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애령감주제작기예 주급 무형문화유산 전승인 안정금
조선족애령감주제작기예 주급 무형문화유산 전승인 안정금
“화룡현 토산자에서 ‘안주정뱅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요...”
조선족애령감주제작기예 주급 무형문화유산 전승인인 안정금(60세)씨가 아버지 안학만에 대한 추억이였다. 술을 많이 마시고 주정을 부렸던 것이 아니고 하도 술을 좋아하고 감주를 잘 빚어서 그렇게 불리웠다는 것이다.
마을에 결혼잔치나 애들의 돐생일 같은 군일이 있으면 의례 동네사람들이 쌀이나 닭알, 고기붙이 같은 것들을 들고 와서는 감주를 좀 빚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감주를 특히 잘 빚었던 것은 증조할머니로부터 할아버지, 아버지 대로 이어진 감주 제작 기예가 가문에서 대대로 전승되였기 때문이지요”
과거 술이 귀했던 시절, 사람들은 감주를 빚어 경조사에 쓰거나 술 대용으로 귀한 손님들을 접대하기도 했다. 안정금씨는 아버지가 마을사람들의 청을 거절하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집안에는 항상 감주를 빚는 데 쓸 누룩을 만드느라 널어놓은 보리싹이 정주방 가득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름에는 헛간에 있는 김치움에서 감주가 숙성되여갔고 겨울철이면 따뜻한 부엌 옆 항아리에서 감주가 맛있게 익어갔다.
아버지는 할아버지한테서 감주를 빚는 법을 배웠고 할아버지는 또 증조할머니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안정금씨는 4대 전승인인 셈이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증조할머니가 안씨가문의 제일 첫 감주 장인이였던 셈이지요”
증조할머니의 존함은 박애령이였다. 안정금씨가‘애령감주’라는 상호를 만들고 또 감주제작기예로 주급 무형문화유산 전승인이 된 것도 증조할머니의 오랜 전통과 바통을 이어가고 싶은 깊은 뜻이 담겨있었다.
안정금씨의 조선족애령감주제작기예는 중국 전승인 빅데이터쎈터에도 등록되였다
어렸을 때 안정금씨는 다섯이나 되는 남매들 중에서 유독 감주빚기에 관심이 많았다. 옆에서 시중들면서 아버지의 어깨너머로 감주 빚는 기술을 익히기도 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아닌 딸에게는 집안 대대로 내려온 감주기술을 전수하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감주 빚는 비법을 물려주려 했지만 오빠는 전혀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고 배우려고도 하지 않았다. 중학교 1학년 때 쯤 아버지가 문뜩 딸 정금이를 앞에 불러놓고 “감주 빚는 기술을 배워선 뭐 할래? ”하고 난데없이 물었다. 그래서 어린 정금이가 “아버지가 늙으셔서 감주를 빚지 못하게 되면 대신 감주를 만들어 대접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때 무슨 생각이 드셨는지 아버지가 정색해서“그럼 공책과 연필을 가지고 와서 하나하나 적어가면서 잘 들어봐…” 라고 하시더라는 것이다.
그것이 정금이가 17살 나던 1982년의 일이였다. 아버지가 말씀하신 것을 하나도 빠뜨릴세라 열심히 적었는데 필기한 내용을 일일이 확인하신 아버지가 부족한 부분을 다시 세세히 지적해주고 시정해주시던 기억이 어제일 같다고 안정금씨는 말했다.
“좋은 감주가 빚어지려면 우선 좋은 누룩부터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한테서 누룩 만드는 법부터 온전히 배웠다고 한다. 보리싹을 틔우는 절차에서부터 시작해 꽁꽁 밟아서 단단히 다져야 좋은 누룩이 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고 한다. 발효된 누룩에 흰 곰팡이가 떠오르면 최상의 누룩이 만들어진 것이고 까만 곰팡이가 끼면 실패한 누룩이기에 가차없이 버려야 한다.
좋은 감주를 빚으려면 좋은 누룩이 있어야 한다. 안정금씨가 직접 만든 누룩
그러나 감주를 빚는 과정에서 누룩 만들기는 사전 전주곡일 뿐이다. 감주를 만드는 데 쓰는 찹쌀도 불리는 시간과 찌는 시간이 정확해야 하며 찐 찹쌀을 식혀서 누룩에 버무리고 또 그것을 항아리에 담그기까지, 적당한 온도에서 발효를 기다리면서 맞춤한 시간에 감주를 받아 베천에 짜내기까지는 수없이 복잡한 공예와 절차가 잇따른다. 좋은 감주가 빚어지기까지는 깊은 정성과 각고의 노력이 깃든 장인정신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렇게 열심히 배워두었던 감주제작기술인데 안정금씨는 시집을 가면서 그후로는 한번도 감주를 빚어보지 못했다. 고향 떠나 멀리 북경에 가서 살면서 잊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안정금씨가 감주를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운명을 목격하면서였다.
2009년 3월, 아버지가 지병으로 림종을 앞두고 둘째딸을 찾았다. 아버지는 북경에서 달려온 정금이를 보면서 병환이 중해 긴말은 못하시고 감주라는 말만 되뇌였다. 그때 정금이는 어릴 때 아버지가 늙으셔서 감주를 더는 빚지 못할 때가 되면 제가 감주를 만들어 대접하겠다고 했던 옛날 약속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림종전에 딸 정금이를 보고 북경에서 돌아와 엄마와 함께 감주를 빚어보면 어떻겠냐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생전 유언이 저를 연변으로 돌아오게 했지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불쑥 고향에 돌아가 감주를 만들어보겠다는 정금이의 말에 남편은 펄쩍 뛰면서 반대했다. 그래도 그녀는 남편을 설득시켰고 결국에는 연변에 돌아와 감주를 빚기 시작했다.
