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 전영실
글쓰기 좋아하는 나는 10년전에 중풍에 걸려 몸져누운 어머니를 내 눈동자처럼 아끼면서 십년간 모시고 있다.
우리 형제는 다섯인데 나중에 엄마가 둘째딸인 나하고 같이 있고 싶다고 하여 나는 반갑게 맞아 들이였다. 남편도 암때문에 저 세상으로 간지 십여년이 된다.
엄마가 나하고 같이 있고 싶어하는데도 리유가 있다. 부모님들은 여러 자식가운데서 아픈 자식에게 마음이 더 쏠리고 근심걱정이 더해간다.
나는 소학교 2학년때 학교가는 길에 넘어져서 허벅다리 대퇴골을 상하였다.
의사는 평생 절름발이로 살 것 같다고 말했다. 태여 날 때도 아무 장애없이 태여난 딸을 어찌 후천적인 절름발이로 만든단 말인가?
엄마는 무정한 현실을 접수할수 없었다. 그래서 나를 등에 둘쳐업고 사처로 병보이러 찾아 다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다행히 4년만에 천진골과병원에 가서 다리를 원상태로 회복하는데 성공하였다. 엄마는 나를 업고 치료하러 다니던 그때, 그 심정을 뼈속까지 새겼나보다. 나는 엄마의 등에 엎혀 다니던 4년의 엄마사랑이 뼈속까지 뿌리 내렸나 보다.
그래서 십년간 엄마를 극진히 보살펴왔다. 사실 식사기능까지 상실한 엄마를 보살피는 일은 갓난 애기를 보실피듯 정성이 드는 자상하고 꾸준한 노력이 드는 일이다.
코로 식도관을 위까지 밀어 넣고 액체영양음료를 정성들여 만들어 주입시켜야 한다. 매일 닭알 세알, 영양과일, 영양음료를 엇바꿔가면서 하루에도 여섯번씩 대접해 왔다.
대소변도 자주자주 살펴 처리해야 한다. 등에 욕창이 날가봐 자주 더운 물로 씻어주고 돌아눕혀야 했다.
코로나에 감염된 엄마를 살리기 위해 우리 형제들은 최선을 다 하였다. 80대 로인들이 면역력 부족으로 코로나를 이기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갈 때도 엄마는 용케도 기사회생하셨다.
올해 엄마는 이미 95세 고령이다. 중풍에 걸린지도 십년이 지났다. 나는 엄마가 100살을 넘기게 모시고 싶다. 아니 더 할수만 있으면 쭈욱 힘자라는 대로 그냥 끝까지 모시고 싶다.
그래서 엄마를 보살피면서 느끼는 점을 수필로 써냈고 상도 여러번 탔다.
“엄마글을 써서 금상까지 받았으면 됐지, 맨날 엄마 수필을 쓰네. ”
“인젠 영화극본까지 쓴다면서... ”
앞에서는 효녀요, 심청이요 올리 추던 사람들이 뒤에서는 나의 흉을 본다.
그런 말들을 들을때면 정말로 졸지에 가슴 한구석에 회오리 바람이 일면서 오뉴월인데도 차가운 한기가 서려온다. 늙으신 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힘듦을 효의 즐거움으로 느끼기도 하지만 종종 듣게 되는 종잡기 어려운 야릇한 꼬집음에는 마음이 저으기 아려나고 서글퍼지는 것을 어쩔수 없다.
내가 내 엄마를 모시면서 내 글을 쓰는데 말이다. 내가 무슨 명예나 리익을 바라고 엄마를 모시고 있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정말로 섭섭하다. 서운하다. 서글프다.
이것이 지금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정인가?
이것이 자기 부모를 잘 모시는 효에 대한 질투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누구나 다 다르다고 자아위안은 하면서도 힘든 사람에게 용기와 힘을 줄대신 오해와 야릇한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은 정말 안타깝고 서운하다.
그러나 누가 뭐라 하든 글 쓰는 나로서는 계속 엄마에 대한 아름다운 느낌을 글로 엮어나갈 것이다. 엄마는 비록 아픈 몸이고 나에게는 부담이기도 하지만 세상에서 하나뿐이고 나에게는 가장 보귀한 존재이고 희망이기때문이다.
编辑:안상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