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산, 초심을 잊지 않고 중국 마이크로파 원격탐지 기술을 추동
[편집자의 말]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70주년, 중국과학원 건원 70주년에 즈음하여 우리는 특별히 우주과학의 “가장 밝은 별”계렬보도로 새시대의 우주과학인들을 격려하고 세계과학기술강국과 우주과학강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용감하게 최고봉에 톺아오르는 정신으로 찬란한 편장을 써놓은 로일대 과학가들의 정신세계와 애국정서를 계승발양하기로 한다.
제5기는 중점적으로 우주중심의 강경산원사를 소개하기로 한다. 강원사는 우리나라 마이크로파 원격탐지 및 항천정보공정과학전문가이며 중국 원격탐지 기술의 주요한 창도자의 한분으로 마이크로파 원격탐지 기술의 주요한 개척자이다.
본문은 중국과학원국가우주과학중심연구생 제3당지부가 강원사에 대한 인터뷰 실록이다. 우리 함께 강원사의 인터뷰를 통해 그의 마이크로파 원격탐지에 관한 전기적인 인생을 알아보기로 하자.
강경산, 1936년 2월 길림성 룡정시에서 출생, 남, 조선족, 중국 마이크로파 원격탐지 및 항천정보공정과학가, 중국공산당 당원. 1962년 전쏘련 레닌그라드전공학원을 졸업하고 1981년부터 1983년까지 미국에서 마이크로파 원격탐지 연구에 종사하였다. 그는 일찍 중국 유인항천공정 응용계통 부총지휘, 신주4호 주페이로드 주임설계사, 달탐사공정 부총설계사 등 직무를 담임했다. 현재 중국과학원 마이크로파 원격탐지 기술중점실험실 수석과학가, 중국과학원 국가 우주과학중심 학위위원회 주석, 국제 우주과학위원회 중국위원회 위원이다.
쏘련에서 귀국한 후 그는 선후로 우주로케트 탐측의, 원격측량, 위치 및 상관 기술계통연구에 종사하였으며 원격탐지 기술을 추동하여 재해방지와 통제방면의 응용연구를 진행하였으며 우리 나라 마이크로파 원격탐지 계획초안을 작성하였다. 미국류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에는 줄곧 마이크로파 원격탐지 및 항천정보공정연구에 종사하였는데 중국 원격탐지 기술의 주요한 창도자의 한사람이며 마이크로파 원격탐지 기술의 주요한 개척자이다. 그는 중국 유인우주응용공정의 조직자와 령도자로서 그가 연구제작한 ‘신주4호' 주페이로드 ‘다중형 마이크로파 원격탐지기'의 발사는 우리나라 항천 마이크로파 원격탐지 령기록을 돌파하였으며 중국 마이크로파 원격탐지 업무위성의 기동과 발사를 추동하였다. 그는 중국 달탐사공정의 주요한 추진자의 한사람으로 국제상에 마이크로파로 달의 궤적에서 달 표면을 탐측할 것을 제출하고 실현시켰으며 과학소조를 령도하여 세계적으로 처음으로 ‘마이크로파 달'을 창건하여 일계렬의 원시 혁신성과를 거두었다.
1992년 국가과학기술진보1등상을, 1995년에 국가과학기술진보2등상을, 2009년에 국가과학기술진보 특등상(순위 11)을 수상하고 성부급 과학기술진보상 10여차 수상하였으며 본인은 여러차례 ‘중국유인우주공정 돌출공헌자', ‘달탐사공정 돌출공헌자' 및 ‘증헌재유인우주 돌출공헌자상' 등 다수의 영예를 지녔다.
1999년에 중국공정원 원사로 당선되였다.
물음1. 우리는 당신이 소년시절에 매우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우연한 기회에 북경에 와서 공부하게 되였으며 고중을 졸업한 후 쏘련에 류학을 가게 되였다는 것을 알게 되였는데 자신의 학업 경력과 인상 깊었던 일들을 이야기해줄 수 있는가?
