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례 렬사가 70여년전에 집에 보낸 전선편지들
최근, 김우례 렬사가 40년대 후반부터 50년대 초까지 조국해방전쟁과 항미원조 전쟁터에서 용감히 싸우면서 장렬히 희생되기전까지 가족에게 보낸 20여통의 전선편지들이 처음으로 공개되면서 본사기자가 단독 입수하였다.
항미원조전쟁(1953년 3월 26일)에서 희생된 김우례(金禹礼)렬사는 1922년 12월 9일에 길림성 룡정시 동성공사 용성3대(지금의 동성용진 용성촌3조)에서 태여났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여 아들딸까지 둔 그는 조국을 해방하기 위하여 1947년 12월 7일(《중국조선족혁명렬사략전 》제13권 95페지. 그러나 림시 립공증명서에는 1948년 1월 27일로 기록되여 있다.)에 동북민주련군(중국인민해방군 전신의 하나)에 참군하여 제10종대 제30사 제90퇀에 배치받았다. 그는 부대에서 단기간의 신병훈련을 거친후 부대를 따라 황화산-철령저격전, 개원해방전투에 참가하여 강인한 혁명투지를 키웠다.
룡정시 동성용진 용성촌의 혁명렬사기념비(렬사명 첫줄 왼쪽 두번째가 김우례임).
그의 소속부대는 료심전역과 평진전역에 참가한 후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제141사 제423퇀으로 재편성되여 강남으로 진군하였다. 1949년 3월 29일,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그는 반장을 거쳐 패장으로 승급되였고 의창-사시전역, 장강도하작전, 천동전역, 상서토비숙청 등 전투에 참가하여 중국의 해방을 위하여 뛰여난 업적을 쌓았다.
1952년 12월 26일에 3등공을 세우고 발급받은 림시 립공증명서.
그동안 김우례렬사는 전투여가를 타서 장춘, 봉천(심양), 호남 등지에서 십여통의 편지를 고향에 보냈는데 고향에서 후방건설에 참가하고 있는 안해와 어머님에 대한 문안과 자식들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전선의 승리소식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경축하는 내용 등이 담겨 있었다.
1950년 4월 7일에 상급의 지시에 따라 그와 부대의 조선족장병들은 머나먼 광서성에서 출발하여 하남성 정주를 거쳐 조선으로 이동, 조선인민군 제4사단 제18련대(후에는 중국인민지원군 제23군 69사와 제20군 60사 정치문화련락부)에 귀속되였으며 전투경험이 풍부한 그는 소대장으로 임명되였다.
1951년 봄, 한차례 전투에서 부상당한 후 후방인 신의주에서 20리 떨어진 용천군 양서면 서망리의 박병호네 집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안해 박상숙의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서 그는 병이 도져 후방에 치료를 내려왔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후방에 있는 어머님과 가족과 동네에서 함께 해방군에 가입했던 동지들의 안부를 물었다.
이번에 공개된 김우례 렬사의 생전 전선편지들은 70여년의 오랜 세월이 흘러 색바랬지만 렬사의 랑만적인 생활태도와 혁명적인 세계관 그리고 애틋한 가족사랑을 읽어볼 수 있는 따뜻한 내용들로 심금을 울린다.
김우례렬사가 해방전쟁시기에 안해에게 보낸 편지와 《중국조선족혁명렬사략전 》제13권 95페지.
