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녀성 박영옥과 한족녀성 류아광의 50년 우정 이야기
조선족녀성 박영옥(왼쪽)과 한족녀성 류아광
길림성 안도현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녀성 박영옥과 강서성 상요시에서 살고 있는 한족녀성 류아광(刘亚光)은 지금으로부터 50여년전 병실에서 아주 짧은 만남으로 면목을 익힌 사이지만 반세기를 넘는 세월 속에서도 그 우정이 조금도 색바래지 않고 지금까지 따뜻한 민족우애의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51년전인 1973년 2월, 당시 18살 밖에 안된 박영옥은 소아마비후유증으로 장애를 앓고 있는 다리를 치료하려고 혼자서 장춘으로 병보이러 떠났다. 장춘에는 소아마비후유증 전문치료병원으로 지정된 208병원이 있었는데 전국 각지 환자들이 많이 찾는 병원이였다. 병실마다 10명씩 입원해 있었는데 박영옥이 입원한 병실에는 그녀 혼자 조선족이였다.
수술은 4월 2일로 정해졌는데 아침에 의사가 들어오더니 돌연 수술이 6일로 미루어졌다고 알려주었다. 의사의 말을 듣자 박영옥은 저도 몰래 울음이 터져나왔다. 집을 떠난 지 한달도 넘는데 그동안 집 생각에 눈물로 베개잇을 얼마나 적셨는지 모른다. 병원의 한달 식비가 10원 정도이고 침대비는 하루에 20전이였으나 집에서는 있는 돈을 다 모아 30원을 부쳐왔다. 돈을 아끼지 말고 잘 먹어야 한다는 엄마의 사랑 담긴 편지도 함께 보내왔다.
당시 박영옥의 아버지 한달 로임이 겨우 32원이였으니 그녀의 병치료 때문에 집에 있는 일곱 식구의 생활비는 또 여기저기서 꾸어서 영위해야 하는 어려운 살림형편이였다.
박영옥은 나흘을 더 기다릴 수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수술하고 퇴원해야 집안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기 때문이였다. 나흘후에 수술하면 예상외로 침대비 80전을 더 팔게 되고 밥도 열두끼니 더 사먹어야 하니 그만큼 돈이 더 들 게 불보듯 뻔했다. 박영옥은 아침도 거른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기 시작했다. 출근한 의사가 병실에 들어왔다가 울고 있는 박영옥이를 보면서 이렇게 해석했다.
“얘야, 수술날자를 미루게 된 건 6일날에 북경영화촬영소에서 영화 찍으러 오는데 그날 현지촬영에 너를 내세우려고 그러는 거란다. 얼굴도 예쁘장하고 또 소수민족이여서 특별히 배려하는 거니 너도 협조해주렴...”
그때 전날 다른 병실에서 박영옥이 들어있는 병실로 옮겨와 그녀 옆 침대에 입원한 강서성 상요시에서 왔다는 류아광이 박영옥이를 보고 의사말대로 하라고 한마디 권고했다. 그러나 박영옥은 세차게 머리를 흔들면서 더 크게 울어댔다. 하루라도 빨리 집에 가고 싶었던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정상적인 사람처럼 걷고 싶기도 했다. 돈을 조금이라도 절약하고 싶었다. 집에서 부모님과 동생들이 배불리 먹지 못하면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을 텐데 영화촬영 때문에 날자를 미루면서 죽치고 병원에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만이 온통 머리속에 가득차 있었다.