강경산: 나에게는 험난한 고학의 길이 있었다. 어린 시절 길림성 룡정시에서 일본인이 설립한 홍중소학(해방 후 룡정소학으로 개칭)에서 공부하였는데 당시 학교는 모두 일본인이 경영하였기에 상학할 때는 일본학교의 학생차림을 해야 했다. 1949년 겨울 나는 연변에서 비교적 유명한 룡정중학에 입학하였다. 원래 우리는 겨울에 졸업하기로 하였는데 후에 개혁하면서 여름에 졸업하게 되였고 그래서 나는 2년반의 시간으로 3년 과정을 마쳤다. 1952년 7월 우수한 성적으로 초중을 졸업한 나는 두 동학과 함께 길림고중에 추천받아 고중공부를 하게 되였다. 그런데 형님은 현재 소수민족에 대한 국가 정책이 매우 좋은데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 북경에 가서 고중을 다니라고 하는 것이였다. 당시 16살인 나는 가장 먼 곳이라야 40여리 밖의 연길을 다녀온 적이 있었지만 그래도 형님의 말대로 북경에 가서 공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때 나는 4원을 가지고 떠났는데 키가 작은데다 등에 이불짐까지 메였다. 나는 먼저 대련에 갔다. 대련에서 이틀을 있으면서 형님의 친구한테서 5원을 꿔서야 배에 앉아 천진 당고에 이를 수 있었다. 당시 돈이 없었기에 나는 동물을 운송하는 화물선을 탈 수밖에 없었다. 원래 하루면 도착할 수 있었는데 밤에 태풍을 만나 모두 화물창에 밀려 들어갔다. 나는 배멀미로 얼마나 많이 토했는지 모른다. 당고에 도착하여 뻐스를 타고 천진에 이르러 천진역을 찾아가 북경 전문기차역으로 가는 차표를 끊었다. 이렇게 천리길을 전전하여 겨우 북경에 도착하여 공부하게 되였다.
국가에서는 1950년부터 학생들을 쏘련에 파견해 류학을 시켰다. 1955년 6월의 어느날 교도주임이 고중3학년 전체 회의를 소집하고 당년 학교의 쏘련류학 추천선발 후선인명단을 선포하였는데 3년간의 학습성적과 도덕품성 및 가정정황에 대한 고찰을 거쳐 나와 기타 3명의 학생을 후선인으로 추천하였다. 최종 나는 우수한 성적으로 쏘련류학시험을 통과하고 북경로어학원 류쏘훈련반에 들어가 1년동안 로어를 학습하였다.
1956년 거듭되는 심사를 거친후 나는 성공적으로 쏘련 레닌그라드의 우리야노부전공학원에 류학가 거기서 5년간 공부하게 되였다. 내가 쏘련류학을 할 때 졸업성적은 만점인 5점이였는데 자기가 쓴 론문을 가져올 수 없기에 귀국한 다음 기억에 근거하여 다시 론문을 써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나의 구학길에서 쌓은 보귀한 경력이며 나에게 심각한 인상을 남겼다.
물음2. 배움의 길에서 선생님의 세심한 지도를 떠날 수 없는데 이를테면 전학삼 등 선배와 미국의 모르교수 등이다. 그렇다면 그들과의 교류에서 서신교류나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이런 선생님이나 선배들이 당신에게 가장 심원한 영향을 준 것은 무엇인가?
강경산: 이런 선생님이나 선배들이 나에게 준 영향은 모두 매우 크다. 그들은 특별히 나의 생각을 중시하였으며 나에게 커다란 고무격려를 주었다. 나는 ‘통현회의'이후 늘 전로(전학삼)에게 서신형식으로 사업을 회보하였는데 전로는 나를 몇년간 지도하였다. 그는 나의 인생도사이며 중국 마이크로파 원격탐지기술의 추진자이다. 당시의 정치환경이 매우 복잡하고 연구조건이 매우 차했다. 전로는 편지를 보내와 나를 고무격려하였는데 나더러 곤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는 당년에 미국에서 로케트기술을 창립하던 때를 례로 들어 내가 곤난을 극복하고 견지하면 이제 10년, 20년이 지나 마이크로파 원격탐지기술은 하나의 매우 큰 과학기술로 발전할 것이라고 고무격려하였다. 그때 나는 매우 큰 고무를 받고 자기의 전업저작을 완성하였는데 중국의 마이크로파 원격탐지 기술을 처음으로 국제에로 나가게 하였다. 당시 이 몇분의 선생님과 선배들은 나의 생각을 긍정하고 내가 연구제작한 설비를 참관하였는데 특별히 모르교수는 직접 국내에 와서 나를 지도하였다. 그들은 나의 사업을 특별히 긍정하였고 각 방면에서 모두 매우 지지하였다. 그들이 나의 사업을 긍정하였기에 나는 줄곧 마이크로파 원격탐지사업을 견지할 수 있었다.
