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왜서인지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을 떠올리고 싶다. 좋아하는 단어들을 떠올리며 만감이 교차된다.
나는 ‘만남’이란 단어를 좋아한다. 만남이 있어 배움이 있고 만남이 있어 사랑이 있고 만남이 있어 리해와 관용이 있다. 만남 하나하나가 내 삶에 소중했다. 금방 태여나서는 가족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가족 사랑을 듬뿍 받으며 그 사랑을 작은 가슴에 많이 저장했다. 그래서 사랑의 결핍을 느끼지 않고 바르게 씩씩하게 자랐다. 학교에 입학해서는 선생님을 만나고 동학들을 만났다. 선생님과의 만남을 통해 지식을 배우고 동학을 만나 우정을 배웠다. 뿐만 아니라 존경과 사랑, 협동, 경쟁을 배웠다. 학교를 졸업하고 교편을 잡아서는 학생들을 만나 지식을 가르치고 사랑을 베푸는 것을 배우고 몸에 익히였다. 십대의 학생들과 함께하는 나의 하루는 활기와 생기와 즐거움으로 충만되였다.
천차만별의 사람들과 만나면서 가끔은 갈등하고 미움과 증오도 있었지만 사랑과 리해, 관용이란 단어 덕분에 갈등과 미움과 증오는 봄눈 녹듯 사라졌다. 비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지듯 정은 더 깊어졌으며 내 삶은 더 성장하고 단단해졌다.
나는 책과의 만남을 통해 지식과 삶의 지혜를 차곡차곡 쌓아갔다. 책은 나에게 소중한 친구들을 많이 만나게 하였다. 책 속의 인물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내 앞에 다가와 자기의 삶의 이야기와 생각과 느낌을 들려 주었다. 나만의 시간과 공간에서 책과 만나면 나는 전혀 외로움을 느끼지 못했다.
만남 하나하나가 내 삶을 지탱해주고 만남 하나하나가 내 삶에 온기를 더해주고 만남 하나하나가 내 삶에 보다 밝은 색갈을 올려주었다. 수많은 만남은 ‘우리’를 만들어주었다.
함께하는 세상에서 나는 ‘우리’라는 단어를 많이 좋아했다. ‘우리’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뭉친 힘이 샘 솟듯했다. 여럿이 함께여서 그 힘이 무궁무진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내가 이 세상에 혼자가 아니고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느낌에 더는 외롭지 않고 위안이 되여주었다. “구두쟁이 셋이면 제갈량보다 낫다”고 ‘우리’여서 그 어떤 곤난도 두렵지 않고 ‘우리’여서 먼길도 손에 손잡고 걸어갈 수 있었다. ‘우리’여서 슬픔은 반으로 줄어들고 기쁨은 배로 커졌다.
‘우리’가 삐걱거리지 않고 온당하게 오래동안 조화롭고 평화롭고 평온하게 발전하려면 또 필요한 단어들이 있는데 나는 그런 단어들을 너무 좋아했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필요한 ‘나란히’라는 단어를 오래동안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한다. 불평등하게 태여나서 불평등하게 살아가면서 나란히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다. 격변하는 시대에 경쟁은 불가피면적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경쟁 속에서도 나는 나란히 살아가는 삶을 많이 추구했다. 그래서 신입일 때에는 선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는 욕심에 부풀어 앞만 보고 숨차게 달렸고 세월이 흘러 선배가 되였을 때에는 나의 노루꼬리만한 경험을 후배들과 사심없이 공유하며 어깨 나란히 걸었다. 이래서 그 긴 30여년을 그 누구와도 갈등을 만들지 않고 너 좋고 나 좋게 달처럼 둥글둥글게 잘 지내오면서 편하고 즐겁고 행복했다.
부부가 함께 살아가는 가정에서도 ‘나란히’가 필요하다. 둘이 한방향을 보면서 어깨 나란히 걸어갈 때 부부는 대화거리가 많아지고 대화가 더욱 편하고 신난다. 거리를 가다가 가끔 늙은 부부가 손에 손잡고 나란히 걸어가며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뒤모습을 보면 참 다정하다는 느낌과 함께 우리 부부도 그렇게 늙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세월이 흘러 형제자매들의 생활에도 빈부의 차이가 있는데 앞에서 이끌고 뒤에서 밀어주며 나란히 향상할 때 혈육의 정이 더욱 끈끈해진다. 있어도 있는 티를 내지 않고 상대방의 자존심을 지켜주면서 좀씩 도와주는 것이 혈육의 정이다.
‘우리’를 살아가면서 나는 ‘진심’이란 단어를 빼놓을 수 없다. 거짓의 반대인 진심은 참으로 아름답고 따뜻하다. 진심인 친구가 곁에 여럿이 되여 내 삶이 외롭지 않고 항상 행복하다. 일이 있으면 낮이고 밤이고 망설임없이 전화를 할 수 있는 친구, 고민도 아무런 걱정없이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 내 허물도 꺼리낌없이 보여줄 수 있는 친구 … 진심인 친구가 곁에 있어 나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내 모든 것을 털어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스트레스가 별로 쌓이지 않는다.
나는 직장에서 ‘최선’이라는 단어를 너무 좋아했다. 나는 본인이 최선했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 최선을 많이 부르짖었다. 오죽하면 학생들이 나에게 ‘최선’이라는 별명을 달아주었겠는가! 최선했기에 교원사업이 즐거웠고 즐거웠기에 행복했다. 최선하는 하루하루는 충실하고 보람있고 가치 있었다. 최선하는 삶에는 후회가 적었다. 최선이 몸에 밴 나는 재직일 때 학생들에게 작문을 열심히 지도한 경험으로 정년퇴직한 지금 작품을 열심히 쓰고 있으며 이런 고상한 취미생활이 있기에 제2인생이 외롭지 않고 하루하루가 충실하다. 보다 재미있고 생명력 있는 글을 쓰려고 최선하기에 날에 날따라 조금씩 조금씩 향상하는 내 글을 만난다. 그 성취감이 주는 기쁨은 단어가 가난한 나로서는 형언할 수 없다.
나는 ‘그리움’이란 단어를 오래동안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며 래일도 좋아할 것이다. 누구를 그리워하고 누구의 그리움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마음 설레는 일인가! 이십대에는 사업을 열심히 하면서 선배들의 긍정과 칭찬을 받는 멋진 모습을 그리워했다. 30대에는 일선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좀 빛나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워했다. 40대에는 일선에서 중견인이 되여 후배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모습을 그리워했다. 50대에는 아름다운 마무리를 그리워하였으며 내가 떠난 일터에서 후배들이 내 이름 석자를 떠올리며 따뜻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해주기를 그리워하기도 했다. 60대에 들어서니 우아하고 세련된 삶을 그리워한다. 비록 그리움들과 멀리 떨어진 삶을 살아왔지만 이런 아름다운 그리움들을 함께했기에 내 삶이 무미건조하지 않고 흥미진진했다. 그리움들은 그동안 내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한몫 툭톡히 했다.
‘만남, 우리, 나란히, 진심, 최선, 그리움’이란 아름다운 단어를 좋아했기에 나는 이 세상을 좀더 따뜻하게, 좀더 충만하게, 좀더 인간답게 살지 않았나 생각된다.
나는 오늘도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과 함께 나만의 삶의 이야기를 엮어가면서 주어진 삶에 아름다운 색칠을 한다.