전통방법으로 직접 가공한 보리싹과 누룩을 살펴보는 안정금씨
2009년에 연변에 돌아온 후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사처로 뛰여다녀봐도 감주빚기에 쓸 질 좋은 누룩이 없는 것이 가장 큰 골치거리였다. 좋은 누룩이 없으면 좋은 감주가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고민은 더 깊었다. 결국 안정금씨는 기억을 더듬어 자기가 직접 누룩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딸집을 작업실 삼아 보리싹을 틔웠고 어릴 때 아버지한테서 전수받았던 가르침을 일일이 떠올리면서 한치도 소홀할세라 정성 다해 누룩을 만들었다. 미구하여 하얀 곰팡이가 곱게 피여오른 질 좋은 누룩이 만들어졌을 때 안정금씨는 나도 잘할수 있겠구나 하는 강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였다고 말했다.
독에서 발효되면서 숙성되여가는 오디감주
처음으로 빚은 감주를 들고 연길수상시장 아침장에 팔러 나갔는데 자리가 없어서 남새장사군에게 사정사정해 그 옆자리를 빌어 첫 장사를 시작하였다. 밤이면 북대 야시장에 나가 팔아보기도 했다. 전통 감주맛이 좋았던 까닭에 그녀의 감주는 재빨리 소문나면서 연변의 여러 축제행사들에서도 그녀의 감주를 요청하기 시작했다. 일이 될라고 그랬던지 연길조선족민속원을 운영하는 림씨 성 관리인이 그녀가 빚은 감주를 맛보고 정금이를 민속원에 들어와서 감주를 팔면 어떻겠냐고 제의해왔다. 오매불망 바라던 귀인이 나타난 셈이였다.
2014년 안정금씨는 연길조선족민속원의 요청으로 민속원에 들어가 감주를 팔기 시작했는데 시원컬컬 전통적인 감주맛 때문에 날이 갈수록 사람들의 환영을 받기 시작했다. 그때로부터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안정금씨는 연길조선족민속원에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해 지금은 연변에서도 알아주는 유명한 브랜드 감주장인으로 떠올랐다. 그는 전통감주에만 만족하지 않고 당지에서 나오는 오디와 블루베리를 리용한 오디감주와 블루베리감주도 내놓았다. 소위 맛과 색갈, 그리고 건강까지 념두에 둔 화려한 감주의 혁신과 변신이였다.
안정금씨가 만들어 시장에 내놓은 여러 종류의 감주와 식혜들
요즘은 녹두와 대추, 호박, 찹쌀을 리용한 건강발효음료인 식혜까지 내놓으면서 민속원을 찾는 관광객들에게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지난해 식혜를 출시했는데 민속원을 찾는 관광객들이 모두 들고 다니면서 마시는 인기음료로 대박이 났다. 국내 관광객들은 물론 식혜의 종주국으로 불리는 한국의 손님들도 그녀가 만든 식혜를 맛보고는 한국식혜보다 더 훌륭하다면서 엄지손가락을 내민다고 안정금씨는 흐뭇해했다.
안정금씨는 전통의 맛도 중요하지만 부단히 변화발전하는 시대와 소비자의 수요에 따라 감주맛도 부단히 혁신하고 발전시켜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안정금씨가 전통의 맥을 이어 부단히 새로운 혁신을 꾀하면서 애령감주가 날이 갈수록 각광받게 한 원인이지 않을가 싶다.
연길조선족민속원에서 안정금씨는 이곳을 찾은 많은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중국조선족의 우수한 전통음식문화를 널리 알리고 또 인정받는 일이 보람있고 즐겁다고 말한다.
연길조선족민속원을 찾은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감주제작기예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안정금(오른쪽 첫번째)
“사실 감주를 비롯한 전통적인 민속발효식품을 만들려면 많은 시간과 품이 들고 힘든 것만은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돈벌이도 안됐고 힘들어서 많이 원망하기도 하고 후회하기도 했지요. 또 제가 만드는 감주나 식혜는 전통적인 발효만을 고집하기에 대량 생산도 하지 못합니다. 발효음식이기에 인차 상하는 페단도 있어 류통기간도 길지 못하지요…”
허다한 어려움과 페단들이 있지만 안정금씨는 시종일관 전통적인 감주제작기예만을 고집한다. 전통적인 제작기예가 아닌 기편적인 방법으로 감주나 식혜를 만들어 소비자들을 속이고 또 민속전통음식의 품위를 떨어뜨리면서 이미지를 추락시키는 것은 절대 용납 못할 일이기 때문이다.
안정금씨는 시종일관 전통적인 감주제작기예만을 고집한다
지금 그녀는 다음세대 전승인으로 딸 김화자와 사위 강영남에게 안씨 가문의 감주제작기예를 물려주려고 한다. 그는 어린시절 아버지한테서 감주 만드는 기술을 전승받던 그때를 생각하면서 딸과 사위에게도 감주 만큼은 절대로 거짓과 량심을 속이는 일 없이 성실하게 만들고 량심적으로 장사해야 한다고 천당부, 만당부 가르치고 있다.
“지금까지 힘들어도 아버지의 생전 유언을 이어나갔다는 것에 위안이 됩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민족의 전통음식문화를 대를 이어 성실하게 이어나가고 또 더 훌륭하게 전승발전시켜나간다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고 또 가슴 뿌듯한 위안과 자랑이지 않을가 생각합니다." 안정금씨의 허심탄회한 속심말이였다.
/글: 안상근기자 사진: 김파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