물음3. 구쏘련 류학시절 울리아노프전기공정학원에서 무선전기술을 학습한 점과 선생이 항천 원격 탐지사업을 선택한 데에 련계가 있는지? 무엇이 선생으로 하여금 당년의 간고한 조건에서 줄곧 중국 항천 및 전자파 원격 탐지 사업에 대한 연구를 견지하게 한 것인지?
강경산: 1957년 10월 4일, 구쏘련에서 인류 첫 인조지구위성을 발사한 일은 나한테 준 영향이 컸다. 당시 나는 졸업 전이였지만 ‘인조 위성’사업을 자신의 지향으로 정했었다. 그랬기에 당시 구쏘련을 방문 온 우리나라 대표단이 류학생들의 생각을 청취할 때 나는 그 때 이미 나는 중국의 인조위성 사업에 투신하겠다고 확답할 수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설립한 중국과학원 ‘581’연구팀은 전학삼이 조장, 조구상이 부조장을 맡고 있었는데 바로 인조위성을 연구하는 연구팀이였다. 귀국후 나는 뜻대로 581팀에 가입해 로케트 위치 확정 계통의 연구에 몰입했다. 그때로부터 나는 진정 우주공간연구대오 중의 일원으로 되였다. 나라에서 나를 양성시켰으니 나는 마땅히 조국에 보답해야 한다. 나의 이 지향은 나로 하여금 끝까지 중국우주 전자파 원격 탐지사업에 대한 연구를 견지하게 했다.
류학시절의 기숙사를 다시 방문한 강경산 .(1999년 9월, 레닌그라드 제1모린스키거리 3동 1번 아빠트)
물음4. 1955년에 구쏘련에 류학해 1962년에 귀국한 선생님은 그간 1957년 구쏘련이 첫 인조지구위성을 발사하는 데 성공한 것을 보았고 또 졸업을 앞두고 도사로부터 계속 구쏘련에 남아 박사과정을 제안해 만류도 있었다는 데 무엇이 선생으로 하여금 국외의 이런 우월한 조건을 물리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초심과 사명을 안고 결연히 귀국 길에 오르게 했는지?
강경산: 어머니가 조선족 동요 〈반달〉을 부르는 것을 자주 들으며 크면서 그 때로부터 나는 달과 태공에 대한 탐색에 많이 흥미를 느꼈었다. 나는 오직 우주항공사가 되고 량호한 신체 자질을 갖추어야만 달에 갈 수 있다고 여겨 줄곧 신체단련을 견지하며 달탐사 꿈을 키워왔다. 1957년 구쏘련이 인류 첫 인조지구위성을 발사하여서부터 나는 중국의 인조위성사업에 종사하리라는 뜻을 품었다. 때마침 1958년 모택동주석이 “우리도 인조위성을 띄워야 한다 ”는 위대한 호소를 내렸다. 하여 당시 중국 공업 제4기계부 부부장으로 있은 왕세광이 구쏘련에 와 류학생 중에서 관련 전망자를 선발할 때 나는 자진해 나서서 중국의 인조위성사업에 투신하겠다고 했다. 하여 1962년 류학을 마치고 귀국 했을 때 나는 581팀에 배치돼 우리나라 첫 인조지구위성의 연구제작사업에 참여할 수 있었고 그 때로부터 나의 우주사업 생애를 시작했던 것이다. 류학시절 나한테 가장 영향을 준 책은 바로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였는가 》이다. 이 책을 나는 지금도 청년들이 봐야 한다고 추천한다. 시대는 달라졌어도 그런 견강한 의지를 어떻게 키워냈는가 하는 것은 지금까지도 매우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그때로부터 나의 인생관은 대중을 위해 복무하고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데로 전환되였다. 조국이 나를 키워주었음을 잊지 않았다. 하기에 조국이 필요할 때 나는 결연히 귀국길을 택할 수 있었다. 그 때 그 초심은 지금도 변함없고 앞으로 영원히 지켜 갈 것이다.