박영옥의 딱한 사정이 안스러웠던지 의사가 빙그레 웃으며 그럼 당장 수술받을 준비를 하라고 했다. 그제야 박영옥은 눈물을 닦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3시간이나 되는 긴 수술을 받고 병실에 돌아와보니 박영옥의 침대우에는 사과꾸레미가 놓여져 있었다. 누굴가? 의아한 마음에 알아보았더니 옆자리 침대에 입원한 류아광이 그녀를 먹으라고 사다 놓은 것이였다. 환자들이 수술후면 모두 사과를 먹었는데 그때 박영옥은 돈을 아끼느라고 사과 한알도 살 엄두를 못 냈다. 그녀의 속마음을 눈치챈 그녀가 초면인 박영옥의 신세가 가긍하게 여겨져 따뜻한 관심과 사랑의 손길을 보내준 것이였다. 박영옥은 류아광의 따뜻한 관심에 잠간이나마 수술후의 통증도 사라지는 것 같은 감동과 고마움을 느꼈다. 수술하기 전날에 풋면목을 익히긴 했지만 한어말이 익숙치 못한 박영옥은 그녀와 몇마디 말도 변변히 나누지 못한 상황이였다. 그런데 그녀의 어려운 처지를 알고는 이같이 친인처럼 따뜻이 배려해주는 마음이 너무 고마웠고 코등을 쩡하게 했다. 당시 박영옥은 학생신분이였지만 그녀와 동갑내기인 류아광은 이미 어느 단위에 출근하고 있었다. 류아광은 한쪽 발뒤축을 들고 걸어야 하는 장애인이였다. 보통키에 통통한 몸매인 류아광의 눈과 입가에는 늘 미소가 어려 있었다.
1973년 장춘의 208병원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긴 류아광
수술하던 날 박영옥의 고모가 저녁에 퇴근하여 밤새 병간호를 해주었다. 첫날은 극심한 통증 때문에 박영옥이 잠을 못 이루었는데 고모도 한숨도 못 쉬고 함께 밤을 지새웠다.
이튿날, 두 눈이 벌겋게 되여 지쳐있는 고모를 보고 병실의 환자들은 자기들이 옆에서 번갈아 박영옥이를 간호해줄 테니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특히 류아광이 더 적극적이였다. 소변을 받아낸다,사과를 깎아준다 하면서 박영옥의 옆에서 바삐 돌아쳤다. 같은 또래지만 언니를 방불케 하는 그녀의 살뜰한 보살핌에서 박영옥은 고통이 무마됨을 느꼈고 수술로 지친 마음도 위안을 얻게 되였다.
수술후의 아픔은 박영옥이를 무척 괴롭혔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입술을 깨물어도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 그래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러면 류아광이 다가와 손수건으로 박영옥의 눈물을 닦아주군 했다. 류아광은 열흘간 박영옥이와 함께 한병실에 있으면서 많은 도움을 주다가 다른 병실로 옮겨갔다. 그래서 자주 볼 수 없었다. 7월달에 퇴원할 때 박영옥이는 그동안 많은 도움을 준 류아광이 너무 고마워 작별인사를 하러 찾아갔다.
“우리 앞으로 그냥 좋은 친구로 보내자요. 난 조선족들에 대해서 호기심이 아주 많았는데 이번에 조선족친구를 알게 돼서 너무 기뻐요”
“나도 마음 착한 한족친구를 알게 된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앞으로 우리 우정 영원히 변치 말자요”
박영옥과 류아광은 서로 따뜻이 껴안으면서 서로서로 하루빨리 건강이 회복될 것을 축원했다.
집으로 돌아온 후 박영옥과 류아광은 편지로 래왕했다. 편지를 통해 끊임없이 마음을 주고받았고 문화교류도 했고 선물도 교환했다. 비록 짧은 문안과 삶의 일상이 담긴 평범한 편지들이였지만 장애를 극복해가고자 하는 긍정적인 메시지들이여서 편지를 주고받는 가운데서 서로서로 삶에 대한 신심과 용기, 그리고 희망을 가지게 되였다.
박영옥은 류아광에게 조선족들이 즐겨먹는 고사리를 보내준 적이 있었다. 조리법도 알려주었는데 류아광은 그 조리법대로 료리를 했더니 아주 맛있었다면서 조선족음식을 무척 긍정하고 치하했다.
그후 류아광은 결혼해서 딸애를 낳았는데 조선족치마저고리가 너무 이뻐서 딸애한테 입혀보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조선족 민족복장이 이렇게 타민족의 사랑을 받는 것으로 해서 자호감을 느낀 박영옥은 지체할세라 인차 분홍색 치마에 색동저고리 한벌을 사서 류아광에게 부쳐보냈다. 그러자 류아광은 딸애에게 조선족치마저고리를 입히고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딸애가 워낙 귀엽게 생긴 데다 이쁜 치마저고리까지 입혀놓으니 더구나 이쁘고 귀여웠다.
