 붕어가 물우에 불쑥 뛰여올랐다.

그 때 그는 우리 글을 배웠다. 아버지는 꼬챙이로 모래우에 자모음을 쓰고 딸애가 그걸 읽으면서 다시 모래우에 옮기게 했다. 후날 반춘방이 자필 기록물로 쓴 우리 글은 이렇게 눈과 손에 처음 익혔다. 동네의 조촐한 온돌방에 작은 서당이 생긴 것은 썩 후의 이야기다.

노래도 이렇게 강가에서 물처럼 흘렀고 어느덧 물줄기를 이뤘다. 아버지는 퉁소를 잘 불었고 장구 치기를 즐겼다. 판소리도 곧잘 했다고 한다.

아버지를 따라 익힌 노래재간은 미구에 반춘방을 공연 무대에 오르게 했다. 반춘방은 여섯 살 때 학교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연분홍 옷차림을 하고 무대에 올라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오막살이 우리 집에도 새 아침 다가왔다네.

에라 좋구나 에라 좋구 좋다…”

그런데 오막살이의 우리 집에 난데없는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어머니는 산후병으로 급작스레 사망했고 아버지는 나그네처럼 떠돌아다녔다. 어린 반춘방은 졸지에 홀로 초가에 남았다. 추운 겨울에도 핫저고리에 홀치마 차림이였고 얻어서 꿰찬 신발 코숭이에는 발가락이 삐죽이 머리를 내밀었다. 반춘방은 아홉 살 때 친척을 따라 길림시 영길현(永吉縣) 대툰(大屯)의 개척지로 멀리 자리를 떠야 했다. 그후 아버지가 재혼했고 반춘방은 차츰 나이가 들면서 잡역 생활을 시작했다. 일장기는 미구에 반도를 이어 동북 땅 나아가 대륙 지역에 휘날리고 있었다. 반춘방은 날이 갈수록 지인들이 왜서 저마다 반일행동에 나서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난의 행군같은 지긋지긋한 세월은 강물처럼 그렇게 하루 또 하루 흘러갔다.

의용군 7지대 선전대 녀대장이였던 반춘방과 남편 리정림.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고했다. 그해 말 반춘방은 단연 화전군정대학에 신청한다. 6개월의 훈련과 학습을 마친 그는 조선의용군 7지대 선전대에 가입하였다. 7지대 선전대는 두 팀이였는데, 반춘방은 제2선전대 대장을 담임했다.

이 무렵 두만강을 건너온 김광출(金光出)도 조선의용군 3지대 선전대에 가입하였다.

조선과 중국 여덟 극단의 ‘미치광이'의 배우

김광출의 본명은 항렬자를 따른 김응선(金應善)이다. 후날 연극에 미쳤다는 의미의 김광출(金狂出)이라고 개명했다. 그러다가 이름자에 달린 미친 광(狂)을 빛날 광(光)으로 다시 바꿨다고 한다.

1930년대 말경 연변 팔도지역의 한 조선인 가족(제일 아래쪽 줄의 우2가 최금순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소재지인 연길시의 한 아파트단지 자택에서 김광출의 미망인 최금순을 만났다. 86세 고령의 최금순은 이날 지금까지 서랍에 꼼꼼히 챙겨두고 있던 남편의 자필 리력서와 옛 사진첩을 내놓았다.

자필 리력서에 따르면 김광출의 부친 김병모(金炳模)는 1920년대 반도 로동운동의 백미를 장식한 원산 총파업의 주모자였다. 이 때문에 체포되여 5년 형기를 살았고 김광출이 여섯살 나던 해 비로소 출옥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후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가문의 대들보가 왕창 무너진 셈이였다.

“엄마는 유모노릇을 하다가 남의 집의 빨래를 하였고 누님은 민며느리로 들어갔습니다. 형은 시내 어느 자전거수리공장의 직원으로 되였고 저(김광출)는 학교에서 중퇴하고 신의주 인쇄소의 식자공으로 되였습니다.”

김광출의 자필 리력서 일부.

어릴 때의 서글픔은 자필 리력서의 구구절절에 먹물처럼 피고 있었다. 배고픔을 참지 못해 종이를 바르는 풀을 남몰래 먹기도 했다고 김광출은 후날 식구에게 얘기한다. 다행이 이모의 덕분으로 김광출은 다시 공부를 할 수 있었고 상업학교까지 진학할 수 있었다고 자필 리력서가 서술한다. 학업을 계속할 수 있은 기회를 소중하게 여긴 김광출은 학기마다 우등생으로 되였으며 이 때문에 급장으로 될 수 있었다.

일희일비의 세상이였다. 슬픔과 기쁨이 번갈아 일어났다. 하늘 아래의 큰 연극무대를 뛰노는 것 같았다.