물음5. 선생은 우리나라 첫 인조지구위성 설계 프로젝트 참여자로서 후엔 중국의 우주 원격 탐지 사업을 개척해 중국 마이크로파 원격 탐지 사업의 정초자로 되였는데 선생은 어떻게 관측 제어령역으로부터 원격 탐지라는 신흥 령역에로의 엄청난 도전을 타파하고 새로운 령역에 진입해 독창적인 기여를 할 수 있었는지?
강경산: 나는 구쏘련에 류학간 기간 탄탄한 토대를 닦았다. 귀국후 우리나라 첫 위성의 ‘포착’관측 임무팀에 참여했다. 다시 말하면 이 첫 인조위성에서 운반로케트와 레이더의 위치 확정을 완성하는 것이였는데 그 기간 안휘성 무림사절도 지역의 탐공로케트 발사 기지에서 ‘탐공로케트 훈련 ’을 진행했다. 당시 조건은 매우 간고했다. 우리는 산속에 진입해 몇개월 작전해야 했지만 모든 사람이 맡은 바 일에 열중하면서 그 어떤 원망도 없었다. 후에 우리는 전부 섬서 종남산의 편벽한 지역에 설치된 ‘112 ’작업장에로 옮겼다. 우리는 모든 용품을 이곳에 있는 자그마한 소매점에서 사서 해결해야 했다. 오죽했으면 우리는 그 매점을 ‘왕부정’이라고 불렀으랴. 이곳의 조건은 그 정도로 간고했지만 이곳에서 우리는 끝끝내 중국의 첫 인조위성 연구제작을 실현했다.
‘112 ’작업장의 소매점
중국 첫 탐공 로케트 발사
위성이 성공적으로 발사된후엔 위성이 하늘에서 해야 할 작업에 대해 연구해야 한다. 이 문제에서 나는 줄곧 마이크로파 원격 탐지를 완성해야 한다고 견지했다. 후에 나는 ‘통현 회의 ’에 참석해 정식으로 마이크로파 원격 탐지 연구사업을 확립했다. 그뒤로 나는 줄곧 전학삼선생한테 사업의 진척상황을 회보했는데 전학삼선생은 줄곧 나를 고무해 주었다. 이는 나로 하여금 큰 신심을 지니게 했다. 1979년 나는 전학삼선생한테 편지를 써서 내가 쓴 전문 저서 《마이크로파 촬영 》을 회보했는데 전학삼선생은 “당신이 이 저서를 완성하면서 전자파 촬영 전문가로도 되였네. 당신은 자학하여 인재로 된 전문가이지 외국사람이 양성해낸 전문가가 아니네 ”라고 답장을 보내 주었다. 이는 나로 하여금 큰 고무를 받게 했다. 나는 《마이크로파 촬영 》의 사유에 근거하고 또 국제적 관련 발전동향에 대해 료해하며 매번의 기회를 다잡았다. 1979년 나는 영국에서 개최된 구라파주 마이크로파 회의에 참가해 마이크로파 촬영에 관한 론문을 발표했는데 론문은 영국의 《마이크로 웨이브 시스템》이란 잡지에 발표되였다. 이는 우리 나라가 최초로 국제회의상에서 발표한 마이크로파 원격탐지분야의 론문이였다.
물음6. 신주4호 다중마이크로파 원격탐지기가 중국 우주 마이크로파 원격탐지의 기원을 열었다. 그의 성공적 발사는 중국의 해당 령역의 공백을 메웠다. 단일 모드 기제를 뛰여 넘은 이런 대담한 혁신은 계통적 연구 개발과정에서 첩첩한 저애를 피할 수 없었겠는데 선생으로부터 간단하게나마 그 연구개발 과정과 부딪힌 도전에 대해 듣고 싶다.
