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병사의 이야기](5)
조선전쟁 정전후 후방에서의 ‘특무잡이능수’ 정수암
—총상을 입은채 특무를 잡은 참전로병사 정수암을 만나보다
최근, 연길에서는 색바랜 중국인민지원군 차림을 한 할아버지 한분이 전동오토바이를 타고 거리를 활주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그의 가슴과 목에는 군공메달과 기념휘장을 가득 달려 있다. 거리에서 근무하던 교통경찰들은 경례를 올리며 할아버지가 거리를 저멀리 지나갈 때까지 목송하고 시민들도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곤 한다.
이 할아버지가 바로 87주세 고령의 항미원조 참전로병사 정수암(程守岩, 한족)옹이다. 그가 군복차림으로 길에 나섰다면 연길 ‘로병사의 집’ 공익행사에 참여하러 가는 길이거나 공익행사를 마치고 귀가하는 길이다.
연길 ‘로병사의 집’ 의무강연 활동을 마치고 날렵하게 전동자전거를 타고 귀가하는 정수암 로병사
“군복은 군인으로서의 당과 인민에 대한 책임감과 사명감입니다. 저는 당의 교육을 받으며 부대의 용광로속에서 련마되고 성장해왔습니다. 국가와 당의 신임을 저버리지 않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홍색정신을 이어가겠습니다.”
그는 최근 몇년간 연길 ‘로병사의 집’ 의무강연단 성원으로 활발히 활약중이다. 80대 후반인 그는 항미원조 참전로병사 형님, 누나들의 ‘어린 동생’이다.
연길 ‘로병사의 집’ 공익행사에 참여하고 있는 항미원조 참전로병사 정수암(왼쪽 사람)
최근, 기자 일행은 87세의 항미원조 참전로병사 정수암로인을 만나 조선전쟁 정전후의 복구재건기간에 벌어졌던, 항미원조 승리의 열매를 보위하기 위해 겪은 이야기들을 전해들었다.
적의 총알이 몸이 박힌 채로 특무를 잡다
1953년 7월 27일, 조선정전협정이 판문점에서 정식으로 조인되면서 3년간의 조선전쟁이 결속되였다. ‘항미원조, 보가위국’을 언급하면 우리는 언제나 먼저 전쟁터에서 용감무쌍하게 적을 무찌른 지원군전사들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후에도 많은 지원군 전사들이 조선땅에 남아 5년동안 복구재건을 도왔다. 당시 조선은 사처가 페허로 되여있었을뿐더러 태평하지도 않았다.
1937년 돈화시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난 정수암은 17살 되던 1955년 3월에 참전하여 같은해 8월에 부대를 따라 조선 신의주 북대영 보충병원으로 진기로예야전군에 가입하여 보병이 되였다. 그곳에서 그는 엄격한 군사훈련을 받고 층층의 선발을 거쳐 조선에 나간 그는 정찰병이 되여 특무를 잡는 사업에 투입되였다.
젊은 시절의 정수암
정수암의 회억에 따르면 정전 초기, 적들의 간첩활동은 창궐했는데 도처에서 파괴를 감행하면서 항미원조전쟁 승리의 열매를 탈취하려고 시도했다. 하여 정찰병들의 임무는 특히 간고하고 위험했다. 정찰병들은 적들의 코앞에서 비밀리에 정보를 수집하여 부대의 작전에 유력한 지지를 제공하는 한편 특무들의 파괴활동을 제지해야 했다. 정수암은 슬기롭고 용감하며 견인불발한 정신으로 번마다 임무를 원만히 수행했다.
조선에 있는 기간 그는 특무 체포와 반간첩 활동에 여러 차례 참가했다. 그중에서도 적의 총알에 부상당한 상황에서 특무 1명을 격살하고 2명을 체포하던 때가 근 7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고 정수암은 말했다. 그때의 짜릿함과 스릴감은 영화 장면에 못지 않았다.
부상을 입고서도 임무수행을 견지하다
1956년 3월 6일, 정수암이 전우들과 함께 정찰을 마치고 금방 병영에 돌아오니 퇀지휘부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총과 총알을 준비하여 퇀부에 집합하라는 퇀장의 명령이였다. 정수암이 도착해보니 당시 부대에 있는 13명의 정찰병중 5명을 속히 선발해 기차역에 파견하여 적의 2남1녀 특무 3명을 나포하라는 임무가 내려졌다. 정수암은 5명 정찰소조의 일원으로 곧추 기차역으로 향했고 기차가 도착하자마자 정찰병들과 함께 차바곤에 뛰여올랐다. 한바곤한바곤 자세히 수색하면서 여섯번째 바곤에 이르렀을 무렵, 눈치챈 적 특무들이 차바곤의 반대편 문에서 뛰여내려 도망치고 있었다. 이에 정수암은 개인의 안위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창문을 열고 기차에서 뛰여내렸다.
전쟁시기에 철도는 적들의 주요 파괴대상으로 철길 량쪽에는 폭파된 차바곤 등 잔해들이 수두룩히 널려있었다. 당시 기차에서 뛰여내리던 정수암은 마침 버려진 차바곤에 팔을 부딪치고 말았다. 아파할 새도 없이 더 큰 위험이 바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수암이 몸을 돌리는 순간 20메터쯤 앞에서 도망가던 특무가 뒤돌아보면서 쏜 총알이 정수암을 명중했다. 왼쪽 종아리와 왼쪽 허리춤에 두곳이나 총상을 입은 정수암은 아픔도 잊은채 반격을 가했다. 총알이 기다랗게 붉은 선을 지으며 귀가를 스쳤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특무를 향해 연신 방아쇠를 당겼다.
