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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잊지 못 할 그때의 그 일들

유경봉      발표시간: 2025-03-31 20:18       출처: 길림신문 选择字号【

○남영전(길림신문사 전임 사장 겸 총편집)

20년전의 일들이다.

2005년 4월 7일, 내가 본의 아니게 길림신문사의 법인까지 겸하게 되여 길림일보그룹 사장, 총편집의 배동으로 길림신문사 전체 임직원들과 대면할 때, 나를 향한 신문사 분들의 그 기대에 찬 눈길에 가슴이 뭉클하였다.

평소에 신문사가 어렵게 지낸다는 상황은 얼마간 알고 있었지만 정작 신문사에 몸을 담고 보니 실정은 나를 놀라게 하였다.

길림신문사는 성재정 차액경제지원단위로 매년 72만원, 매달 6만원으로 28명 직원들의 기본로임만 지불하면 한푼도 남지 않는 상황, 그래서 그 몇년 동안 직원들의 해빛로임, 난방비를 지불하지 못했고 직원들의 의료보험도 못 내여 직원들은 의료보험 혜택도 못 받는 상황이였다.

경제난에 발이 묶여 기자들은 취재를 나가지 못하고 신화사 원고 번역으로 신문판을 채우기에 어떤 독자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신문은 주문하겠지만 보내지는 말라고.

판공실 주임은 더 급한 실정을 말했다. 신문사는 컴퓨터 작업으로 전기 소모량이 큰 데다 신문사의 변압기와 전선 모두 로화되여 수시로 전기 화재의 위험을 안고 있는 상황. 또 난방시설도 녹이 쓸고 막혀 겨울에 사무실에서 솜옷을 입고서도 추워서 컴퓨터 작업도 제대로 못하는 실정이였다.

신문사가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내가 큰 감동을 받은 것은 장춘 조선족사회 지성인들의 설중송탄의 성원이였다.

한 기업인은 나의 전화를 받고 발등의 불부터 끄라면서 즉시 직원을 시켜 현금 5천원을 가져와 그 이튿날로 문제의 전기시설을 교체하였다.

한 지성인은 기업가를 동원하여 찬조금 20만원을 신문사에 입금하여주었다.

이 20만원의 뒤를 이어 3만원짜리 고급사진기를 들고 신문사를 찾는 분, 현금 만원을 들고 신문사를 찾는 분도 몇몇 있었다.

이러한 성원으로 그해 5.1절 공휴일 기간 우리는 신문사의 낡은 난방시설을 새것으로 교체하였고 5월 단오날부터 신문은 4면에서 새로운 규격의 8면으로 확대되였으며 1, 8면은 칼라로 인쇄되여 독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신문이 독자들과 가까워지자 그해 6월, 장춘공항에서 벌금을 당한 한국로무자 몇몇이 합동으로 신문사를 찾아 하소연하였다.

우리는 세차례 변호사 자문회의를 통하여 이 일은 위법사건이라고 확정하고 추적보도를 하였고 내부참고문건을 작성하여 해당 기관에 반영하였다.

사건의 당사자들은 전화로 우리의 기자와 변호사를 위협 공갈하였다. 하지만 나중에는 끝내 자기들의 착오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였고 벌금을 당한 300여명의 피해자들에게 벌금을 반환하였다.

그해 11월 17일, 길림성당위 전철수 부서기는 선전부 부장, 부부장과 성재정청 청장 등을 인솔하여 조사연구차 신문사를 찾았다.

나는 전서기 일행에 그동안 한 일들과 공항사건을 회보하였다.

전서기는 장춘공항사건은 오늘 처음 알게 되였다면서 이토록 큰일을 하는 신문사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되겠는가며 감개무량해하였다.

자리에 있던 성정부 각 부서 책임자들도 길림신문사의 경제 지원 형식을 바꿔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전서기의 관심으로 그해 12월에 들어서면서 성재정청에서 림시보조금 80만원을 하달하였기에 우리는 그동안 직원들에게 진 빚을 모조리 청산하였다.

12월 20일, 전서기는 어려워도 생일은 쇠여야 한다면서 《길림신문》 창간 20주년, 《장백산》 창간 25주년 기념좌담회를 송원호텔에서 진행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2006년 1월1일부터 길림신문사는 성재정 전액경제지원단위로 되여 당해 성재정 지원이 배로 뛰여올랐고 해당 규정에 따라 지원금은 매년 오르게 되였다.

《길림신문》 창간 4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 신문사에 감동을 준 전철수 서기를 비롯한 장춘시 지성인들의 뜨거운 관심과 배려를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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