강경산: 당시 유인 우주 부하를 고려할 때 우리는 다중모드 마이크로파 원격탐지를 제기했고 그 항목은 ‘863 ’(1986년에 국가첨단기술연구발전계획)계획에 들었다. 다종모드 마이크로파 원격탐지 연구 초기엔 자금이 많지 않았다. 노력 끝에 우리는 다종모드 마이크로파 원격탐지기 설계작업을 완수했는데 그러면 자연히 우주선에 채용되는 가 했다. 당시 마침 유인우주선 대상이 정식으로 가동되였고 유인우주선 프로젝트의 왕영지 총 설계사는 중량이 통제 되면 우주선에 다중모드 마이크로파 원격탐지기를 채용할수 있다고 승낙했다. 국제관례대로라면 3개의 동력 모드는 다 단독 설계해야 한다. 총 400여키로그람에 달하는데 우주선에 채용하려면 150키로그람까지 중량을 줄여야 하기에 우리한테 그 압력이 매우 컸다. 우리는 목질 모드로 부하 분석을 하고 설계 가운데서 3개 동력모드의 부하부분을 합해 통일로 처리해 천선 하나로 여러개의 천선을 대체하고 전기 성능 검측, 환경 시험 등 실로 천신만고를 거쳐 최종 150키로그람 설계 요구에 도달시켰다. 설계를 완수한후 나는 스승 무어선생을 모셔와 지도를 받아 최종 다종모드 마이크로파 원격탐지기를 우주선에 실어 우리나라 우주 마이크로파 원격탐지의 기원을 열었다. 그 설계 과정에서 우리는 다종모드 마이크로파 원격탐지기 본신의 종합성 설계를 완수해 국제상 처음으로 펜 빔 스캐너 마이크로파 산란계 (微波散射计)를 채용해 펜슬 빔의 스캔 메커니즘( 笔形波束扫描机理)의 정확성과 실행 가능성을 검증했다.
중국 첫 우주용 마이크로파 원격탐지기
물음 7.국외에서는 아직 마이크로파를 리용해 달 탐사를 한 기록이 없다. 우리가 알기엔 선생이 여러가지 의견을 물리치고 마이크로파 원격탐지기를 상아1호의에 올리기로 했다는 데 마이크로파 원격탐지기를 국제적으로 처음 달 궤도에 올리게 한 선생의 견정한 결심은 어데서 왔는가?
강경산: 중국의 달탐사는 우리가 자부할 만한 프로젝트이다. 우리는 과학에 대한 탐색에서 반드시 용감하게 혁신해야만 가장 앞선 발전적 동향을 파악할 수 있다. 이미전 미국은 이미 달에서의 가시광선 이미징(成像)을 완수했고 원적외선 이미징도 이미 완수했다. 그러나 달에 대한 마이크로파 원격탐지는 지면에서는 사용해 보았으나 달의 표면 밖에 보지 못했으며 해상도(分辨率)가 많이 차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기에 나는 마이크로파로 달을 탐사할 것을 제기했고 달의 뒤면을 탐사하자고 했다. 이는 우리의 새로운 노력 방향으로 되였다. 당시 달탐사 총 설계사인 손가동과 총지휘 란은걸은 우리한테 매우 큰 지지를 주었는데 이는 마이크로파 달탐사계획을 순조롭게 진행할수 있게 했다. 마이크로파 원격탐지기는 설계상 가장 큰 문제로 섭씨 180도로부터 섭씨 마이너스 180도로의 거대한 온도차를 극복해야 하는 문제에 봉착했다. 너무 낮은 온도는 탐지기의 합판을 파렬시키게 된다. 최종 다방면의 전문가들 노력으로 끝끝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우리는 성공적으로 세계에서 첫 마이크로파 달 도면을 획득해 냈다. 달 전체의 밝기와 온도(亮温) 를 얻어내 진정한 의미에서의 ‘마이크로파 달 ’을 그려냈다. 우리는 초기 달탐사에서 거대한 성과를 거두었는데 이는 우리 나라의 금후 달탐사에 든든한 토대를 닦아 놓았다.
2007년 12월 12일, 강경산원사가 달탐사프로젝트 표창대회 석상에서 국가 지도자들의 접견을 받고 있다.( 방송화면 캡쳐 사진)
상아1호, 상아2호 위성의 마이크로파 원격탐지기가 확보한 달 전체의 빛, 온도 분포
물음 8. 올해는 새중국 창건 70돐이 되는 해이자 중국과학원 건원 70돐이 되는 해이다. 몇십년의 풍파를 겪으면서 당신은 우주쎈터를 이끌고 마이크로파 원격탐지 분야에서 거대한 기여를 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우주쎈터가 마이크로파 원격탐지의 발전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는가?