김광출이 연극을 언제 어떻게 배웠는지 자필 리력서에서는 읽을 수 없다. 분명한 건 그가 어릴 때부터 몸으로 익힌 생활이 곧바로 드라마 같은 연극 그 자체였다. 1945년 8월, 김광출은 조선 평안북도예술공작단 배우로 있었으며 이듬해 10월부터 선후로 조선 평안북도 청춘무대와 조선 평안북도 건설무대의 배우로 있었다.

조선 극단의 유명인이였던 김광출은 후날 연변으로 이주한다. 1947년 3월부터 김광출은 길림성 도문(圖門)의 로농(勞農)극단 감독으로 있었다고 자필 리력서에 기록한다. 국경을 넘은 ‘팔방배우'의 연극 무대는 결코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있었다. 김광출은 북부의 할빈(哈爾賓)에 외출을 갔다가 조선의용군 3지대 선전대의 공연을 관람하게 된다. 이때 김광출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단연 입대를 신청했다. 그가 도문에서 극단 감독으로 입단한 그해인 1947년 7월이였다. 김광출의 말을 그대로 빈다면 선전대의 연극에 미쳐서 의용군의 군복을 입었고 이 때에도 연극 감독이자 배우 신분이였다고 한다.

조선의용군은 전신이 1938년 대륙 중부의 호북성(湖北省) 한구(漢口)에서 창설된 반일독립단체인 조선의용대이다. 1942년 7월, 조선의용대의 주력은 화북(華北) 조선독립동맹이 지도하는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였으며 팔로군(八路軍)에 소속되여 활동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포하자 조선의용군은 팔로군 주덕(朱德) 총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동북에 진출했다. 11월, 료녕성(遼寧省) 심양(沈陽) 근교의 오가황(吳家荒)에서 회의를 열고 일부 간부를 제외한 대원들은 3개 지대로 나뉘어 주력부대와 배합하여 중국 해방투쟁에 참가한다고 선포했다.

조선의용군 1지대는 심양을 중심으로 한 남만 지역, 3지대는 할빈을 중심으로 한 북만 지역, 5지대는 연길(延吉)을 중심으로 한 동만 지역으로 파견된다. 의용군 5지대가 동만으로 향발하던 도중에 길림에서 30여명이 선발되여 새로 7지대가 성립되였다. 이때 반춘방은 조선의용군 7지대 선전대에 편입되며 이어 연변 지역으로 진군, 연길에 도착한다. 5지대는 연길 서쪽의 조양천(朝陽川)에 주둔하여 연변 일대에서 활동, 군대확장과 선전공연 활동을 전개했다.

7지대 선전대는 연길에 도착하자마자 안도(安圖)에 토비숙청을 나갔다고 반춘방이 자필 리력서에서 쓰고 있다. 그들은 안도에서 돌아온 후 5지대와 더불어 개편을 했다고 한다.

“우리 선전대는 나중에 다 길림성군구(정치부)문공단으로 개편을 했습니다. 문공단은 2개 대대로 나뉘는데요, 1대대는 현재의 길림성가무단의 전신으로 한족들이고, 2대대는 조선족들이였습니다.”

그나저나 반춘방은 얼마 후 선전대 생활을 떠나게 된다. 1949년, 안도 토비숙청 때 장관 리정림(李正林)과 만나 천년가약을 맺는데, 리정림이 도문시 무역국(군사관제) 국장으로 취임하면서 이 때부터 반춘방은 예술단과 인연을 끊게 되였다.

옛 사진에 남은 70년 전의 기록

1945년 8월 8일, 쏘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동북지역에 진출했다. ‘중쏘우호동맹조약'에 따르면 쏘련군은 동북지역을 장개석(蔣介石)의 국군에 넘겨줘야 했다. 명령을 받고 동북에 륙속 진출한 팔로군, 신사군(新四軍)은 동북인민자위군과 함께 동북인민자치군을 구성했다. 1946년 1월, 동북민주련군으로 개칭하고 림표(林彪, 후날의 국방부장)가 총사령관을 담임했으며 동만, 서만, 남만, 북만 4개 군구를 통솔했다. 1948년 1월, 동북민주련군은 동북인민해방군으로 개칭, 민주련군 본부를 동북군구 겸 동북야전군 지도기관으로 개칭했다. 동북야전군의 12개 종대는 1948년 말 중국인민해방군으로 12개 군단으로 개칭되며 이듬해 3월에는 정식으로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으로 개칭된다.

김광출이 소속한 조선의용군 3지대 선전대도 이에 따라 선후로 동북인민해방군 동북군구 독립 11사단 선전대,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제164사단 선전대로 개칭된다. 반도의 정세가 갈수록 긴장되면서 중국공산당 부대의 조선인 현역군인은 상부의 명령과 배치에 따라 조선에 대량 진출했다. 조선인이 주축을 이룬 제164사 제166사단, 제156사단 466련대는 각기 조선인민군 제5사단과 제6사단, 제12사단 30련대를 편성한다. 기타 부대에 소속되여 있던 조선인 군인도 상당 부분 국경을 넘으며 인민군의 기타 보병사단과 제603기계화련대, 제105땅크사단을 편성하거나 배속되였다.