날자 미상(장춘해방전투 이후로 추정됨): “세월은 류수같이 가는데 그동안 가내가 무고한지? 그리고 아이들도 잘 자라는지? 나는 길림에서 편지한 후 소식을 전하지 못하였지만 건강한 몸으로 전방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날이 전승하고 있고 국민당은 아침풀잎의 이슬같이 스러져 가고 우리는 참 재미있게 싸우고 있습니다.(이하 략)”
민국38년 1월 3일: “신년을 맞이하여 전체 식구들에게 건강을 축복합니다. 본인은 여전하게 무고도일하니 안심하시오. 우리들은 동북을 출발한후 화북땅에 도착하여 각지에 있는 적을 다 없애버리고 중국에서 두번째로 큰 천진을 해방하였습니다. (이하 략)”
1949년 11월 2일: “농촌에서 제일 분망한 계절에 아울러 전방지원에 대단히 곤난한 줄 알고 있으며 가내 모두 무사한지? 본인은 천진에서 출발한후 넓은 화북과 화중지구를 잘 구경하고 황하를 건너 장강을 찾아가는 길에 많은 인민들의 환영을 받고 남하하여 어느덧 장강을 만났습니다. 크기도 한 장강을 건너 적을 찾아서 호북을 지나 호남에 다그쳐 와서 장개석 비적을 만나 싸웠는데 우리 군은 맹렬히 싸워 여기 호남의 수십만의 적을 완전히 소멸하여 큰 승리를 쟁취하고 지금은 련병을 하면서 나머지 잔여비적을 깨끗하게 소멸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이하 략)”
1950년 11월 11일: “…나는 조선에 양력 4월 7일에 도착하였는데 광서성에서 떠난후 편지 한장 하지 못하여 미안하였소.(이하 략)”
1951년 5월 7일: “…아무쪼록 아이들 공부 잘 시키오. 아이들 공부 잘하구 못하는데는 부모에게 달린 것이요. 그리고 아이들 곤난한 점은 인츰 해결하여주오. 내가 군대에 나올 당시에 (당신이) 치과를 할려고 견본을 찍은 이를 해넣었는지? 안하였으면 이를 해넣고…(이하 략)”
1951년 5월 10일: “…나는 지금 몸이 무고치 못하여 후방인 용천군 양서면 서망리 345번지 박병호댁에서 병치료중인데 병이 나으면 인차 전방에 나가게 될 것이요.(이하 략)”
1951년 7월 5일: “…나는 이곳에서 2개월간 치료를 받아 병이 완전히 나아서 전방에 가게 되였소. (중략)아무쪼록 아이들 공부를 잘 시키고 금택이가 일학년에서 우등생으로 공부하였다는 것은 기쁘나 이것에 만족할 것 없이 해마다 그와 같은 성적을 내야 하겠소.(이하 략)”
1951년 9월 30일: “추수계절에 어린 아이들 데리고 얼마나 수고 많겠소? 그리고 동네 여러분 다 무고하옵시며 서구동의 집안도 다 무고하온지? 내가 6월에 (당신이) 륵막염으로 인하여 수술하였다는 편지를 보고 집에서 그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를 짐작하고 있소. 병으로 고생하면서 아이들 공부를 열심히 시킨다는 편지를 보고 감사를 금할 수 없소.아무쪼록 병을 잘 치료하여 자기몸이 든든해야 하니 금액이 곤난하면 금액이 될만한 것을 팔아서라도 병을 완치하오.(이하 략)”
김우례렬사가 항미원조시기에 안해에게 보낸 부분적인 편지.
1952년 3월 27일: “(전략) 그간 집안 식구들은 별고 없는지? 나는 지금 전선에서 몸 무고히 잘 싸우고 있소. 이전에 병으로 고생한다는 편지는 수차 받아보았지만 참으로 도움은 없었고 도와줄래야 어떻게 할 여지가 없었소. 아무쪼록 병을 잘 치료하여 과거 고생하던 이야기를 하면서 잘 살기오…(이하 략)”
이처럼 가족을 중히 여기고 삶을 랑만적으로 대하였던 김우례렬사는 “1953년 3월 26일, 최전선(평강군 금곡리)에서 당과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용감하게 싸우다가 중요한 전투임무를 승리적으로 완성하고 적의 폭격으로 희생되였다.”(조선인민군총정치부, 중국인민지원군련락부 초급당위원장 한순호가 보낸 사망통지서에서) 렬사가 희생된 후 평강군 금곡리 앞산에서 부대와 지방의 인민대표들이 참석한 추도식을 거행하여 렬사의 업적을 기리였다.
조선인민군총정치부, 중국인민지원군련락부 초급당위원장 한순호의 사망통지서 원문.
김우례렬사처럼 항미원조전쟁에서 희생된 연변출신 렬사는 7,621명이다. 토지혁명시기와 항일전쟁시기, 해방전쟁시기, 사회주의건설시기의 렬사까지 합하면 연변에는 총 만6,812명의 렬사와 1,010여명의 무명렬사가 있다. 연변에서 유일한 국가급 애국주의교양기지인 연변혁명렬사릉원(‘연변혁명기념관’)에 가면 우리는 렬사들의 사적을 학습할 수 있으며 렬사벽에서 그들의 이름을 또렷이 확인할 수 있다.
손자 김춘일씨가 연변혁명렬사릉원 렬사벽앞에서 '김우례'할아버지의 이름자를 찾아내고 숭모의 마음을 금치 못했다.
혁명렬사들의 감동적인 영웅사적은 길이 찬송되여야 하며 그들의 숭고한 애국주의 정신과 혁명영웅주의 희생정신은 길이 따라배워야 하며 그들의 백절불굴, 간고분투의 혁명전통은 영원히 계승, 발양되여야 한다.
/길림신문 김태국 기자
编辑:안상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