강경산: 중국과학원 국가우주공간 과학쎈터는 우리 나라 마이크로파 원격탐지의 주요한 개척단위로서 국내 나아가서는 세계적인 마이크로파 원격탐지의 발전과정에 응분의 기여를 하였고 중요한 추진역할을 하였다. 중국과학원 마이크로파 원격탐지 기술 중점실험실(이하 ‘마이크로파실')은 중국 최초의 륙상기지, 항공기 탑재와 위성 탑재의 산란계 및 중국 최초의 항공기 탑재와 위성 탑재의 마이크로파 고도계를 연구 제작하였다. 또한 처음으로 위성탑재 여러가지 모드 마이크로파 원격수감기의 공정화를 실현하고 우리 나라 첫 위성탑재 마이크로파 원격수감기의 효과적인 과학데이터를 획득함으로써 우리 나라 마이크로파 원격수감분야에서 많은 창조적인 사업을 했다.
이 밖에 또 세계 최초로 마이크로파 탐지기로 달 궤도에서 전 월면의 마이크로파 밝기를 확보해 세계 최초로 ‘마이크로파 달'을 만들었고 펜형 빔주사형 산란계로 해양 풍장을 측정하는 것이 처음으로 구현되였다.
FY-3C 위성은 세계 최초로 118GHz의 탐지대역 등을 채택했다. 근 반세기의 노력속에서 우리는 우리나라 마이크로파 원격탐지 과학기술의 핵심혁신기지가 되였고 우리 나라 마이크로파 원격탐지 분야의 발전을 위해 방향을 제시하고 튼튼한 기초를 다졌다.
해양 2호 위성(HY-2)의 궤도에서의 시뮬레이션 모습
해양 2호 위성이 얻은 해면고도와 유효 파고 측정 데이터 결과
물음9. 얼마 전에 우리 마이크로웨이브실의 한 학생이 원격탐지 여름학교에 참가했는데 가보니 수업이 광학 원격탐지와 관련된 것이 많았고 마이크로파 원격탐지에 대한 관련은 비교적 적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현재 외계에서는 마이크로파 원격탐지를 SAR (합성개구레이다) 라고도 하는데 고도계, 산란계, 복사계 등 몇가지 중요한 모드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기에 마이크로파 연구실에서 학생들은 자신이 만든 것이 매우 적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그런가?
강경산: SAR는 전천후, 전천시, 고해상도라는 특성으로 인해 군사 분야에서 중요한 응용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마이크로파 원격탐지의 다른 모드 역시 다른 주안점의 중요한 응용 장면을 가지고 있다. 례를 들면 우리 나라 기상위성 FY-3호는 마이크로파 온습도계로 기상탐사를 실시하여 우리 나라 최초로 자체의 마이크로파 원격탐사 기상데이터를 가지게 되었다. HY-2호 위성은 마이크로파 원격탐지를 위주로 하는 첫 해양동력 탐측위성으로서 풍부한 해양동력 환경특성을 획득하였다. 천궁 2호 3차원영상 마이크로파 고도계는 국제 최초로 넓은 가리폭을 실현하고 해면높이 측량을 고해상도로 실현하는 레이더 고도계이다. 그것은 모두 서로 다른 응용 목표에 대해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어 마이크로파 원격탐지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로 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마이크로파 원격탐지는 더 이상 ‘영상’, ‘비영상’으로 나누어지지 않고 마이크로파 원격탐지의 네개 모드가 모두 ‘영상’될 수 있으며 해상도와 응용분야만 다르다. 합성개구레이더는 마이크로파 원격탐지의 네개 모드중 하나이다.당대 마이크로 원격탐지 주파수는 이미 테라헤르츠파(太赫兹)분야에까지 확장되였기에 당대 마이크로 원격탐지를 ‘광의마이크로 원격 탐지'라고도 부를수 있다.
2008년 5월 27일 FY-3가 태원 위성발사기지에서 발사됨
풍운 3호A (FY -3 A) 마이크로파 습도계 지구 밝음도 사진
천궁 2호 3차원 영상 고도계가 확보한 일본해 해면(영상 중심 경도: 132, 위도: 39.95)의 2차원(위사진)과 3차원(아래사진) 영상
물음10. 마이크로파 원격탐사는 수십년의 발전을 거쳐 이미 큰 성과를 거두었고 원격탐사기술도 이미 큰 발전을 이루었는데 마이크로파 원격탐사이후의 발전 방향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강경산: 마이크로파 원격탐지기술은 지난 수십년동안 륙지에서의 원격탐지수요는 비교적 많이 다루어 졌으나 해양에서의 원격탐지는 비교적 적게 다루어 졌다. 륙지표면의 특징은 변화주기가 길고 심층 원격탐사의 수요가 적기 때문에 륙지원격탐사의 대다수는 장기관측을 해야 하고 표면 원격탐사를 위주로 해야 한다.