구술과 론문, 군사(軍史) 등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조선에 귀환한 조선인 군인은 약 5만명 정도로 집계되고 있다.

사진의 하단부터 우쪽으로 두번째 줄의 좌1이 정률성, 좌3이 김광출이다.

김광출은 조선인민군 예술극단에 편입되여 배우 겸 감독으로 되였다. 이 무렵 쏘련인 고위간부를 환송하면서 촬영한 것이라고 전하는 옛 사진에서 김광출은 인민군 복장 차림으로 정률성(鄭律成)과 나란히 등장한다.

정률성은 한국 전라남도 출신으로 본명이 정부은(鄭富恩)이다. 1933년 정률성은 당시의 중국 수도 남경에 와서 조선인들의 항일조직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혁명을 시작했으며 한편 음악을 배웠다. 1937년 7.7사변 후 중국공산당의 성지인 연안(延安)에 갔다. 1938년 8월 로신(魯迅)예술학원을 졸업한 정률성은 항일군정대학에서 음악을 가르치면서 작곡을 했다. 그는 선후로 '중국의 아리랑'이라고 불리는 ‘연안송(延安頌)', 중국인민해방군 군가인 ‘팔로군 행진곡’등 많은 노래를 작곡했다. 1942년 8월, 조선의용군의 유생역량을 보존하고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중공중앙과 팔로군은 화북(華北)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를 설립하는 데, 이때 무정(武亭, 의용군 총사령관)이 교장을 담임하며 정률성이 교무주임을 담임했다. 1945년 말, 조선에 간 후 정률성은 1947년에 조선 보안간부 훈련대대부 협주단을 창단한다. 조선인민군은 보안대에서 출발하는데, 협주단은 나중에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직속 예술단으로 승격되며 조선인민군협주단으로 개명된다. 정률성은 또 3.1독립운동을 기리는 노래 '3.1행진곡', 조선인민군 공식 군가인 ‘조선인민군 행진곡', 대합창곡 '동해어부' 등  작품을 남겼다. 그러다가 1950년 9월, 중국 주은래(周恩來) 총리의 요청을 받고 김일성 주석의 동의를 받아 중국에 돌아와서 음악창작 활동을 계속했다.

1953년 1월, 부상으로 단동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김광출은 아예 중국에 이불짐을 내려놓았다. 연변 초대 주장 주덕해(朱德海)의 연극단 창설 요청을 수용했던 것이다. 주덕해는 조선의용군 3지대의 정치위원으로 지대의 연극 ‘미치광이’김광출을 일찍부터 잘알고 있었다. 1956년부터 김광출은 연변가무단의 파견을 받아 중앙연극대학 감독 연수반에서 공부를 하면서 1년 남짓이 북경에 거주하게 되였다.

김광출이 입단한 연변가무단(전칭 연변조선민족자치구 가무단,)은 연변예술단의 전칭이다.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민족자치구가 설립되면서 바뀐 기구 명칭이다. 이에 앞서 연변문예공작단(연변문공단)으로 불렸다고 한다. 연변조선민족자치구는 1955년에‘연변조선족자치주'로 변경된다.

1959년 연변 연극사의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 대표작의 하나 "장백의 아들" (감독 김광출) 한 장면.

김광출은 연변가무단의 연극 감독, 업무비서로 취임했다. 그후 연극단은 연변가무단에서 분리되여 연길현연극단과 합병, 연변연극단으로 되였으며 2006년 종국적으로 연변가무단에 합병되여 연극부로 편성되였다.

김광출은 연변연극단의 견증자요, 그보다 반백년 력사의 일부이다. 회갑 나이에 즈음한 1984년 김광출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인민정부로부터 그가 30여년동안 주 문화예술사업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상을 수여받았다.

의용군 선전대장 반춘방은 도문시 무역국 국장인 남편을 따라 이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반춘방은 년대에 따른 리력을 자필 회고록에 또박또박 적어놓고 있었다.

“19501960년 도문시 무역국 룡정백화상점 인사계획과 근무, 공회 주석

19581959년 룡정진(龍井鎭) 편직물공장 공장장

1961962년 연길현공소(供銷, 공급과 판매)합작사 통계 사업

19651966 연길현특산물회사 폐품상점 주임.”

그 후 반춘방은 맨발의사(초급의료기술자) 훈련반에 참가하여 100일 동안 인체구조와 약학, 침구, 병리 등 의학지식을 습득한다. 훈련을 마친 후 특산물회사에 돌아와 기구를 설치하고 간단한 의료작업을 시작한다.

“재직기간 문화활동에 적극 참석했는데요, 현지 문화관의 가무단 기술 지도를 맡기도 했어요. 제가 지도한 무용은 길림성 문화회보공연대회에서 단체우수상을 받았습니다.”

반춘방은 상업국 간부 등으로 일하다가 리직(離職)한다. 그의 자필 경력서는 이때 종지부를 찍고 있었다.

사진/글 북경 김호림(중국국제방송)

编辑:김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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