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임 료녕성 무순시 신빈현 부현장 조만선의 생전 사업에서
2021년부터 꼬박 4년 동안 병원에서 뇌졸증과 싸우던 원 료녕성 무순시 신빈현 부현장 조만선(93세)로인이 지난 1월 19일 조용히 이 세상을 떠났다.
추도식에서 50여명 친척들과 친구들이 눈물을 흘리며 유체와 고별할 때 조만선로인의 양아들 심덕주는 필자의 손을 꼭 잡고 “우리 아버지는 두 아들과 딸이 한명씩 있었는데도 고아인 저를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숨이 멎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백성들을 잊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목이 메여 더 말을 잇지 못했다. 하여 필자는 조만선로인의 93년 인생의 발자국, 특히 그의 후반생 사적을 더듬어 본다.
1932년 3월, 길림성 집안현(지금의 집안시) 구재원촌에서 태여난 조만선은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사처로 류리걸식하다가 료녕성 신빈현 왕청문공사(旺清门公社, 1983년 향으로 고쳤다가 1985년에 진으로 고쳤음)에 정착했다. 째진 가난으로 조만선은 겨우 소학교를 졸업했지만 끈질긴 노력과 탄탄한 실력으로 공사공청단 서기, 향장, 현공안국 국장, 부현장 겸 공상국 국장으로 사업하면서 신빈현 우수공산당원, 차세대사업관심 특별상, 전국 조선족 5호가정 등 영예를 받았다. 특히 1964년 9월에는 32세 젊은 나이에 국경 15주년 경축활동에 참가하여 모택동, 류소기, 주덕 등 당과 국가 지도자들의 접견을 받고 그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 영예를 지녔다.
1964년, 32살의 조만선
개혁개방후 절주가 전에 없이 빨라진 세월에 많은 사람들이 퇴직하고 인생가치의 저울추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자기만의 안일한 생활을 추구하면서 오늘은 식당추렴이요, 래일은 외지유람이요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지만 조만선은 그렇지 않았다.
1992년 3월, 장장 40여년 공무에서 혼심을 바치던 조만선은 신빈현공상국에서 정년퇴직을 했다. 집에서 며칠 쉬고난 어느날, 많은 조선족들은 조만선이 퇴직하고 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집을 찾아왔다. 자기들도 돈을 벌어 잘 살고싶은데 조현장이 좀 도와달라는 것이였다.
“조현장, 우리는 한국으로 로무를 가고 싶은데 좀 알선해 주오.”
“조현장, 장사를 하고 싶은데 은행대출 좀 도와주오.”
“조현장, 도시 일자리를 좀 얻어주오.”......
기대와 애원에 찬 조선족들의 눈길은 조만선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내가 헐벗고 굶주림에 몸부림을 칠 때 얼마나 많은 조선족 농민들이 재워주고 보리밥을 주면서 나의 목숨을 구해주었던가?!)
며칠을 고민하고 사색하던 끝에 조만선은 발벗고 나서기로 했다. 김흥춘, 정석숭과 손잡고 ‘신빈현조선족경제무역총회사’를 세우고 선참으로 로무송출을 시작했다. 1993년부터 2년동안 무러 300여명에 달하는 신빈현의 조선족들을 한국, 싱가포르, 리비아, 로씨야 등 나라에 로무를 내보냈다. 먼저 한국으로 나간 사람들이 돈을 벌어 딸라를 집으로 보내오기 시작하자 대뜸 출국과 도시진출의 붐이 일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든 사업이 그렇게 순풍에 돛단듯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994년 2월, 신빈현의 100여명 조선족들의 출국시간이 다 되였지만 비자가 나오지 않아 출국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국에 있는 사장은 차일피일 구실만 대면서 로무비용을 되돌려 주지 않았다. 농민들은 너도나도 조만선을 찾아 도움을 청했다. 문제의 심각성과 사명감을 깊이 느낀 조만선은 즉시 현공안국과 현공상국에 출근하고 있는 홍택룡, 김태현, 류설송, 김흥춘, 정석숭 등과 같이 천진시 당고구에 자리잡은 한국 로무회사를 찾아갔다. 처음에 한국측에서는 “이미 비자의 출국시간이 지났소, 관련책임자가 없소, 지금 돈이 없소...”등등 구실을 대면서 오리발을 내밀었다. 하지만 조만선 일행은 당고구 공안국과 공상국에 제보하는 한편 5일간의 ‘화약냄새’ 넘치는 담판을 거쳐 끝내 100여만원의 로무비용을 되찾을 수 있었다. 조만선 일행의 처사에 너무도 감동된 농민들은 조만선 일행을 ‘고급식당에 청한다’, ‘사례금을 거둔다’, ‘선물을 사준다’ 하면서 인사를 내려고 했지만 조만선은 “이것은 우리가 응당 해야할 일들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모두 거절했다.