그러나 미래의 마이크로파 원격탐사의 발전에서 더 많은 눈길을 해양원격 탐사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지구 상의 71%의 면적이 모두 넓은 수역을 덮고 있고 해양은 우리 나라의 국토안보 문제에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해양특징에 대한 원격탐사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여전히 일련의 어려움과 도전이 존재하는데 례를 들면 해상위치 확인, 통신문제, 전자파의 해수면에 대한 투과성이 차하고 해저목표의 특성을 획득하기 어려운 등 문제들은 앞으로의 연구에서 끊임없이 탐색하고 개척하여야 한다.
물음11. 마이크로파 원격탐지분야의 연구생들이 취업방향, 국내에서 박사과정을 밟는것과 출국하여 깊이 연구하는 등 부동한 선택에 직면했을 때 어떤 지도의견이 있는가?
강경산: 첫째, 연구생들은 튼튼한 기초를 닦아야 한다. 탄탄한 기초가 있으면 취업 범위가 더욱 넓어질 수 있다. 둘째, 박사 방향은 반드시 평생 방향이 아니라 관련 분야에 대한 리해를 넓혀야 한다. 이렇게 하면 방향을 전환할 기회가 있고 교차 학과도 더 큰 창의력을 발산할 수 있다. 셋째, 해외에 나가 깊이 연구하는 것에 관해서는 기회가 되면 그래도 나가서 견문을 넓혀야 한다. 우리 나라의 이 몇십년은 확실히 발전이 매우 빠르고 거대한 진보를 이룩하였지만 우리는 여전히 일부 방면에서 국외가 비교적 앞선 것을 인정해야 한다. 외국에 나가 더 깊이 연구하는 것도 지지하지만 가서 진정한 능력을 배워야 한다.
물음12. 많은 학생들이 학습효률에 대해 매우 곤혹스러워하고 시간을 허비해도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다고 느끼는데 그렇다면 연구생의 학습과 과학연구 생애에 대해 어떤 건의가 있는가?
강경산: 나는 쏘련과 미국에서 모두 류학한 적이 있다. 쏘련의 기초교육은 비교적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는 쏘련에서 5년 넘게 공부했고 그중 3년 이상은 기초를 닦았다. 이는 후날 공학연구를 위한 튼튼한 수리기초가 되였다. 그러므로 인생의 중요한 초석인 기초를 튼튼히 닦을 것을 건의한다. 둘째, 기회를 잘 틀어쥐고 국가의 중대한 수요에 중시를 돌려야 하는데 국가의 중대한 수요가 바로 당신들의 기회이다. 매일 몇십분씩 진행되는 뉴스를 통해 국가 각 방면의 상황을 보여주기 때문에 늘 뉴스중계방송에 관심을 가지기를 건의한다. 셋째, 취업방향이 확정된 후에는 경솔하게 동요하지 말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한가지에만 매달려서는 안된다. 나는 일생을 국가의 우주과학사업에 바쳤다. 학생들은 지금 기회가 많기에 남의 말에 쉽게 결정하지 말고 또한 들뜨지도 말아야 하며 일단 일을 하려면 착실하게 잘하고 잘 안풀릴 때에는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조절할 것을 건의한다.
물음13. 자신의 인생에 대한 평가를 간단하게 요약해 본다면?
강경산:일생을 돌이켜 보면서 자랑스럽게 말한다. “나의 일생은 당에 부끄럽지 않았고 인민에 부끄럽지 않았으며 가정에 부끄럽지 않았고 자신에 부끄럽지 않다.”
물음14. 새로운 시대의 청년 학생과 과학 연구일군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와 희망을 전한다면?
강경산:인생의 길은 다양하다. 한 사람은 일생동안 많은 기회, 곤난, 역경을 만나게 된다. 인류사회의 수요는 가장 중요한 기회이므로 기회를 잘 포착하고 신념을 확고히 하며 부지런히 노력한다면 인류와 사회에 유용한 일을 할수 있다.
(사진과 글은 중국과학원 국가우주공간과학쎈터 중국과학원 마이크로파 원격탐지 기술중점실험실에서 제공한것임)
편역: 김태국 김영자 김영화 안상근
编辑:安相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