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방송텔레비죤총국 중앙방송 ‘중국의 소리’ 특별기획 ‘선생’ 시즌5는 덕성으로 기풍을 자양하는 대가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들의 업적과 수양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만들어진 방송프로이다. 이 프로를 통해 중국 ‘형사경찰의 혼’ 최도식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자.
최도식, 1934년 출생, 중국 최초의 형사기술경찰, 중국 수석 총탄흔적 감정 전문가, ‘7.1훈장’ 수상자자이다. 최도식이 참여하여 처리한 1200여건의 중대 특대 사건 중 해결이 어려운 흔적 검사감정에는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그는 현장 흔적 물증 영상처리, 총탄 흔적 자동식별 시스템을 개발해 국내 여러 기술공백을 메운 공을 인정받았으며 중국 ‘형사경찰의 혼’으로 불리고 있다.
9일 밤낮을 이어가며 절반 지문으로 끝내 흉수를 찾다
정년퇴직한 지 30년 가까이 된 최도식은 종래로 흔적감정 1선에서 물러난 적이 없다. 2020년에도 지문 하나의 감정에 9일 밤낮을 매달리기도 했다. 이는 목단강시 경찰을 35년간 곤혹케 한 중대한 현안이였다. 최도식에게 주어진 조건은 범인이 현장을 파괴한 뒤 바가지자루에 남긴 피묻은 지문 절반 밖에 없었다.
“지문의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 바깥 륜곽 부분의 무늬와 지문 중심 무늬의 중간이 비여있었다. 지문이 이동했다는 걸 설명한다. 중심부의 무늬도 련속적이지 않았다. 물방울이 묻어 피를 일부 씻어버린 것 같았다.”라고 최도식은 회상했다.
“시간이 좀 들었다”는 한마디 뿐이였지만 사실 이 86세 로인은 실험실에서 9일 밤낮을 작업했다.
최도식은 “처음 며칠은 괜찮았지만 마지막 이틀은 힘들었다. 나는 백내장 수술을 해서 눈이 따가워나 반복해서 안약을 넣었다. 그러나 나보다 피해자 가족은 얼마나 더 안타까우랴는 생각에 사건이 끝나지 않는 한 포기할 수 없었다. 내 성격상으로도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이른바 천재란 괴로움과 고생을 참고 인내하는 것이다. 이렇게 최도식은 자신이 발명한 지문 복구 시스템으로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유일하게 한사람의 지문을 확정할 수 있는 8개 개성특징점을 성공적으로 가려냈다. 이는 확실한 증거로 되였다.
잘리워진 전화선으로부터 시작된 직업생애
1934년 6월, 최도식은 길림성 매하구의 한 빈곤한 조선족 가정에서 태여났다. 유년시절 최도식은 일본침략자에 의해 고아로 되였다.
소년 최도식은 인민정부의 후원으로 중학교 단계의 학업을 마쳤다. 1951년, 그는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중국인민지원군에 가입하여 조선 전장에 나갔다.
최도식이 흔적 감정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67년 전 용의자가 잘라버린 전화선 때문이였다. 현미경으로 관찰한 무늬를 통해 범행도구는 일차 감정에서 주장한 집게가 아니라 가위일 가능성이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 후 5일간 그는 반복적으로 가위로 연판을 잘라보며 무늬를 대조했다.
형사과학기술업무는 범죄를 척결하고 인민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최도식은 말한다. “사람의 생사가 걸린 증거이므로 반드시 근거를 갖고 정확한 감정 결과를 재판부에 제출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한다.
흔적감정의 ‘정해신침’
진지하고 심지어 고집스럽다는 게 스승 최도식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인상이라고 석세민은 말했다. 현임 광서공안청 형사과학기술센터 주임으로 있는 석세민은 선생님과 함께 했던 한차례 정찰실험을 줄곧 기억하고 있다.
“한 운전자가 총에 맞아 죽었다. 당시 한 사람이 옆에 서서 운전자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는데 기사가 갑자기 시동을 걸고 도망쳤던 것이다. 차가 움직이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균형을 잡으려 한다. 그러다 보면 손이 움직이면서 방아쇠를 당길 수 있다.” 석세민이 하는 말이다.