로년시절의 조만선
조만선의 선행은 이뿐이 아니였다. 그는 신빈현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를 일떠세우고 10여만원의 자금을 모금하여 항일명장 량세봉 기념비를 왕청문중학교 운동장에 세웠다. 당시 흑룡강성 성장 진뢰가 몸소 ‘항일명장 량세봉’ 제사를 써주었다. 뿐만 아니라 여러번 현정부와 현교육국을 찾아 자금을 구해서는 신빈현조선족중학교 교수시설이 어수선한 문제들을 해결해주었고 2년에 한번씩 신빈현조선족체육운동대회를 열었는가 하면 현 조선족 ‘5호가정’, ‘훌륭한 며느리’, ‘시어머니’ 평선활동을 조직했다. 1999년에는 전 현 조선족간부들을 조직하여 길림성 매하구와 료녕성 철령, 만융, 안산 등지를 참관하고 간부들의 시야를 넓혀주었다.
젊은 시절의 조만선이 북경 천안문 앞에서
2010년 심양 소가툰에 살던 조만선은 아들이 사는 대련으로 이주왔다. 그때 조만선의 나이가 80고령을 바라보는데다가 뇌졸증으로 왼쪽 팔과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되였다. 식구들은 “아버지, 이젠 년세도 많고 몸도 편찮으시니 사업을 그만두고 공원이나 바다가에서 산책하면서 만년을 즐기세요.”라고 말했으나 조만선은 “숨이 붙어있는 한 사업을 해야지.”라고 말하면서 대련시개발구조선족로인협회를 찾아갔다. 다년간 조만선은 장경준 회장을 도와 로인들을 조직하여 안중근박물관을 참관하고 이야기대회, 외지 참관, 문예체육 활동을 조직했다. 퇴직로임이 많지 않았지만 조만선은 협회에 큰 활동이 있을 때마다 협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조만선은 떨리는 손으로 16만자에 달하는 ‘안중근의사 학습자료’를 편찬하고 항일전쟁과 동북해방전쟁 시기 조선족 영웅인물사적을 편찬했으며 조선족 항일민요를 수집, 정리하여 소책자를 만들었다. 2018년부터 조만선의 병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인생의 종점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판단하고 떨리는 손으로 꼬박 3년 동안의 품을 들여 근 20만자에 달하는 인생회고록 <나는 력사 흐름속의 작은 물방울이였다> 를 편찬했다. 책의 결말에서 조만선은 백천 조씨의 족보, 현재 가정 경제상황을 상세히 자식들에게 알려주었고 마지막으로 유언을 남기였다. “나는 죽을 때 너희들에게 넘겨줄 아파트도 없고 저축통장도 없다. 호화로운 아파트에서 살고 자가용차를 몰고 다니는 너희들이 이런 행복이 모두 당과 정부의 덕택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며 무수한 혁명선렬들의 피와 목숨으로 바꾸어온 사회주의 이 땅을 소중히 지켜야 한다. 내가 죽은 다음에도 너희들은 나라의 법률과 사회의 공덕을 잘 지키며 형제들끼리 서로 도와주면서 화목하게 살기를 바란다.”
"한방울의 물도 태양의 빛을 발산할 수 있지만 방울방울 모여야 바다로 들어갈 수 있다."
숨지는 시각까지 백성들을 잊지 않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 이것은 한 공산당원으로서의 조만선의 인생 좌우명이였고 또 그의 실천이였다.
/길림신문 리삼민특약기자
编辑:유경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