조선족치마저고리를 입은 류아광의 딸
류아광의 딸애가 커서 소학교에 붙게 되자 그녀는 또 조선족치마저고리를 딸애에게 입혀보고 싶어했다. 그래서 또 치마저고리를 사서 부쳐보냈는데 딸애가 다른 옷은 안 입고 그냥 치마저고리만 입고 학교로 다닌다는 것이였다. 옷이 어지러워져 세탁할 때면 학교에 안 가겠다고 생떼를 쓴다고 하니 조선족치마저고리의 매력에 흠뻑 빠진 것이 틀림없었다.
한번은 류아광이 조선족치마저고리를 입힌 딸애를 데리고 백화상점에 갔는데 숱한 사람들이 연변에서 온 조선족인가고 묻더란다. 80년대에는 조선족치마저고리를 만나는 일이 연변과 멀리 떨어진 강서성에서는 그만큼 매우 희소했던 것이다. 그후 류아광의 딸애가 초중에 가게 되자 박영옥은 또 애에게 맞는 치마저고리를 사서 부쳐주었다.
류아광 역시 주는 것을 받기만 하는 그런 친구가 아니였다. 자지방에서 나오는 특등 록차도 수없이 박영옥에게 보내주었고 항주에서 나오는 비단천도 사서 보내주었다. 어느 한번은 어려운 생활에 보태라고 돈까지 부쳐온 적도 있었다.
박영옥은 류아광에게 선후하여 조선족 치마저고리 세벌을 보내주었다. 아기때 옷과, 소학교에 다닐 때, 중학교에 다닐 때 옷 이렇게 시기시기 보내준 것이였다. 그런데 일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류아광의 외손녀까지 조선족치마저고리를 입으면서 자랐다고 한다. 어릴 때 조선족치마저고리를 입고 자란 류아광의 딸이 커서 외손녀를 낳았는데 그가 또 딸에게 조선족치마저고리를 인터넷으로 구입해 사입혔다는 것이다. 박영옥은 조선족민족복장이 멀리 타민족에게 아름다움을 인정받고 또 사랑받은 일이 지금 생각해도 너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조선족치마저고리를 입은 류아광의 외손녀
류아광은 늘 한가지를 후회하고 있었는데 바로 박영옥과 함께 있을 때 조선말을 조금이라도 못 배워둔 것이란다. 비록 타민족이지만 조선족 언어와 복장에 그렇게도 마음이 쏠리고 관심이 많은 것이였다.
해가 지고 달이 뜨면서 처음 만났을 때 10대 후반 처녀들이던 박영옥과 류아광도 어느덧 얼굴에 주름 잡힌 70대 로인으로 되였다. 1973년 4월에 장춘에서 만나고 헤여진 후로 두 사람은 50년이 넘도록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나이가 들고 얼굴모습도 변했지만 서로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한 관심은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 두 녀성은 오랜 세월을 편지거래로 우정을 나누다가 위챗이 생긴 후부터는 온라인으로 더구나 련락이 잦다. 지금도 류아광은 박영옥이 거둔 문학창작 성과들을 기뻐해주고 늘 건강을 축원해주고 있으며 또 박영옥이 화목한 가정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을 격려하고 있다.
몇년전부터 류아광은 뇨독증으로 앓고 있지만 언제 봐도 한탄과 포기를 몰랐고 늘 밝고 긍정적 에너지를 주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면서 박영옥에게 영향주고 있다.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자주 만나지 않고 또는 오래동안 갈라져 있으면 그 정이 식어가고 메말라들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이 다르고 수천, 수만리 떨어져 살고 있는 두 민족 녀성의 끈끈한 우정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박영옥은 류아광과의 지난 50여년간의 우정을 생각하면 장애의 몸으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열심히 살아올 수 있게 된 긍정적인 삶의 동력이였다고 말하고 있다.
비록 열흘간이란 아주 짧디짧은 시간에 얼굴을 익히고 또 스쳐가듯 맺은 우정이지만 영원한 친구로 살아가자는 그 약속을 저버리지 않고 장장 50년 세월을 서로 상대를 관심하고 따뜻한 우정을 주고받고 있는 두 사람, 중화민족공동체의식을 든든히 다져가는 요즘 두 민족 녀성이 이어가는 민족우정의 이야기는 잔잔한 감동을 넘어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민족단결의 따뜻한 이야기로 승화하고 있다.
/안상근 기자
编辑:김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