용의자가 방아쇠를 일부러 당겼는지 무의식간이였는지 확인하기 위해 최도식은 직접 실험을 했다.
“차가 움직이는 중에도 최선생님은 차를 따라가려고 했다. 자동차가 그를 끌고 가는 건 매우 위험했다. 우리는 그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된다며 그와 론쟁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실험해보지 않으면 그런 느낌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석세민이 하는 말이다.
감숙 백은 살인사건, 장군 특대 계렬 강도살인사건, 백보산 군경습격사건… 전국을 뒤흔든 수많은 중대사건 흔적 감정에서 최도식은 ‘정해신침’의 존재였다.
중국 총탄흔적 감정 수석전문가
중국의 총탄흔적 감정기술이 첫발을 내디뎌서부터 성숙하기까지 전 과정을 지켜본 최도식은 1997년 국제형사기자재 전시회에서 외국에서 연구제작한 ‘총탄흔적 자동식별 시스템’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외국에는 다 나왔는데도 우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되였다. 그래서 우리도 이런 자동인식 시스템을 연구해야겠다고 스스로 결심했다.” 최도식은 가능하다고 굳게 믿었다.
어떻게 하면 정확하게 탄흔을 찍어낼 수 있을가? 그는 이 같은 기술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일곱 대학, 세 알루미늄박 공장, 세 정밀기기연구소를 방문해 네가지 모형도를 설계했다. 5년 남짓한 연구 끝에 탄두 강선의 흔적을 고속으로 정확하게 추출할 수 있는 방법을 발명해냈다. 이런 기술로 ‘탄두강선흔적 자동식별 시스템’을 만들어 국내 기술공백을 메웠을 뿐만 아니라 국제 선진수준에 도달했다.
중국의 총탄흔적 감정 수석전문가인 최도식은 지금도 총기에 대한 연구의 발걸음을 늦추지 않고 있다.
최도식은 40가지에 달하는 권총, 소총, 그리고 기타 렵총, 소구경총에 대해 기본상 장악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직도 공백은 있다면서 대방도 우리를 자꾸 연구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계속 파고들어야 형세의 발전에 적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부자 넷이 함께 군복을 입다
군대에서의 경력은 그의 직업선택을 결정했고 평생의 반려자인 김옥이를 만났다. 한사람은 지원군 전사였고 한사람은 위생소 간호원이였다. 전화 속 같은 경력이 두 젊은이를 만나게 한 것이다.
1년 내내 해결하기 어려운 각종 사건현장을 오가다 보니 수십년간 서로 떨어져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로년에 알츠하이머까지 앓게 된 김옥이는 아들들의 이름은 언녕 잊었지만 남편의 직업은 줄곧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밤 일어나 나가려고 하는 걸 보고 어디 가느냐고 했더니 공안청에 간다고 대답하는 것이였다. 공안청에 뭐 하러 가냐고 물으니 흔적감정하러 간다고 하고. 그래서 흔적감정을 하는 사람은 나지 당신이냐고 물으니 최도식 세글자를 말하는 것이였다.”라고 회억했다.
그들의 세 아들은 성인이 된 후 모두 형사의 길에 들어섰다. 막내아들 최영빈은 아버지가 하던 일을 직접 계승했다. 사업에 몸담은지 20여년 되는 최영빈은 감정한 흔적과 물증이 2800여건에 달하여 거의 100건에 달하는 사건의 성공적인 수사에 직접적인 증거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는 더 큰 뜻을 품고 있었다.
“아버지 만큼의 높은 경지에 오르고 싶다. 주위 동지들에게 아버지처럼 인정받고 싶지 최영빈의 아버지가 바로 누구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 최영빈이 말했다.
2022년 5월 25일, 최도식은 특별초청 공안영웅모범 대표로서 전국 공안계통 영웅모범립공집체 표창대회에 참석했다. 회의가 끝난 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올해 만 88살로서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하지만 당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수시로 가방을 들고 현장에 나설 것이다.”
/흑룡강신문
编辑:김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