힘차게 혁명가요를 부르고 있는 정수암 (사진속 오른쪽)
정수암은 그때를 회억하면서 “군인으로서 책임감과 사명감이 앞섰지요. 당시 머리속에는 오로지 놈들을 도망가게 해서는 절대 안된다. 빨리 붙잡아서 파괴를 제지시켜야만 한다는 일념뿐이였습니다.”라고 말했다.
정수암은 전우들과 협력하여 특무 1명을 사살하고 2명을 체포하여 그들의 군사시설 파괴 음모를 성공적으로 짓부셨다.
“저를 가장 필요로 하는 곳에 돌아가겠습니다.” 3개월간 부대병원에서 두곳의 총상을 치료한 후 정수암은 즉시 조직에 제기하여 일선으로 돌아갔다. 그때는 이미 중국인민지원군 사령부 정치부로부터 3등공을 기입받은 뒤였다.
귀국 후에도 초심 잊지 않고 임무수행에 앞장서
1958년 3월, 부대를 따라 귀국한 정수암은 강소성 서주시 가왕광구(贾汪矿区, 현재의 가왕구)에 정찰병으로 배치받았다. 정수암은 임무를 수행할 때마다 항상 전우들 앞장에 섰으며 귀국후에도 례외는 아니였다. 그는 항상 군인의 본색을 견지하며 각종 훈련과 연습에 적극 참여하여 자신의 군사자질을 부단히 제고하고 당과 인민의 사업에 최선을 다했다.
하루는 정수암이 병영에서 전우들과 함께 물만두를 빚고 있는데 “간첩행동이 있으니 빨리 탄약고의 안전확보를 지원하라!”는 퇀장의 임무를 전달받았다. 당시 부패장인 정수암은 전우들로 하여금 따뜻한 물만두를 먹도록 하기 위해 직접 몇몇 전사들을 이끌고 임무수행에 나섰다.
이번 임무수행에서 정수암은 전우들과 함께 다리 맞은 편의 적들과 교전을 하던 중 적들의 총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정수암은 피가 흐르는 상처는 뒤로 한 채 줄곧 탄약고 주위를 살피면서 안전을 확보했다.
정수암은 기자에게 “부상 당해 피가 흐른다고 자리를 뜨면 안되지요. 어떤 일이 있어도 탄약고가 적의 파괴를 당하지 않는 것이 우선이였으니까요.”라고 말했다.
이번 임무수행에서 정수암은 상급으로부터 또 한차례 3등공을 기입받았다.
임무 수행 속에서 여러 차례 부상을 입었지만 정수암은 항상 꿋꿋이 일어나 자신의 사명을 견지해왔고 두번의 3등공 외에도 두번 ‘5호 정찰병’으로 표창받았고 1959년 9월에는 중국공산당원에 가입했다. 부대에서 승승장구하던 정수암은 1961년에 얼굴에 혈종양이 자라면서 “정찰병으로 얼굴에 상처나 흉터 등 선명한 외모특징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규정에 따라 제대하여 고향 돈화에 돌아왔다.
26살 젊은 나이에 고향에 돌아온 정수암은 촌당지부 서기직을 맡고 고향건설에 힘을 이바지하였다. 그는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치부의 길에 나섰고 촌민들의 생활조건 개선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어 정수암은 1986년에는 돈화시무선전발전소에서 근무하다가 공장이 불황을 겪다보니 1990년에 공장이 페업되여 정리실업을 당했다.
항전정신, 홍색정신 전승에 어열을 불태우다
정수암은 87세 고령이지만 그의 몸과 정신은 여전히 젊은이들 못지 않다. 지난해 86세에 전동자전거 타기를 익혀 그 어디든 자신이 직접 운전해 다닌다.
정수암은 현재 젊은 세대들의 성장과 발전에도 관심이 많은 바 현재 연길 ‘로병사의 집’ 의무강연단 성원으로 매 행사 때마다 직접 전동자전거를 타고 행사장에 도착해 혁명이야기를 전파하고 항전정신, 홍색정신을 전승하고 있다.
연길 ‘로병사의 집’ 서숙자(왼쪽 첫번째) 서기 등과 기념사진을 남기다.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혁명을 견지해온 전우들을 떠올리며 정수암은 “항전정신은 우리 중화민족의 보귀한 재부이며 우리로 하여금 부단히 전진하게 하는 동력 원천입니다. 힘이 닿는 데까지 차세대들에게 혁명이야기를 들려주고 항전정신과 홍색정신을 세세대대로 전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로병사의 집’ 의 공익행사에서 우리는 늘 정수암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단정하게 군복을 차려입고 여러 가지 공훈메달과 휘장을 단 채, 현장을 찾은 참가자들에게 혁명년대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정수암의 목소리는 우렁차고 힘이 있었으며 그의 눈빛은 견정하고 단호했다.
정수암은 “오늘의 행복은 수많은 선렬들이 피 흘리며 바꾸어온 것입니다. 우리 후대들에게 혁명이야기를 들려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어렵게 얻어온 평화를 소중히 여기고 더욱 분발해 조국의 번영부강을 위해 이바지할 수 있다면 저는 여한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오늘도 87세의 정력이 넘치는 정수암은 자신의 행동으로 항전정신을 실천하고 혁명이야기로 더욱 많은 사람들이 홍색정신을 이어가도록 여열을 불태우고 있다.
/길림신문 유경봉, 리전 기자
编辑:유경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