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1년 7월 3일, 고 강경산 원사님과의 영결식이 있는 날이다.
어제 밤에 북경에는 큰 비가 쏟아지고 오늘 아침에도 여전히 날씨는 흐리고 비가 내렸다. 고 강경산 원사님을 보내기 애통해 하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하늘마저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가! 비 오는날 아침에 차를 잡지 못할가봐 미리 어제밤에 팔보산으로 가는 디디 례빈전용차를 예약해 놓았기에 차가 벌써 아파트단지 문앞에 와서 대기하고 있어서 우산을 들고 차를 탔다.
차를 타고 팔보산이 있는 방향인 서쪽으로 향해 달리는데 비가 멎고 재빛구름이 드리워 흐렸던 하늘이 서쪽부터 서서히 개이기 시작하면서 고운 무지개빛 구름이 떴고 파아란 하늘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평생을 우주항공사업에 바친 고 강경산원사님께서 천국으로 떠나시는 날임을 하늘도 알아봐 줘서 가시는 길을 내주는가 ?! 참으로 신기하였다.
고 강경산원사님은 우리 북경조선족애심장학회에서 명예리사장으로 모신 분으로서 우리의 명예리사장으로 계신 20년간 항공우주사업에 그렇게 바쁘신 나날에도 거의 해마다 장학후원금을 기부하시고 또 늘 메세지를 보내와 우리의 장학사업을 긍정하고 고무격려해주신 그런 따뜻한 분이시였다. 그래서 우리 장학회 운영진에서는 오늘 시간이 허락되시는 분들이 팔보산에서 거행되는 영결식에 함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로 하였다.
나하고 장학회 고문인 김의진님이 운영진 다른 분들보다 먼저 도착하였다. 나는 생화상점에 들어가 흰 국화꽃 20송이를 준비하였다. 우리 장학회 운영진 성원들과 영결식에서 만나게 될 조선족인사들에게 나눠주기 위해서였다.
영결식이 있을 팔보산 동례당앞에는 아직 한시간전인데도 100명도 넘는 사람들로 붐비였고 과학원, 공정원, 대학교, 군대, 과학연구단위 그리고 각 계에서 보내온 만장과 화환들이 즐비하게 늘어 섰다. 그리고 영결식 래빈등록처에는 조문객이 벌써부터 수십명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이런 장면을 보면서 중국과학기술계에서의 고 강경산원사님의 높은 지위와 무게를 실감하게 되였다.
영결식장안에 들어서니 스피커에서는 강경산원사님께서 이릴적부터 즐겨 들으면서 별나라 달나라에 대한 무한한 동경과 꿈을 키워왓다는 그 유명한 세계적인 동요 <반달>노래가 어린이 합창으로 들려오고 있다.
LED모니터에서는 고 강경산원사님의 생전의 사업 및 생활상을 보여주는 사진들이 환등방식으로 방영되고 영결식장 본채의 오른쪽벽 전체에는 높고 푸른 하늘에서 성스러운 흰 비둘기들이 날아예는 동영상이 뜨고 있었다.
갑자기 유가족으로 된 부인 진증휘녀사는 검은 옷차림에 휠체어에 앉은 모습이였고 강경산원사님의 별세를 받아 들이기 힘들어 낮은 소리로 비통하게 흐느끼면서 서쪽벽에 길게 늘어선 가족들과 함께 조문객들의 문안을 받고 계시였다. 영결식에서는 세사람씩 한줄에 서서 고 강경산원사님께 세번 허리굽혀 인사드리고 한바퀴 돌아 고 강경산원사님과 작별을 고하고 부인과 가족에게 위문을 드리고 나오게 되여 있었다.
나는 손에 들었던 국화를 고 강경산 원사님 유리관 아래에 놓고 경건한 마음으로 원사님과 작별을 고한후 부인 진증휘녀사 앞으로 다가가 몸을 굽히고 귀가에 대고 이야기 해드렸다. “저는 강경산 원사님과 한 고향 사람입니다. 그리고 강경산 원사님은 우리 조선족애심장학회의 명예리사장이였는데 원사님께 이렇게 갑자기 우리곁을 떠나시니 매우 애통합니다. 우리 장학회의동인들과 조선족대학생들은 강경산 원사님을 잊지 않을것입니다.”
부인은 흐느끼면서 “그래요? 고마워요!”(是吗? 谢谢谢谢!) 라고 하시였다. 드릴 말씀은 많지만 뒤에도 많은 사람들이 줄을 이어오고 있기 때문에 더 지체하면 안되겠기에 강경산원사님의 멋지고 자애로운 모습이 담긴 유상과 마지막 눈인사를 나누고 나왔다. 밖에 나오니 하늘은 언제 흐렸던 날씬인가 싶게 가을하늘처럼 높고 눈이 부시게 아름답고 푸르렀다.
