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동북항일련군 녀성 장교와 중공 각급 녀성 지도간부
2. 퇀급 이하 좌급 군관과 위급 군관 및 현•구급 당지도간부
(동북항일련군 재봉대 책임자와 당지부 서기, 련장과 지도원, 중공특별위원회 소속 부녀부 책임자, 현과 구의 당위원회 위원 및 소속 부녀부 책임자)
최희숙(崔希淑, 1909—1941):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제6사 재봉대 대장
원명은 최희숙(崔姬淑)이며 1909년 12월 16일 길림성 연길현 세린하에서 태여났다. 1931년말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선후로 룡암동 부녀위원, 팔도구호제회 부녀위원을 지냈다. 1932년 8월, 연길현유격대에 입대하여 취사원이 되였다.
1934년 3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1퇀 피복공장에 있었으며 1936년 3월,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제6사 재봉대 대장이 되였다. 1941년 3월 12일, 연길현 룡신구에서 ‘토벌대’와 싸우다 체포되여 룡정의학원에서 눈을 도려내고 심장을 갈라내는 혹형을 받고 희생되였다.
(자료출처: ≪근대중국조선족녀걸≫)
태영숙(太英淑, 1908—1934): 중공연길현위원회 부녀위원
1908년 10월, 조선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태여나 1912년 식솔을 따라 길림성 연길현 마반산 태평동으로 이주했다. 1928년에 조기혁명가 리동설과 결혼하고 남편을 따라 왕청현 하마탕으로 가 남편을 도와 야학을 꾸리고 혁명사상을 선전했다.
1930년의 ‘붉은5월투쟁’을 거쳐 10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대흥동당지부 부녀위원이 되였다. 1931년 봄, 중공연길현위원회에 조동되여 부녀위원이 되였다. 7월, 중공의란구위원회로 조동되여 선전위원 겸 부녀위원이 되였다. 1932년 봄, 춘황투쟁을 조직, 지도한 후 가을 왕우구근거지로 소환되였다.
1933년 봄, 남신애가 이른바 민생단원 혐의로 강직되자 뒤를 이어 중공연길현위원회 부녀위원이 되였다. 1933년 겨울, 극도의 피로와 기아로 몸져누웠으며 1934년 3월의 어느 날 병세가 악화되여 사망되였다.
(자료출처: ≪중국공산당길림성조직사자료≫, ≪연길현항일전쟁영웅렬사≫)
허현숙(许贤淑, 1902—1938):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 제1퇀 제2련 지도원
황옥청의 안해이고 흑룡강성 목릉현 사람이다. 1930년에 남편 황옥청과 함께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1932년 11월 남편이 당조직의 파견을 받아 밀산으로 가 현당위원회 재건사업에 나서자 동행하였다. 1934년 가을, 남편과 함께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으로 조동되여 제1퇀 제2련 지도원이 되였다. 부대로 떠날 때 3살 난 딸애를 한 한족 반일회원에게 맡겨 부양하게 하였다.
1938년 5월, 제4군과 제5군이 서정을 시작하자 서정부대에 소속되여 보청을 떠났다. 8월에 오상현 원보(元宝)진에서 적들과 싸우다가 체포되여 일본수비대감옥에서 살해되였다. (남편 황옥청은 1940년 2월 보청현에서 희생되고 제4군 꼬마교통원인 작은아들 황동순은 1939년 겨울 밀산현 합달하에서 살해당하였다.)
(자료출처: ≪흑룡강항일투쟁인물록≫, ≪항일련군의 조선족녀전사들≫)
/박문봉 편저 《동북항일전쟁 조선족 인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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