기자출신이라 나는 중대한 소식을 제때에 전하고 싶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핸드폰으로 고 강경산 원사님 영결식에 참가한 소감을 몇글자 적어서 모멘트에 올리였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손에 일이 잡히지 않고 머리속에는 온통 강경산원사님에 대한 추억이 주마등마냥 스쳐지난다. 돌이켜보니 강경산 원사님과는 한 고향사람이라는 인연뿐이 아니였다.
강경산원사님은 1999년 11월에 중국공정원 원사로 당선되였는데 조선족동포들가운데 그 분의 원사 당선소식을 제일 먼저 알게 된것도 아마 중국과학원의 연구원이시였던 고 한경청연구원님과 중국생물물리연구소의 연구원이였던 김록송 선생님인 다음에는 아마 나였을것이다.
나는 중앙민족어문 번역국 재직시절, 또 연변일보 특약기자, 연변일보 북경지사장 등을 겸직하면서 북경에 있는 과학기술자계의 훌륭한 대표들인 안태상교수, 한경청교수, 김록송 교수 등을 취재하고 그들을 도와 북경에 있는 과학기술분야의 조선족모임의 개최도 수차 도와 주었으며 그들과 경상적으로 만나 연변을 위해, 또는 청년들을 위한 유익한 활동들을 조직할데 대해 고민하였다.
그러는 와중에 1999년 아마 11월말, 또는 12월 초일것이다. 한경청 선생님과 김록송선생님께서 딱 5분 간격을 두고 나한테 전화를 주신것이다. 두분의 전화내용은 약속이나 한듯이 우리 조선족의 과학자 강경산 연구원님께서 원사로 당선되였다는 기쁜 소식이였다. 중국조선족에서 첫 원사가 나온것이다. 그야말로 령의 돌파였다.
당시 북경에 계시는 조선족과학기술자들은 부교수이상 직함을 가진 분들이 적어도 200명 이상이 된다고 하였다. 원사로 추천받은 분은 강경산외에도 한경청, 김종철, 리상영 등 여러분이 있다고 하는데 1999년말 결국은 강경산선생님만이 조선족 첫 원사가 된것이다.
두분의 전화를 받고 나는 강경산원사님도 대단하지만 타인의 원사 당선소식을 제일처럼 기뻐하여 희소식을 듣자마자 연변일보 특약기자인 나에게 이 소식을 알려주는 한경청, 김록송 두분이 너무나도 돋보였다. 한경청선생님과 김록송선생님, 나 이렇게 우리 세사람은 함께 강경산원사님 원사당선 축하모임을 어떻게 할것인지를 연구하였다.
나는 두분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강경산원사 당선 모임을 어른들끼리만 축하해서는 별 의미가 없다 . 우리는 반드시 대학생대표들을 청해 놓고 어르신들과 대학생들이 함께 앉아 축하모임을 해야 우리 젊은 친구들이 민족 자긍심을 가지고 또 강경산 원사처럼 열심히 분발하려고 노력하게끔 자극을 줄수 있다.
한경청, 김록송 두분은 나의 건의에 동의했고 강경산 원사님도 나의 제안에 동의하였다. 그 다음에는 전국정협의 조남기 부주석, 전국인대 상무위원이였던 리영태 장군 등을 이 모임에 모셔오는 일이였다.
아무튼 나는 그때 전국량회에서 량회대표,위원들을 위해 번역통역서비스를 하는 편의를 리용하여 대표위원들과 련계를 하고 조남기 부주석님을 모셔오는 등 여러가지 일들을 도맡았다. 조남기부주석은 회의기간이라 정협측에도 일이 많아 사실 이 모임에 참석하는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세번이나 찾아가서 조선족으로서는 강경산 원사가 처음으로 나온 원사인데 축하모임에 꼭 참석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나는 당시 전국인대, 전국 정협위원들을 모셔오고 조남기 부주석을 모셔오고 대회 식순을 안배하고 수도의 각 대학교 학생대표들을 청해오고 남상복주장의 명의로 대학생들에게 증정할 선물인 조선족과학자들의 인물전기—《한세대의 별》, 기념노트, 식사안배 등 여러가지를 책임지였는데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극복하고 400여명 되는 어르신들과 대학생들의 시간을 잘 조절하여 3월 12일에 강경산원사 당선축하 모임을 중앙민족대학 계단교실에서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
강경산원사 당선축하 모임
이날 행사에 대한 상세한 회고는 다른 글에서 하기로 하고 아무튼 , 강경산 원사님은 본인은 사업성격상 동포사회에 많은 관심을 돌리지 못하고 연변을 위해서 한 일이 없는데 조선족의 최고 거목들이 다 와서 자기를 축하해주고 특히 대를 이어나갈 청년학생들이 온것에 대하여 진심으로 기뻐하였다. 그 후 강경산 원사님은 나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신임하여서 그의 사적을 소재로 하여 책을 쓰는 중요한 일(《성공으로 가는 길》강맹산과 공저) 도 나에게 맡겨 주셨다. 그리하여 나는 여러번 그의 연구실로 가서 취재도 하고 또 그로부터 ‘신주4호' 우주비행선 모형을 선물로 받기도 하고 우주항공관련 기념우표도 선물받은적이 있었다.
2001년11월에 나는 북경조선족 각계 지성인들에게 우리 조선족의 힘으로 조선족의 어려운 대학생들을 도와주는 장학회를 설립하자고 호소하였는데 한경청, 김록송 등 과학자님들께서 적극 호응해 주시였다. 나는 과학계의 한경청 연구원님, 김록송 연구원님, 중앙민족대학의 서영섭 교수님, 국무원발전연구센터의 김인웅 연구원님 등을 모시고 장학회의 관리위원회를 구성하였고 14살 어린 나이네 고학의 길을 찾아 수도 북경에 와서 갖은 역경을 겪으며 우수한 성적으로 쏘련 류학을 다녀와서 마이크로파 원격탐측분야를 개척하여 공정원 원사로 된 강경산님을 찾아가서 우리의 명예리사장을 맡아 주실것을 청들었다. 국가의 우주항공사업으로 정말 밤에 낮을 이어 바삐 돌아야 하고 때로는 발사기지에 가서 몇달씩 계셔야 하고 사적인 시간이 별로 없는 강경산 원사님이셨지만 우리가 하는 장학사업이 국가의 기둥감인 대학생들을 키우는 일이고 어려운 조선족 대학생들을 도와주는 일이라는것을 듣고서는 흔쾌히 명예 리사장 초빙에 응하시였다.
그때로부터 강경산원사님은 거의 20년간 해마다 애심장학회에 장학후원금을 기부하시였으며 비서장인 내가 핸드폰 문자로 사업보고를 드리면 언제나 답장을 써서 긍정해주고 고무격려해주시였다.
그중 2020년 12월 13일에 받은 위챗메세지를 공유한다.
2020년 12월 12일에 처음으로 강경산 원사님과 위챗으로 련결이 되여 12월 13일에 장학회의 사업보고를 드리였는데 그 사업보고를 보시고 나서 보내온 강경산 원사님의 위챗메세지이다.
“북경조선족애심장학(기금)회 리란 비서장동지: 동무가 창도하고 령도하는 애심장학회가 벌써 20주년을 맞이하게 된다니 우선 이 공덕이 무량한 조직이 20년간 취득한 빛나는 성과에 축하를 드립니다. 20년래 장학회의 끊임없는 노력과 각계 애심인사들의 지지하에 조선족의 어려운 대학생들에게 자금을 제공해 주고 수백명의 학생들이 어려움에서 벗어 나도록 사랑을 베풀어 주어 도움받은 학생들이 공부에 더 열중하고 인재로 되기 위해 더욱 노력하게끔 하였습니다. 동무들은 이름없는 영웅들이고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모범인물들입니다. 여러분들이 거둔 성과에 다시 한번 축하를 드리며 동무들 자신들도 행복하기 바랍니다. 조선족로인 강경산”
“사업보고를 진지하게 읽어 보았는데 그대들은 정말 좋은 일들을 하였습니다. 동무들을 존경하고 탄복합니다” 그후 또 다른건 때문에 메세지를 주고 받았고 마지막으로 강경산원사님과 위챗대화를 주고 받은게 바로 금년 3월 6일이였다.
강경산원사님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메세지를 보내왔다. “동무가 모멘트에 김녕일의 동영상을 올린것을 보고 내가 평어를 달았습니다. 나는 김녕일과 위챗이 안되니 나의 평어를 전달해주기 바랍니다.
강경산원사님은 나의 모멘트에 김녕일원사님에 대한 평어를 다음같이 쓰셨다.
“光荣啊金宁一,中国病毒学的顶峰,为国争光,救人类与灾难之中,宁一前途无量。光荣啊龙井, 宁一,朝鲜族的自豪,永远盛开的金达莱!”
강경산 원사님은 내가 김녕일 원사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꼭 전달해 줄것을 부탁하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김녕일원사님과 련락이 닿지 못해 이 평가를 전달하지 못했는데 마침 오늘 고 강경산 원사님의 영결식에 온 민족화보사의 로기자를 통해 김녕일 원사님의 련락처를 얻게 되여 이제는 전달해 드릴수 있을것 같다.
오후에 집에서 이 글을 쓰는 중에 하늘에서는 또 소나기가 한바탕 쏟아 지더니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다. 어머, 벌써 밤 10시가 일각이 되여 오네. 모멘트에 누군가 또 다른 버전의 <반달>노래를 공유해 그 노래를 들으면서 졸문을 맺는다.
위대한 과학자이시자 우리 북경조선족애심장학회의 훌륭한 리사장이시였던 고 강경산 원사님의 고매한 령혼이 티 없이 순수한 동심들이 부르는 아름다운 <반달>의 멜로디를 타고 달나라, 별나라로 가시여 우주상공에서 영원히 지지 않는 하나의 별이 되시여 우리 조선족청년들을 앞길을 인도해주시기를 빕니다.
리란(북경조선족애심장학회 사무총장/ 전국애심녀성포럼 명예의장)
编辑:安相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